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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딸 Oct 28. 2020

인순과 덕순 1

너의 할머니 이야기

인순은 덕순의 두 살 아래 동생이다. 같은 엄마 배에서 나왔는데도 둘은 생김새가 다르다. 마을에서 힘이 세기로는 장사라고 소문난 아버지 덕분에 덕순과 인순은 둘 다 튼튼한 체격을 덤으로 물려받았다. 덕순 위로 또순, 봉순 두 언니가 있었지만 나이 차가 적은 덕순과 인순은 거의 동무처럼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랐다. 비교적 말수가 적은 덕순은 아버지 체격을 유난히 닮아 거무스름한 피부에 생김새가 우직하고 투박하다. 반면 뼈대는 굵지만 하얀 피부를 가진 인순은 얼굴만 보자면 천생 여자다.


두 자매가 세상에서 제일 숨기고 싶은 것이 손과 발의 생김새다. 죽을 때까지도 남 앞에 내어놓고 싶지 않은 그녀들의 인생 최대 흠이었다. 튼튼한 체격은 그렇다 치더라도 울퉁불퉁, 툭툭 불거진 거친 남정네 같은 손과 발이 정말 싫었다. 어디 가서 바꿀 수만 있다면 어떤 놈의 등을 쳐서라도 아니 평생 모아둔 독사알 같은 돈을 다 주고서라도 진작 바꿨을 텐데... 돈만 있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쪽같이 뜯어고치고 바꿔주는 요즘 세상에 어째서 못생긴 손발의 모양은 바꾸지 못하는지, 간판 걸고 의사 하는 놈들은 죄다 돌팔이거나 기술이 시원찮은 모양이라 생각했다.


가뜩이나 뼈대가 굵어 자칫 상머슴으로 여겨질까 손발 이야기만 나오면 절로 움츠러들던 그녀들이 혼기가 차서 시집을 갔다. 덕순은 열여덟에 시금치와 고구마가 잘된다는 부자 동네로 시집을 갔고 인순은 처녀 나이로는 늦은 스물하나에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친정보다 훨씬 골짜기로 시집을 갔다. 인순은 신랑을 비롯한 시댁 식구 앞에선 절대 손발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누가 손이 어떻니 발 모양이 어떻니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인 양 절로 손이 등 뒤로 가고 발끝이 웅크려졌다.


덕순은 자기보다 서너 살 어린 남자를 신랑으로 맞았는데, 손위 시누이가 많았지만 자손이 귀한 집이라 하나뿐인 며느리를 시댁에선 꽤 아껴주었다. 동네 사람들처럼 덕순도 시집간 이듬해부터 밭에 나가 시금치를 캐고 고구마 줄기를 따서 짚으로 묶어 가지런히 단을 만들었다. 나락 논이 별로 없었던 바닷가 동네라 밭에서 나는 것들로 일 년 내 읍내 장을 들락거린 덕분에 남의 집에 빌리러 다니는 일 없이 다섯 아이를 낳아 키웠고 살림도 차츰 불었다.


인순은 종갓집 종손에다 칠 남매의 맏며느리로 시집을 갔다. 변변한 논밭 한 뙈기 없는 살림에 먹을 입만 오글오글 모인 시집이었다. 신랑을 비롯한 시동생들은 모두 남의 집 머슴을 살거나 품삯을 받아와 살았다. 물이 귀하지 않고 나뭇가지가 다섯 조각으로 부러지는 땔나무 걱정 없는 동네라고 시집가기 전에 들은 말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살림이 없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때마다 먹여야 할 입은 많고 일해야 하는 논밭은 없으니 어쩌랴. 말이 새 각시고 신혼이지, 시집간 그해부터 신랑을 따라 눈만 뜨면 진진(긴긴)밭골이 있는 산비탈을 무너뜨려 화전을 일구러 다녔다. 흙보다는 돌멩이가 더 많은 산비탈을 밭으로 만들어 고구마를 심었다. 첫 수확을 하던 어느 늦가을, 줄줄이 딸려 나오는 고구마를 캐고 또 캐내어 이고 지고 산을 내려올 때,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뺀지르르 속을 썩이는 세 시동생과 밥상을 내어갈 때마다 방바닥에 드러누워 투정 부리는 여섯 살 막내 시누이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시부모에 시동생, 시누이 들을 거천해보니 고생하는 게 싫어 아이는 셋만 낳았다. 뼈 빠지게 밭을 일구고 열심히 일한 덕에 논마지기나 장만했다 싶었다. 줄줄이 혼기가 찬 시동생, 시누이 들을 치우고 나니 피 같은 논이 없어졌다. 먹는 입은 줄었지만 살림은 늘지도 않았다. 같은 나이 이웃 여자들은 도시로 나가 생선 장사도 하며 돈을 번다는데, 보고 배운 것이 논일, 밭일이니 읍내 나가 장사를 한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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