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시간의 흔적

by 코알라

입덧이 기승을 부리기 직전에,

몸살이 먼저 찾아왔다.


장마도 찾아왔다. 둘 다 반갑지 않았지만 도리 없이 맞이했다.

습도만 보면 (가본 적 없지만 아마도) 열대우림과 별반 차이가 없었고, 몸살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숨 막힐 듯한 대기에 서서히 구토가 치밀었다. 각오는 했는데, 입만 열면 욕이 튀어나오고, 경련이 와서 밥 숟가락 들기를 단념했다.


겨우 안정된 허리까지 슬슬 시동이 걸렸다. 집안 사정으로 머릿속은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숨만 쉬어도 버겁다. 나는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알레한드로에게 정신의 주권을 양도했다.


한 통의 연락을 받은 날이었다.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전해 들었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버스 차창에 빗방울이 우르르 붙다가 찌르르 흘렀다. 초저녁을 검게 칠한 비가 내려 불 밝힌 병원은 고독해 보였다. 초췌해진 친구를 마주 하고 고인의 임종에 대해 물었다. 병환을 앓으셨던 모양이다. 제법 많은 조문객들이 육개장이나 떡을 먹고 있었다.


나는 조문을 온 친구 P와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조문객들이 술잔을 기울이는 소리가 잦아들듯 다시 일어나고, 오고 가는 발소리에 우리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먹거리를 두고, 우리는 좀처럼 먹질 않았다.

P는 중증 허리디스크 환자였는데, 그 무렵 허리 질환이 악화 일로를 걸었다. 나는 좌식이 불가능한 P를 위해 방석 여러 장을 쌓고서 앉아 보도록 권했지만, 환자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며 인고의 젓가락질로 부침개를 집어 일어나면서 먹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육개장 그릇을 향해 숟가락을 들었지만 덜덜덜 떨려서 연거푸 포기했다. 그러니까 장례식장 한 구석에서 한 사람은 스쿼트를 하듯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고, 또 한 사람은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가는 게 좋겠다.

곧 우리 둘은 밤거리로 나섰다. 비는 그쳤어도 거리가 참 깜깜했다. 아파트 단지 끝자락에는 병원도 발전소도 있었다. 어둡고 커다란 건물이 흰 하늘 아래에서 가장 잘 보였다. 묵직한 공기처럼 어딜 가든 그것들이 꼬리를 문다.


바로 그곳이 자라온 동네였다.

마을은 온통 직사각형 아파트로 가득 찼다. 현대화의 물결을 거스르지 못한 논두렁 밭두렁의 변모였다. 구정내 나던 하천도 지금은 레저 공간이 되었다. 건넛동네는 연탄공장으로 유명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튼튼한 1호선과 수도를 꿰뚫는 2호선 열차가 서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반면 우리 동네는 섬이었다. 나와 P는 우리 동네의 교통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늘 그 낙원으로 향했다.


P와 함께 걷다 보니 그 시절 타던 마을버스가 생각났다. P는 마을버스를 타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고, 나는 간선버스를 타고 섬을 빠져나왔다. 공간은 시간을 뛰어넘는 기억력을 가졌기에 나는 지나온 시간 위로 엇갈려온 생사의 장면을 되짚었다.


"사람은 다 때가 있어요. 지금 환자분은 아기를 잘 낳고 잘 키우는 걸 누려야 해요."


정신과 선생님은 시간의 법칙을 되새겨주었다.

시간은 거기 있다가도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