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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딸 Oct 28. 2020

인순과 덕순 2

너의 할머니 이야기

세월이 흐르고 덕순은 허리가 굽었다. 동네에는 여기저기 큰 공장이 들어섰다. 시금치며 고구마 줄기로 돈을 만들어주던 밭은 비싼 값에 팔렸고 덕순이 살던 집은 이층짜리 방이 여러 개 딸린 원룸으로 바뀌었다. 여름 내내 땀 흘리며 따다가 손톱 밑이 새까맣게 되도록 껍질을 벗기던 고구마 줄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꼬박꼬박 고마운 월세가 정기적금처럼 덕순의 통장으로 들어왔다. 아들딸도 제각각 앞가림하며 잘 사는 것 같고, 통장에 모인 돈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몇 해 전 먼저 간 영감이 생각났지만 이만하면 되었다 싶었다.

  

젊은 시절엔 서로 먹고사는 게 어려워 자매끼리 어쩌다 소식이나 전할 수 있었다. 위로 봉순, 또순 언니는 오래전에 떠났으니 덕순은 자연 동생인 인순을 찾게 되었다. 함께 나이를 먹어간다는 생각에 더 그랬다. 인순네 집에 갈 때는 매번 큰아들이 실어다 주었는데 갈 때마다 읍내 마트에 들러 인순이  좋아하는 설탕 발린 도나스와 뼈에 좋다는 우유를 샀다. 다른 건 몰라도 우유가 골다공증에 좋다는 것은 오래전에 알게 된 상식이었다.


두 자매 모두 여러 해 전에 무릎 수술을 했는데, 먼저 수술한 덕순은 무릎이 잘 접히지 않아 늘 불만이었다. 병원이 멀기도 했지만 가까이 있는 자식이 없어 조리를 잘하지 못해 그렇다고 했다. 인순이 수술할 즈음엔 의료기술이 좋아져 다리를 마음대로 구부리고 펴는 걸 보며 덕순은 몹시 부러워했다. 거기다 두 무릎을 한 번에 해결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생했던 세월을 치자면 벌써 무릎 수술을 열 번도 넘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 치자면 비록 모양은 못생겼지만 튼튼한 뼈대를 물려준 아버지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만나면 옛날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자랄 적에 엄마, 아버지로부터 야무지지 않다고 야단맞은 일, 동무들과 산에 나물 캐러 쫓아다니던 일, 긴 겨울밤엔 가시내들끼리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며 군밥 해 먹었던 일이며 읍내까지 막걸리 심부름시키던 아버지가 미워 죽겠더란 이야기는 세월을 뛰어넘어 팔십을 넘어가는 두 할매를 소녀 시절로 돌아가게 했다.


열아홉.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덕순은 집안일은 물론이고 논밭의 일이 서툴렀고 무엇보다 시댁 식구 대하는 일이 힘들고 어려웠다. 이런 게 시집살이인가 하는 서러운 마음이 들다가도 문득 스물한 살 늦은 나이에 두어 벌 옷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시집가던 막냇동생 인순이 생각났다.


식구들 밥을 지으려 쌀을 퍼낼 때마다 조금씩 따로 모았다. 제법 쌀이 모인 어느 날 시어머니 몰래 읍내 장에서 쌀을 팔아 치마, 저고리 두 벌 해 입을 옷감을 샀다. 알록달록 빛깔도 고운 양단이었다. 동생은 시집가기 전에도 솜씨가 좋아 이웃 동네에서 자주 일감을 받아 옷을 만들곤 했으니, 제 손으로 야무지게 바느질해 입으면 참 예쁘기도 하겠단 생각을 했다. 이것 받고 좋아할 인순을 생각하며 총총히 돌아왔다.


인순 할매는 덕순 할매가 돈 많은 부자인데도 인색하고 욕심이 엄청 많은 노인네라 여긴다. 물건 하나도 아까워 선뜻 사지 못하는 구두쇠 할망구라 말한다. 어쩔 땐 말하는 것이나 마음 쓰는 것을 보면 얄밉다. 자기는 있는 것 없는 것 다 찾아 꺼내어 주는데, 기껏해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시큼털털한 요구르트 두어 줄에 식은 도나스 빵 한 봉다리라니... 대놓고 말하긴 뭣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욕심 많은 할망구다. 그건 그거고. 그러면서도 인순 할매는 덕순 할매 오는 날이면 바빠진다. 평소에는 함께 사는 며느리 눈치를 보지만 덕순 할매 오는 날에는 사정이 다르다. 뭐라도 하나 더 줘 보내려고 애가 탄다. 항상 보내고 나면 미처 챙겨 보내지 못한 것이 꼭 하나씩 발견되어 아쉽다. 고방에 가서 말려 두었던 산나물이며 다래 순, 고사리, 누렁호박을 꺼내 오고 그중에는 특별히 잊지 않고 며칠 전부터 찧어놓은 쌀자루도 있다. 덕순 할매가 올 때마다 인순 할매는 나락 한 포대를 헐어 방아를 찧는다. 새 나락 나기 전에 얼른 묵은 나락을 없애라는 아들의 엄명 조의 잔소리가 이때만큼은 싫지 않고 오히려 고맙기까지 하다.


인순 할매는 덕순 할매만 보면 오래전 어렵게 모은 쌀을 팔아 옷 두어 벌 해 입으라고 보내주었던 양단 옷감이 생각났다. 낯설고 서툰 시집살이에 언니가 보내준 옷감은 며칠 밤이 걸려 고운 양단 치마, 저고리가 되었다. 입을 때마다 서럽고 외로운 마음이 가시고 기분이 좋아졌다. 해만 떨어지면 가고 싶던 친정 생각도 잊게 해주었다.


육십여 년 전, 덕순이 인순에게 보내주었던 고운 양단 옷감 두 벌이 쌀자루가 되어 덕순에게로 되돌아간다.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지.

사필귀정! 쌀로 보은! 인순 할매의 오늘날까지의 금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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