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1
할머니는 참 궁금한 것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은 것 같다. 통화하는 걸 듣고는 손녀딸인 줄 짐작하고 내용을 알고 싶어 해서 엄마가 슬쩍 구라를 쳤다. 졸업할 때가 되니 이것저것 나가는 게 너무 많아 생활이 빠듯하여, 야무진 손녀딸이 적자 난 적이 없는데 딱 이번 달에만 생활비가 쪼깨 모자라서 빌려달라 하네요. 어머이~
"아이구, 그라모 내 병원도 고마 안 갈란다."
얼마 전에 할머니 독사알 같은 돈 백만 원을 엄마가 빌려 썼거들랑. 할머니가 쓰는 병원비는 얼마 되지 않는데도 엄살을 부리신다. 할머니의 지나친 상상 내지는 배려가 엄마는 항상 편치가 않다. 낼모레 장날 송아지 팔면 퍼뜩 할매 돈부터 갚아야겠지. 왜냐하면 할머니는 뒤끝이 좀 오래가서 무슨 일이든 신속 정확히 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생각나게 하시거든. 엄마가 할배 할매랑 살아보니까 제일 무서운 것 중의 하나가 할머니한테 손 벌리는 일이다. 물론 아빠는 자기 엄마니까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또 꼭 갚지 않아도 그만이라 여기지만 말이다. 얘길 하다 보니 마치 엄마가 네가 빌린 돈 꼭 갚으라고 다짐하는 꼴이 됐네.
엄마 나이 오십이잖니? 요즘 엄마는 가끔 할머니가 불쌍한 마음이 들어 할머니한테 잘하려고 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그런 것보다는 그냥 그래. 불쌍해 보이니까 저절로 잘해드리고 싶고 말 한마디도 신경을 쓰게 되더라. 가능하면 할머니 마음이 서운하거나 상처받지 않게 하려고 할머니 생각을 많이 한다. 그게 아마 엄마도 나이 들어간다는 표시가 아닐까 싶네.
아빠? 아빠는 잘 모르겠네.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 말이야. 그렇다고 아빠가 함부로 대한다는 건 아니지만 알다시피 아빠는 그리 자상하고 부드럽게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잖니. 하지만 가끔 아빠는 엄마한테 할배 할매가 불쌍해 보인다고 말한다. 아빠 역시 나이 들어간다는 뜻이겠지.
네가 졸업할 때가 되었다고 하니 아빤 요즘 자주 네 얘길 한다. 키도, 몸집도 그리 크지 않은 네가 앞으로 헤쳐나갈 세상을 생각하면 안타까워 죽겠다며 심드렁해 하기도 한다. 엄마는 너를 심각하게 걱정한 적은 별로 없다 싶은데 의외로 아빠가 훨씬 네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아빠는 자신이 곧 너라고 생각해. 이해가 되니?
이 땅에 부모는 각자 자기 방식으로 아들딸을 사랑한단다.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말이야. 그 방법이 어떤 땐 너희들이 전혀 사랑이라고 느끼지 못할 때가 많겠지만 어쨌든 엄마 아빠는 널 사랑한단다. 늦은 밤까지 알바하는 네 생각을 하며 마음 찡해 하고 어쩌다 하는 전화기 너머 네 기침 소리만 들어도 마음 아파하는 그런 모습이 엄마 아빠란다.
엄마는 할배 할매를 참 좋아하고 사랑하고 살기로 마음먹는다. 비록 할배 할매가 힘들고 아프고 상처 나게 하는 일이 많을지 몰라도 엄마는 그럴 참이다.
사랑하는 딸! 오늘밤도 늦게까지 알바하고 내일 아침엔 피곤에 겨워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겠지? 건강해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