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면
내가 얼마나 우울한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도플러 검사를 기다리며 깨달았다.
사람들은 단지 그의 비밀이 궁금할 뿐, 그가 울적한 이유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사람은 저마다 아픔이 있지요. 우울하신 진짜 이유가 뭐죠?"
"저는 그냥 우울해요."
"정신병이네요."
그러므로 이런 대화를 예상해본다.
한편 이런 반응도 예상해본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데 우울해서 뭐하냐뇨? 이건 제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이에요. 쿨한 척하면서 실상은 남을 의식하는 건 바로 저자 당신이에요."
맞다. 나는 남을 의식한다. 눈칫밥 XX년의 세월. 나보다 다른 사람의 기분과 반응이 더 중요했다. 주변 사람들이 짜증 내거나 화를 내는 게 견딜 수 없어서였다. 나중에 나한테 뭐라고 할까 봐.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내 기분은 둘째 치고 어쨌든 불평한다. 이 결론에 도달하자 나는 뭐하며 살았나 싶은 거다.
그러므로 내게 사람을 보는 괜찮은 안목도 인생을 대차게 개척해나갈 정력도 부족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사는 게 고되다고, 내일이 불안하다고 떨고 있다.
나 같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오늘의 아픔은 과거와 무관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때때로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아픔을 불안해한다. 그 누구보다 우리 자신을 연민하고 혐오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안쓰러운 무능아요, 미래의 나는 가능성이 충만한 냉혹자요, 오늘의 나는 그냥 나다.
'왜 그랬을까?'
언제부터인가 과거 속에서 문제의 답을 찾는다. 그 속에는 무력한 자신만이 있을 뿐인데도 자꾸만 확인하고 새삼 놀라고 슬퍼한다. 인생에 답이란 게 있을 리 없음에도 멋있는 자신이 있기를, 누구에게나 당당한 자신이 있기를 그려보고 좌절한다. 이상은 깜짝 풍선과 같다. 꿈을 꾸고 있노라면 펑 터지고, 나는 밀가루를 뒤집어쓴다.
자의식 과잉, 자기혐오, 자기 연민은 서로를 보완하는 촉진제다. 정반합과 비슷하다.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자기 위치를 확인하려고 한다. 이때 남과 나를 비교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나는 왜 저렇지 않지? 저 사람은 나보다 어쩌고 하구나 등등. 그리고 자기 자신의 결점이나 약점, 과거에 집중한다. 그러다 자기가 이렇게 된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사연?
경청하고픈 사연은 정우성 눈빛에나 있는 게 아니었던가.
나는 가끔 내가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초라하게 느껴지고 그 이유를 빅뱅이론을 탐구하는 자세마냥 더듬어 간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지독히 연민했던 연산군이 불쑥 떠오른다.
그러나 삶은 먼발치에 서서 보는 강물이다.
가까이서 보면 쉴 새 없이 파문이 일지만,
멀리서는 그저 유유히 흐르는 그것이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자연인 것이다.
산다는 건 또 이런 것 같다.
상처 받지 않을 용기보다
적절히 개새끼라고 일갈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에겐 둘 다 없다.
"나는 그저 나이기로 했다."
에휴.
"조금 느려도 괜찮아."
개뿔.
"이런 나라서 너무 좋아."
우리 솔직해집시다
나부터 솔직해지자면, 나는 계속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모든 고뇌의 근원은 거기에 있었다.
그렇다. 아무리 포장해도 우울증은 정신질환이다.
병은 이겨야 제맛.
열심히 일기장에 응석을 부리고 잊어버리면 괜찮겠네. 답 없는 일에 우울해할 바에 밖에 나가 개똥이라도 밟고, 욕도 좀 하는 길을 택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