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이상이 되면 모두가 장편소설가가 된다고 한다. 그만큼 삶이 녹록지 않다는 것이다.
중년의 삶이 힘들다는 것보다는 내 자신이 웃음이 없어진다는 것, 도전이 없어진다는 것이
서글플때가 많다.
나의 나이대로 보면 청춘이었던 이십 대 초반이었다.
힘들었던 대학 입시의 고난을 겪고 난 대학교 1학년 때였다. 벚꽃이 만개한 봄에 다섯 명의 대학 동기들이 만든 “無” 모임( 인생사 부질없고,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만든 모임)에 가입했다.
친구들이 동그랗게 원을 그려 노을 진 대학 캠퍼스 잔디 위에 앉아있었다.
석양이 지고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불리는 시간쯤..
새우깡 두 봉지, 막걸리 열다섯 병이 우리들 앞에 놓여있다. 모임 중 남자 동기 한 명이 정태춘의 북한강을 맛깔스럽게 부른다. 막걸리가 거나하게 들어간 친구 한 명은 맘속에 묵혀두었던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나는 000을 개강식 때 보고 한눈에 반했다. 나는 000 이를 좋아한다. 그러니 아무도 000이 옆에 가지 말아라” 선전포고를 한다.
시답잖은 농담들을 서로 받아치면서 젊은 청춘들의 웃음소리와 “캭” 술 들어가는 소리들이 인문학 캠퍼스 잔디 위를 가득 채웠다. 누군가는 건물 창문을 열고 우리들을 향해서 “ 거기 좀 조용히 하시오. 공부하고 있잖소”라는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우리들의 시간, 우리들의 청춘, 우리들의 미래, 우리들의 사랑과 우정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요즈음같이 비싼 회, 스테이크, 치즈 같은 술안주 없이 달랑 새우깡 한 봉지에도 우리들은 행복했었다.
새우깡이 구운 새우, 랍스터같이 비싼 술안주가 된 것은 젊음 플러스 편안하고 좋은 친구들이 함께여서 일 것이다.
계약과 경쟁관계가 아닌 순만추(순수한 만남 추구) 청춘들에게 몇십 년 된 와인도 아니고, 그 어떤 다양한 브랜드의 맥주가 아니었지만 행복과 기대되는 미래가 담긴 막걸리는 맛있었다. 막걸리 술 자국이 그다음 날 옷들에 배어있어도 막걸리의 맛과 풍미는 현재 값비싼 술에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갑자기 술 취한 친구 한 명이 우리들을 선동한다. 대학교를 상징하는 표범 동상으로 가자고.
손에 손잡고 명문대는 아니지만 나름 지방대를 대표하는 대학교의 상징물인 표범상 앞으로 술 취한 친구가 나폴레옹 장군처럼 우리를 이끈다.
혀까지 꼬인 남자 동기가 갑자기 표범상으로 올라간다.
“ 내가 우리 대학을 점령한다” 손을 들고 외치며 표범상 꼭대기에 올라간다.
“ 이랴!, 이랴” 외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말 동상도 아닌데..
친구들이 그만하고 내려오라고 했건만 취객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저 멀리서 대학 정문을 지키는 기사님이 호루라기를 부르면서 우리들을 향해 달려오신다.
“ 야! 이놈들아. 거기가 내려와. ” " 못된 놈들 같으니라고"
표범 상 밑에 있던 네 명의 청춘들은 기사님의 목소리에 벌이라도 받을까 봐 표범사 귀때기를 잡고 앉아있는 친구를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대학본부 건물 뒤로 숨어서 보니, 표범상에 올라간 동기는 기사님에게 혼나면서 억지로 내려왔고, 기사님은 화가 나서 제대로 숨도 못 쉬면서 별난 놈을 다 봤다고 소리를 지르신다. 내일 대학본부에 이야기하겠다면서 동기의 학번과 이름을 기어이 적어가셨다.
친구들이 도망간 것에 분노했는지 남자 동기는 대학교의 정중앙에 위치한 분수대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 이 배신자들” 하면서 분수대 물속으로 들어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친구 두고 도망간 무리 중 한 명이 “ 2차 가자. 내가 쏠게. 맥주 마시러 가자”
표범 상에 올라갔었고, 분수에서 난동 피우던 무모한 놈이 좋아 면허 물속에서 뛰어나온다.
‘ 역시 저놈은 생각 없는 놈이다!!!’라고 나는 그때 생각했었던 것 같다.
달빛을 뒤로하고 의리없이 위험에 처한 친구들 남겨두고 도망간 청춘들은 옷이 젖은 무모한 놈에게 잠바를 입혀주며 “ 미안하다”라고 말한다.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맥주 마실 생각에 좋아하는 무모한 놈을 가운데 두고 우리 청춘들은 대학 정문을 지나 맥주 파는 번화가로 들어가서 청춘을 불태웠다.
나의 인생에서 걱정 없이, 서로를 아끼며, 청춘은 이래야 한다는 개똥철학을 말하면서 서로의 아픔을 쓰다듬으며 미래를 꿈꾸었던 1학년 대학생 다섯 명으로 모인 “無” 모임의 멤버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지금도 자주 생각난다.
노래 가사처럼 “無” 모임 청춘들은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살고 있을까?
나의 인생의 초반기에 나 자신을 찾고 돌아보게 만들어 준 시간과 기회를 선사해 준 그들에게 감사하고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