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가득 찬

by 코알라

우울은 다정한 얼굴로 다가와 머물다 간다.


우울증을 조금이라도 겪은 이들은 늘 친절한 몸짓으로, 사실은 사람의 정신을 와인잔처럼 뒤흔드는 그를 경계해야 한다. 유리잔은 한번 휘청일 때마다 중심을 망각한다. 망각은 마구잡이로 시간을 먹어치운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내일을 보게 되고, 버려진 기억 속에 새 것 같은 시간 한무더기가 들어차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렇게 도플러 검사를 바라보다 살만 찌우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시간은 가득 차고 있었다. 운명의 날이 다가오고, 슈퍼파워를 얻기 위해 제일 아끼는 코알라 양말을 신고 집을 나섰다.




"우리 아기 몸무게가 다시 그래프로 올라갔어요. 엄마 몸무게도 늘고. 그동안 잘 드시고 잘 쉬셨나 봐요."

"네, 열심히 먹었습니다."

"우리 아기가 영양분을 못 받나 했는데, 검사해보니까 공급에는 문제가 없었어요. 심장박동도 좋았고요."

"스트레스가 원인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요. 일단은 엄마가 그동안 잘 못 먹은 것도 원인이 될 수 있고요. 남은 기간에도 마음 편히 지내세요. 고생하셨어요."


지난 검사와는 다르게 울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고액이 청구된 의료 영수증을 살피다 남편에게 말했다.

"정말 다행이야."

"완전 다행이지! 그러니까 앞으로도 스트레스받지 말고. 근데 왜 그래?"

"보험 안 되겠지?"

"아마도?"

"바우처가 옛날 옛적에 떨어졌거든."


바우처 걱정을 하게 됐다는 건 미래를 염려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인생을 회피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지만 우울한 순간에는 그만큼 어려운 게 없다. 그런데 돈 걱정을 하는 걸 보면 조금은 현실을 보살피려는 모양이다. 마음이 대체로 나아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듯하다.


어떻게 하여 우울과 불안을 빨리 극복했는가 하면, 일단 그들은 극복할 수 있는 대상도 정복할 대상도 아니었다.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는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므로 밀어낼 수 있는 단계는 지났고, 툭 터놓고 솔직하게 대할 수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솔직한 대면은 갑작스럽다. 우울이 매번 기습하듯 나의 응사도 뜬금없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약속한 날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우울한 얼굴이 싫다."


거울을 보다 내뱉은 어느 날이었다.

밖에는 잘 차려입은 젊은 남녀가 깔깔깔 콧바람을 쐬며 돌아다니는데,

늙은 표정으로 얼룩진 거울을 들여다보는 꼴이란.

썩 유쾌하지 않으니, 진심이 튀어나왔다.


그날이었다.

헝클어진 이불에 대충 누워 개봉 영화 소식을 구경했다. 어떤 젊은이들이 한밤중에 범죄 영화를 찍던 날이 생각났다. 고요한 밤,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와 달리는 발소리가 동네 골목에 울리는 터에 밖을 내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경찰을 불러야 하는지 확인해야겠다고 하고 밖으로 나갔다. 따라 나오는 고양이를 다시 집에 넣고 정말로 나가서, 왠 젊은이들이 모여 입김을 하얗게 토하는 사이에 불만조로 끼어들었다. 그러자 그들은 영화를 찍는 중이라고 주저주저 말했다. 다급한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여자 배우가 추위를 이겨내는 힘찬 눈빛을 반짝였다. 나는 힘내시라고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른 것도 아니고 영화라니. 그들은 영화학도들이었다.


'영화 보고 싶다.'


이 생각은 나를 움직였다.

그래서 갑자기 우울과 내가 변덕을 주고 받으며 솔직한 감정을 나누게 되었다고 하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으리라. 다시 말하자면, 말 그대로 변덕이다.

변덕이라도 부리지 않으면 기분 전환할 핑계거리가 없다.


진심은, 영화든 무엇이든 현실 안에서밖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진리가 너무나 무섭고 버거워서 부정하고 회피하고 도망치고 싶지만, 그것은 곧 좋아하는 것마저 포기하는 것이기에 모른 척 하기 어려웠다. 싫은 일도 좋은 일도 현실에 있다.




조금만 용기를 내자


이 마음으로 아기의 발차기에 집중했다.

아기는 달이 차갈수록 매순간 배를 울렸다. 주민번호도 없으면서 존재감만은 확실했다.

임신 중후반을 넘어가니 아기는 눈에 띄게 커졌다. 배가 이만큼 나오니 결국 발끝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리 저림, 허리 통증, 호흡 곤란과 상당히 친해졌을 무렵, 밤잠을 한두 시간 단위로 깨는 일도 당연해졌다.


혈액순환을 촉진해보려고 압박스타킹 체제에 돌입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한 가지 사안이 있었다. 뒤뚱거림이었다. 배가 부르고 근육이 급격히 퇴화함에 따라 보행의 안정성은 떨어졌다. 다리 근육이 받쳐주지 않으면 불안정한 보행 시 부상의 위험이 따른다. 일상적인 현기증과 뒤뚱거림이 만나면 피로감도 쉽게 찾아온다. 그럼에도 임산부는 걸어야 한다. 어제 입은 옷을 다시 입고 새벽에 집을 나섰다. 강변을 뒤뚱뒤뚱 배회하는 나를 어느 순간 남편이 따라왔다.


"펭귄이다!"


남편은 끝끝내 임부바지 하나로 버티는 나를 보고 감탄과 탄식하기를 반복했다. 옷 좀 사자는 뜻이었다. 몇 달만 버티면 살 뺄일 밖에 없다는 생각에 내 지갑은 옷가게 앞에서 쉬이 열리지 않았다. 더불어 남편의 지갑도 단속했다. 그러니 나는 옷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렇게 응답했다.

"당신, 안 입는 옷 없어?"


그런 내 마음을 이해했던 것인지 남편은 옷 이야기를 하는 대신 위로의 마음을 담아 족탕기를 선물해줬다. 그러면 나는 족욕을 마치고 나와 발톱 좀 잘라달라고 어렵사리 부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