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의 <순결한 영혼>은 먼저 네이버 오디오클립으로 들었었다. 1시간 분량의 오디오클립이 너무 좋아서 책을 구매했다. 윤동주 시인의 얼굴이 표지에 인쇄된 아담한 푸른빛의 인물평전이었다. 제일 뒷면에는 윤동주 시인의 연보가 적혀있다.
윤동주 시인에 관한 영화 <동주>를 오래전에 봤었다. 많은 것들이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고 죽어간 것은 뇌리에 남아있다. 일제의 탄압에 시로써 저항하고 부끄러움을 고백했던 시인의 순결하고 아름다운 영혼이 그렇게 허망하게 간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그렇다면 나는 이 시대에 얼마나 그처럼 살 수 있을까 자문해 보았다. 지금 시대는 식민지 시대도 아니고 독재정권도 아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많은 계급 갈등, 혐오가 일상이 됐다. 그런 세태에서 벗어나고 싶다.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이 시는 나에게 너무나 절절히 와닿았다. 윤동주 시인이 살던 시대는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있었지만, 나도 윤동주 시인처럼, 또는 젊은 여자처럼 지금 시대의 어둠에 상처받고 병들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책에서 시대마다 일정한 운율이 있다고 했는데, 이 시대의 아픔을 나는 온몸으로 통과하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윤동주 시인의 슬픔과 아픔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왜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면, 순결한 마음으로 아름답게 살고자 하면 더 많은 탄압과 멸시를 받는 걸까? 너무나 마음을 아프게 울리지만, 시를 쓰면서 극복했던 윤동주 시인처럼 나도 어느새 시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하기만 하다. 그리고 나도 윤동주 시인이 어렵사리 시집을 출간하게 된 것처럼(유고시집) 나는 꼭 살아있을 때 언젠가 내가 쓴 시들을 모아서 시집으로 출간하고 싶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윤동주 시인이다. 윤동주 시인의 별처럼 빛나는 신앙심, 그의 부끄러운 고백, 지나칠 정도로 자신에게 엄격했던 맑은 정신을 배우고 싶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라는 시의 시구처럼 ‘나에게 주어진 길’은 무엇인지 받아들이며 정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간>이라는 시의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라는 시구처럼 어떤 유혹이나 악마의 속삭임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더욱 지혜롭고 현명해지고 싶다. <자화상>이라는 시처럼 내가 계속 밉고 미워지더라도 나의 유년시절을 그리워하며 희망을 그려나가고 싶다. 그리고 결국에 <새로운 길>이라는 시처럼 아름다운 숲이 있는 마을로,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세상으로 가볍고 산뜻하게 걸어 나가고 싶다.
새로운 길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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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의 시를 음미하며 나의 시대 속 병원을 떠올렸다.https://youtu.be/ymXpj7ifij0?si=CGxG9qWwN7-SMyf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