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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비 Nov 15. 2021

진실한 상대를 만나고자 한다면

소설 <죽이고 싶은 아이>를 읽고

<스포 있습니다-!>

    

 책장을 덮고 나니 더 간절히 드는 생각이 있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에게 정말 잘해야겠다는 걸. 속마음과 다르게 행동하지 않고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마음껏 애정을 표현해야겠다는 걸. 자신이 죽였을지도 모른다며 오락가락 헛것까지 보는 주연이는 어쩌면 정말로 마음이 아픈 아이라는 걸. 그런 주연이한테 끌려 다니면서 철저히 주연이를 이용했다고 말하는 서은이는 정말 진심이었을까라는 의문도 생기고. 참, 정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이 소설 <죽이고 싶은 아이>가 내 머릿속을 마구 헝클어놓았다.     


 다른 사람의 진실한 마음을 안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투명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속마음이 일치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어쩌면 의심이 많은 것 자체가 시커먼 내 속마음을 내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살이가 워낙 녹록지 않기 때문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 소설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사가 반전의 연속이니 말이다.     


 겉으로는 퉁명스럽고 차갑게 대해도 진짜 어려움이 생겼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고, 아무리 선량하고 웃음기 섞인 친절을 베풀어도 막상 고난이 닥쳤을 때 외면할지도 모르는 게 사람들이 가진 양면성이다. 우리는 그런 일을 살면서 무수히 겪으며 점차 사람에게 마음을 거두는 법을 배운다. 벽을 치고 심적으로 거리를 두며 고슴도치처럼 자기만의 가시를 뾰족하게 세운다. 마치 그래야만 더는 상처도 배신도 당하지 않는다는 듯이.     


 조지 오웰의 <1984>를 읽고서는 진실한 사랑도 부당한 독재 앞에서는 어이없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걸 느끼고 심하게 고민하며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그건 극한 디스토피아 속 소설일 뿐이니깐 현실에서는 일어날 일 은 없다고 믿고 싶었다. 디스토피아, 독재란 단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위중한 병, 가난, 실직, 재난, 사고 같은 일만으로도 서로가 서로에게 등을 돌리는 일을 얼마나 많이 목격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그만큼 약하고 연약한 존재인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희망을 말하고 싶다. 어딘가에는 분명 우리가 믿고 기다려왔던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어주고, 믿음과 진실로보답해주는 사람들. 말로만 사랑을 지껄이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과 행동으로서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는 사람들. 내가 손을 놓기 전에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싶다. 살면서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  자체가 기적이고 커다란 행운이지 않을까?  사람의 일방통행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 합치되는 그런 사랑과 우정 말이다.     


 소설 <죽이고 싶은 아이> 속 주연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 너무 서툴렀다. 그것이 상대에게 어떤 지옥을 가져올지, 어떤 생채기를 낼지 몰랐으며 서은은 너무 오래 참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 그 둘은 어떻게 해야 했던 걸까? 세상에서 유일하게 서로의 친구였던 그 둘. 그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좋아하는 연인이든 친구든, 곁에 있을 때 정말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 아낌없이 베풀어야 한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집착하거나 소유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 서로 간의 물리적, 심리적 공간을 놓아주며 그렇게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 우리는 백아와 종자기 부럽지 않은 최고의 인연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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