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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딸 Nov 01. 2020

고성띠 1

‘고성띠’는 내 시어머니의 택호다. 열아홉 꽃 같은 나이 되도록 일곱 형제자매 속에  막내로 나름 귀염받고 살다 보니 혼기가 차간다는 생각은 꿈에조차 않고 말이 과년한 처녀지 얌전한 데라곤 없는 선머슴애 같은 처녀 시절을 보내다가 그 마을에서 일찍 시집간 고종 사촌 언니의 중매로 어느 날 급작스레 혼사가 진행되었단다. 그 무렵만 해도 한동네 처녀, 총각끼리 혼사가 이뤄지는 일이 흔했고, 멀어봐야 면내에 소재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시집온 여자에게는 흔히 떠나온 친정 마을 이름으로 택호를 정했었는데 그녀는 총각이 사는 마을에서도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행정구역인 ‘면’보다 고성 읍내에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그냥 고성띠라는 택호가 붙게 된 것이다.


가난한 종갓집 며느리로 새파랗게 젊은 시부모와 위로 시누이 하나만을 출가시킨 칠 남매 중 장남인 남편을 따르게 된 그녀의 삶은 참으로 힘겹고 고단한 날의 시작이었으리라. 새 각시 새 신랑이라 불리는 신혼의 달콤함과 정겨움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살아내기가 참으로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선머슴애에서 일순간 상머슴으로 인생이 전환되어버렸다. 파종할 땅 한 뙈기, 부릴 소 한 마리는 고사하고 매 끼니 적지 않은 식구의 양식을 대는 일도 버거워 입에 풀칠하는 것이 고작이었단다. 6·25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는 너나 할 것 없이 재건에 온 힘을 쏟아부었을 시기라 한 개인의 삶도 그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환경과 여건은 숨겨져 있던 그녀의 황소같이 우직한 근성을 드러내주기 시작했다. 험하기 그지없는 악산 중에서도 악산인 너더랑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고, 이도 저도 안 되는 돌밭 틈새에는 유실수를 심어 열매를 얻고, 박토일지언정 흙이 조금이라도 살로 붙어 있는 곳마다 무엇이든 심고 거두니 조금씩 살림이 눈에 띄게 윤택해졌다. 역설적이게도 고성띠가 억척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의 시아버지인 고성양반(아내의 택호에 따라 동네 사람들이 불러주는 남편의 호칭)의 숨은 내조가 한몫했지만 말이다.


천성이 색시처럼 얌전하고 말수가 적은 고성양반의 성품 때문에 바깥일이나 공동으로 해야 하는 동네일을 할 때면 자주 손해를 보거나 가정에 불리한 일이 생겼고 그럴 때마다 고성띠는 고성양반을 나무라기도 타박을 주기도 하며 특별 가정교육(?)을 시켜봤지만, 타고난 성정을 어쩌랴. 살림도 넉넉하지 않은데 나서서 하는 일마다 자기 호주머니 비어가는 줄도 모르고 남 좋은 일만 시키는, 모진데 없이 물러터진 남편이 그녀에겐 늘 불만이었다. 남편의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한 성미 때문에 일어날 가정의 손해를 미리 막기 위해서 그녀의 억척스러움은 꼭 필요한 무기였을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고성띠에게는 고성띠라는 택호와 더불어 새로운 이름이 붙게 되었다. ‘터골마을 반장님과 부녀회장님’이라는 거창하고도 중요한 겸임직이 그녀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마을이 형성되어 근대화가 시작될 무렵부터 동네마다 남자가 반장 직함을 가지고 마을을 대표하는 것이 보통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 마을에서는 그나마 젊고 부지런하고 또한 정직하다는 평판을 듣던 고성양반이 처음엔 그 역할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맡게 되었는데 뭐든 후다닥 앉은 자리에서 민첩하고 화끈하게 일을 쳐내는 고성띠의 눈에는 남편의 반장직 수행이 영 마음에 안 들었던가 보다. 남편은 관에서 하달되는 공지에는 철두철미했으나 지나치게 고지식해 융통성이라고는 없고 또한 업무 검토가 너무 신중하고 진지해 그 행동이 굼뜨기가 미련한 쇠불구지 같았으니, 비록 열 가구 남짓의 큰 부락에 부속된 작은 동네였지만 거름 내고 파종하여 씨 뿌리고 비료 주어 김을 매고 열매 거두는 일이 조금의 여유도 없이 잇따르는 농사일에는 느린 남편의 반장직 수행이 고성띠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결국엔 그 바통을 고성띠가 넘겨받아 오늘날까지 이르렀는데, 말하자면 대리 반장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반장의 직책을 넘겨받던 그 날부터 고성띠의 활약은 눈부시게 빛이 났다. 자질구레한 고충은 물론이고 웬만한 힘쓰는 일에조차 떡대가 웬만한 남정네 못지않은 그녀의 도움이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집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하물며 굳이 반장이라는 직함을 업지 않아도 되는 일, 이를테면 눈에 티끌이 들어가도, 발가락에 티눈이 생겨도, 몸빼 바지 제본하는 일서부터 논에 물을 대거나 고추 모종 옆 순을 따는 일까지도 모두 고성띠의 조언이 필요했다.


재래식 부엌에 연료로 가스레인지가 처음 보급되었을 때 가스레인지에 연결되어 부엌 뒤편에 놓인 가스통 때문에 한바탕 소란이 일던 때가 있었다. 가스레인지 보급과 함께 고지된 가스폭발 위험에 맹목적인 두려움을 가졌던 사람들의 눈에는, 보기만 해도 무서운 가스통은 마치 폭탄처럼 위험한 물건으로 여겨졌을 것이 당연하다. 접근만 해도 가스통이 터져 큰일이 날까 봐 근처에도 얼씬 못하고 쩔쩔매던 동네 아지매들 앞에 보란 듯이 당당히 나서서 능수능란한 솜씨로 다 쓴 가스통 밸브를 풀고 새 가스통으로 교환하던 고성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지렁이라고 자기들을 스스로 낮춰 부르던 아지매들. 고성띠의 그런 용감한 행동은 ‘과연 고성띠!’라는 아지매들의 극찬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뿐이랴. TV 화면이 안 나와도, 벽시계 불알이 멈춰도, 정미기(방아 찧는 기계)에서 나온 쌀에 뉘가 많이 섞여도 어김없이 고성띠는 불려 가 해결사의 일을 해냈다. 평생을 해온 익숙한 농사일인데도 농번기가 시작되는 봄부터 가을걷이가 끝나고 농한기에 접어든 겨울까지 고성띠에게 자문하기 위해 오는 동네 아지매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논밭에 뿌려야 할 비료 용량이나 작물에 필요한 농약 이름이나 농약 사용법을 묻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젊은 영농후계자들이 받아온 영농교육의 혜택이랄까, 뭐 그런 비슷한 공부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그녀였지만 가난한 집에 시집오자마자 온몸으로 체득한 경험이 알짜배기 밑천이 되었다. 그보다 앞서 어쩌면 자기에게 기대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늙고 병든 이웃의 신뢰가 그녀를 좀 더 의욕적으로 반장직을 추진하게 한 더 중요한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 해마다 명절이면 딱 두 차례 수고비 조로 면에서 지급하는 반장 수당은 반장에 정식 임명되어 명단에 오른 고성양반의 손에 쥐어졌지만 무늬뿐인 반장 직함 대신 마을의 최일선에서 현장 경험을 쌓으며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춰가는 고성띠에게 그 수당 삼만 원은 그리 욕심나는 돈도 아니었고 오히려 자신이 가진 열정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반장 대리역이 더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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