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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약을 먹는 게
정상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더더욱 나를 아끼려고요.

by 재민

정신과 약을 먹은 지 3개월 정도가 지났다. 3개월 정도 먹고 푹 쉬면 나는 내가 정상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아직도 약을 먹고 있는 나는 정상이 아니다(애초에 현대 사회에 의학으로 정의되는 정상인은 몇 명이나 될까 싶긴 하다).



처음 공황장애를 겪은 후 나는 여러 가지 내 속에 잠재되어 있던 정신질환들이 다 같이 터졌다. 나는 예민한 편이고 생각을 강박적으로 많이 하는 편이라서 그 고통을 잘 참지 못해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약의 이름이나 성분은 모르지만, 항우울제, 항불안제 등을 처방받았다. 아무래도 항상 긴장된 상태로 살아가는 나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덜 우울하고, 덜 불안하게 만들어서 요동치는 내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신기한 건 약은 약이라서 복용하면 정상인처럼 하루 만에 우울감도 사라지고 불안해서 항상 떨던 다리도 덜 떨게 된다. 다리를 덜 떨어서 좋은 점은 복이 덜 나가는 것도 있다.


이런 약을 벌써 세 달째 먹고 있다. 그러다 사건 하나가 벌어진다.



한 번은 진료를 받으면서 일상에 대한 상담을 받는데 머리가 복잡했다. 그날은 의사 선생님도 피곤하셨는지 상담이 순조롭게 진행이 되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의 질문들은 이미 복작거리는 내 머리를 빠르게 회전하는 거품기로 휘저어놓는 듯했고, 나는 인생에 명확한 답이 없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서 화가 났다. 내가 공황장애를 겪지 않았으면 순조로웠을 삶인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지 억울하고 분했다.


적당한 시간을 상담한 후에 병원에서 나왔다. 내 마음에서는 해결하지 못한걸 가득 안고 나온 느낌이었다. 그냥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약 복용을 중단했다. 3개월 전 정상적인 내 모습으로 돌아가길 바라면서.



정신과 약을 의사와 상의 없이 임의로 끊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그런 일을 내가 해버렸다. 내가 끊은 약은 모두 신경계열의 정신과 약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처음 3일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약을 먹을 때와 같이 우울과 불안증세도 없고 잠도 잘 잤다. 그러다 보니 약을 없이도 나는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생각했다. 정신과 약을 먹지 않아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정상인”의 범주에 든 것 같았다.


그러나 나흘째 되던 밤, 나는 새벽 2시까지 잠에 들지 못했다. 딱히 생각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불안하지 않았지만 잠이 날 찾아오지 않았다. 뒤척이고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들었다. 그다음 날은 새벽 3시, 다다음날은 새벽 4시에 잠들었다. 더 늦게 잠들었지만 깨어나는 시간은 더 빨랐다. 새벽 4시에 잠든 날은 새벽 6시에 깨서 다시 잠들지 못했다. 불면증이었다.


나는 급한 대로 챗지피티에게 상담을 받았다(100% 믿을 만한 친구는 아닌데 그래도 검색은 잘하니까 물어봤다). 그랬더니 불면증은 내가 먹는 약 중 하나에서 복용을 갑작스럽게 중단했을 때 가장 흔하게 오는 증상 중 하나였다.


곧바로 집에 남아있던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고 제일 빠른 시간으로 병원 예약을 잡았다. 오전 11시에 도착한 병원에서 선생님께 진료를 받았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내가 이런 일을 겪고 있는 게 싫었고, 충동적으로 약을 끊었다고. 정상이 아닌 내가 싫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면서도 선생님께 혼날까 봐 다리가 떨렸다. 하지만 선생님은 시크하게도 내 말에 어떤 화나 짜증도 내지 않으셨다. 그저 웃으시면서 약을 다시 잘 먹고 조금씩 줄여나가자고 했다.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과 약을 먹고 있는 나는 정상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치료를 받는 중이고 회복하는 중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평소였으면 나 자신을 엄청나게 자책하고 욕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위로해 주기로 했다. 거기에 응원까지 더해서. 정신과 약을 임의로 끊어버리는 바보 같은 실수를 자초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단지 나는 불안정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이 이런 일을 겪었으면 해 줬을 법한 위로와 격려를 나에게 해줬다.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한 사람은 자해를 하듯 자신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남긴다. 내가 나를 재건축하면서 제일 중요하다고 느끼는 건 스스로를 사랑하고, 내가 어떤 삶을 살아도 기필코 나를 사랑하겠다는 다짐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비난하고 자책하고 혼내고 쪼아대는 생각을 줄여나가고, 나를 보듬어주고 안아주고 사랑하는 걸로 재건축의 구조를 디자인해본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나 자신이 나에게 주는 사랑이다. 정신과 약을 먹으며 정상인척 살아가지만 정상이 아닌 나를 사랑해 주는 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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