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 1992)>을 말할 때 동생 폴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폴은 형이자 화자인 노먼과 달리 자유분방하고 저돌적인 인물이다. 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불안한 미래를 예감하게 만들었다. 고향을 떠나 학업에 매진하다 돌아온 형 노먼이 오랜만에 마주한 폴은 다소 위태로워 보였지만, 노먼은 예술의 경지에 오른 폴의 낚시질을 보며,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폴이 진정한 자유를 맞이했다고 느낀다.
자유란 무언가에 몰입하여,
그것과 혼연일체가 되었을 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자유는 일종의 아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시선이 대상을 온전히 관통하여 그 맥을 자유자재로 다스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태어나서 그 순간을 맞이할 사람은 감히 많지 않으리라.
그럼 태어나기 전이라면 어떨까.
나는 아기가 나의 뱃속에서 자유로워지고 있음을 알았다.
아마도 아기는 생명체로서 모습을 갖추어가는 자기 자신을 알았고, 그것이 못내 기쁘고 즐거워서 온몸으로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의 성장과 나와의 교감에 대단히 몰두했다. 나는 내 기분에 맞춰 뱃속에서 방방 거리는 아기의 움직임을 느꼈다. 발차기가 일상화되고 복부 표면까지 파동이 전해지는 일이 많아졌다.
하루는 업무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배가 고파 꼬르륵 소리가 나는 동시에 뱃속 한쪽에서 그 소리를 따라 하는 것 같은 뀨루룩 뀨루룩 소리가 느껴졌다. 자료를 볼 때면 아기는 더욱 바삐 움직였다. 하도 꾸물럭거려서 배가 출렁댔다. 그쯤 되면 일은 멈추고 급탕실에서 사탕을 와그작와그작 씹어먹는 걸 택한다. 바야흐로 임신 중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도착지를 두 정거장 앞에 두고 열차가 멈춰 섰다.
다니던 수영장이 있는 곳이었다. 나는 외투 주머니에서 막대사탕을 꺼내 입에 물고 다다음 역에 도착할 때까지 먼 산을 바라봤다.
사람 없는 수영장,
적당히 차갑고 투명한 물살을 타고 헤엄치던 날을 떠올렸다.
죽을 것만 같이 고통스러웠던 입덧도 절정을 지나 안정기에 돌입했고, 내 배도 그만큼 나왔다. 아기가 커져서 발걸음도 무거웠다. 시간이 차례차례 다음 단계로 나를 인도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시간의 흐름은 이길 수 없다
고통의 순간은 올무처럼 옭아매고 정신을 쪼아 먹었는데, 끝내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으면 평화가 고개를 드는 듯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항상 지나간 뒤에 돌아보게 된다.
말 그대로, 흐르는 강물처럼 삶을 받아들이는 게 쉽다면 인간사 희로애락은 사라질지 모른다. 지나간 뒤에야 내가 그저 흐르는 강물 위에 있었음을 안다. 나는 내가 현실이라는 물살에 빠진 채 엄마가 된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코미디물이 이렇게 위안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Bridget Jones's Baby, 2016)>의 주인공 브리짓. 그녀는 적지 않은 나이에 미혼모가 될 결심을 한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것도, 두 명의 남자 친구 중 누가 아이의 친부인지, 누가 자신과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해줄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도 걱정될 때 일자리마저 잃는다. 잘 나가던 커리어우먼의 싱글라이프는 완전히 끝나버렸다. 그래도 브리짓은 말한다.
적어도 혼자는 아니다
정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