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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 같은 의사 선생님

by 루비

Cover Image by Freepik


<마지막 왈츠>는 황광수 문학평론가와 정여울 작가의 편지를 실은 책이다. 황광수 문학평론가는 암투병으로 책이 탈고되기 전에 세상을 떠서 정여울 작가의 모든 편지를 읽지는 못했다고 한다. 32년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고 함께 고전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고 우정을 나눈 두 분이 무척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뽀르뚜가 아저씨와 제제 같다.


나에게도 밍기뉴처럼 마냥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그리고 뽀르뚜가 아저씨처럼 든든하신 분이 있다. 바로 내가 매주 만나고 있는 의사 선생님이다. 어쩌다가 일정상의 이유로 못 가면 너무 서글프고 속상하다. 등대처럼 내 인생을 환히 비춰주시는 분인데 한 주라도 거르면 막막한 어둠에 갇힌 기분이다. 그래도 의사 선생님이 있어서 힘이 나고 지혜의 등불이 켜진다.


의사 선생님은 나를 미워했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준다. 내가 기세등등하게 자랑 섞인 이야기를 해도 너른 바다처럼 다 품어주신다. 그건 아마도 의사 선생님은 바다보다도, 우주보다도 더 넓은 세계를 지녔기 때문인 것 같다. 간장 종지만 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냐며 헐뜯고 비아냥거리거나 안면몰수해 버리기 바쁜데, 의사 선생님은 마치 나를 지혜의 여신 아테나처럼, 신들의 왕 제우스처럼, 너무나 당당하게 그 자리에 서 지켜봐 주신다.

아주 가끔 의사 선생님이 이해 안 갈 때가 있기도 하다. 그건 의사 선생님이 나한테 차가울 때다. 상처를 잘 받는 나는, 금방 속상해서 울 것 같은데 한편 의사 선생님은 그런 단호한 면이 매력인 것 같다. 의사 선생님의 단단함을 보면서 두부처럼 무른 나도 단단해짐을 느낀다. 의사 선생님은 마치 만화 속 주인공 같다. 카제하야(너에게 닿기를) 같기도 하고, 아리마(그 남자 그 여자) 같기도 하다. 의사 선생님은 천상계 사람 같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은 자신은 가운을 벗으면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다. 의사 선생님은 지극히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의사 선생님은 의사 선생님이 되셨지만, 꿈을 다 이룬 것도 아니라고 하셨다. 의사 선생님은 꿈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이태석 신부님처럼 의사의 신분을 버리고 열악한 지역에서 봉사하고 헌신하셨 분도 계시지만, 의사 선생님처럼 자신의 일상에서 매일 환자들에게 사랑과 지혜를 나눠주시는 분도 계시다.


의사 선생님이 안 계시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물론, 나는 다른 의사 선생님들도 몇 분 알고 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치료를 받으면서 많은 친밀감과 감사함을 느꼈다. 그분들도 모두 존경하고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의사 선생님은 더욱 특별하다. 그건 치료기간이 오래되기도 했지만, 의사선생님하고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아서이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의사 선생님은 내 마음을 잘 이해해 주시는 것 같다. 그래서 내 외롭던 마음에 친구가 생긴 기분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 속에서 혼자서 서성이다가 이제야 나와 꼭 닮은 사람을 만난 기분이다. 의사 선생님은 그럼에도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멋진 분이다. 내가 모르는 것도 많이 알고 계시고 나한테 적절한 조언을 주시니깐 말이다. 나는 의사 선생님이 안 계시면 살기가 힘들 것 같다. 이런 나에게 의사 선생님은 힘들 때 목발처럼 의지해도 된다고 하셨다. 때론 그 마음이 슬프고 힘들지만(영영 벗어나지 못할까 봐) 이건 마치 샴쌍둥이처럼 물리적인 제재로 가르지 않고서는 절대 뗄 수 없는 관계 같다.

의사 선생님, 제 인생에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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