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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딸 Nov 01. 2020

고성띠 2

그러던 어느 날. 도시에 살던 아들 내외가 무슨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귀농을 해 살림을 합치게 된 역사적인 그 어느 날. 적어도 그날 이전까지는 그녀가 맡은 마을의 크고 작은 해결사 역할은 보람과 즐거움을 선사하였던 것이었는데, 그런 그녀가 그날 이후부터 사는 것이 영 재미가 없어졌다.


주 연령층이 승용차를 모는 대신 유모차를 운전해야 하는 칠팔십 노령으로, 젊은 사람이 귀한 마을에 이제 마흔 중반밖에 안 되는 피 끓는 아들 내외의 귀향은 부락을 넘어 면내에서도 적지 않은 호기심과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부녀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문자 해독이 가능한 고성띠에게 온갖 고지서와 알림장을 들고 오던 동네 늙은이들에게 아들 내외는 짧은 시간 안에 빠른 속도로 마을의 젊은 피, 즉 소장파 실세로 군림하게 되었다. 농협, 면사무소, 보건소 혹은 파출소나 119보다 훨씬 든든한 보호자 겸 마을의 수호천사로 자리매김할 뿐 아니라 오래도록 동네 누구도 탐낼 수 없었던 독보적인 반장 자리까지도 위협하게 되었다. 겨우 경운기나 얻어 타고 농협이나 보건소에 오가던 노인들에게 비록 낡고 오래된 마티즈일지언정 며느리가 운전하는 차의 시동 거는 엔진소리는 참으로 달콤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오랜 노동의 흔적으로 허리가 뒤로 앞으로 심하게 휘고 시력은 나날이 쇠하여 돋보기가 아니면 전기세 고지서 숫자도 아니 뵈고 손이 굽어서 부리는 기계(정미 기계의 나사를 조이거나 가스 밸브를 풀고 잠그는) 조작이 다소 힘들지만 그래도 한참까지는 유세하며 마을을 쥐락펴락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적어도 아들 내외가 촌에서 터 잡아 살겠다고 쳐들어오기 전의 그 터골마을 안에서만큼은...


그녀의 반장 일에 대한 보람과 열정의 도가니에 김이 새게 한 것은 동네 아지매들의 배반 또한 크게 작용했다. 힘없고 약한 사람은 권력에 쉽게 붙는다고들 하지만 그것을 좇아가는 속도가 너무도 빨라버린 것이다. 반장의 도움을 요청할 일이 생기면 당연히 ‘고성띠’를 찾아야 함에도 얼마 전부터는 아들, 며느리를 부르는 일이 잦아지고, 그러다 보니 고성띠가 할 일이 대폭 줄어들었으니 그 서운함과 상실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젊은 며느리는 수시로 할매들을 농협이나 보건소에 실어 나르며 환심을 사는 것도 모자라 온갖 의학 상식 같은 유익하고 고급한 정보를 컴퓨터를 통해 출력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주니 구관이 가진 알량한 구식 농사 지식이나 혓바닥으로 눈 속에 잠긴 티끌을 핥아내어 눈 밖으로 내보내주거나 뭉툭하고 거친 손으로 상처 난 곳의 고름을 빼내주는 등의 무식하고 더러운 의료행위 따위로는 마을 여자들의 마음을 붙잡아둘 수가 없었다. 영어에 한자까지 두루 섭렵한 아들 내외 앞에서 한글을 겨우 뗀 문자 해독력을 가지고는 젊은 세태를 넘어서서 권좌를 유지하겠다는 욕심이 어림없음을 차차 깨닫게 되었다. 힘센 남자 틈에서 경운기 조작을 예사로 하며 어깨에 힘을 주던 고성띠가 며느리의 운전 실력 앞에서 겨우 할 수 있었던 말은, “내가 쪼깨만 젊었어도 운전면허 그까짓 거 따고도 남지. 경운기도 모는데 그게 뭣이라꼬”. 애써 나이를 탓하며 푸념하듯 이 한마디뿐이었다. 예고도 없이 들어온 젊은 아들 내외와 함께 예고도 없이 서서히 떠나가는 반장이라는 감투.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아쉬움과 서운함이 불현듯 찾아올 때마다 그녀는 혼자 되뇌어본다.


“너그가 암만 그래싸도 내만 몬 하다. 농사도 내가 더 마이 지었고 밥을 묵어도 내가 더 마이 묵었다. 아이가 아이가, 아직 멀었제. 참말로 구관이 명관이니라. 명심 또 명심하그라.”


대한민국 근대화와 더불어 새마을운동의 역전 용사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장부 고성띠. 집을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가 되는 튼튼한 주춧돌이라고 한다. 온몸을 다해 온 청춘을 다 바쳐 마을과 집안과 가정이라는 집을 완성해온 고성띠, 나의 시어머니. 그녀가 주춧돌이 된 기반 위에서 이제야 인생이라는 집을 삐거덕삐거덕 미숙하게 지어가는 우리는 안다. 그녀가 온몸과 마음으로 말해온 것이 무엇인지를.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노동으로 얻은 진실한 경험 속 진한 땀과 함께 온다는 그 심오한 가치를. 세상에 이보다 값진 것이 있으랴, 하는 것을 천천히 알아간다. 그 깨달음은 우리 또한 온몸과 마음을 다해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최고의 유산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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