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정말 필요했던 일은.
이런저런 일들이 마음처럼 되지 않고 계획했던 일들이 어그러지면 의지와 상관없이 무기력해지고 부정적으로 변하고 만다. 요즘 내 상황이 그렇다. 그러다 문득 내가 왜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들에 — 어차피 삶이란 그런 것인데! — 마음을 많이 쓸까 조용히 생각했다. 어쩌면 아직까지 어릴 적에 좋아했던 명언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프랑스 작가 폴 발레리가 했다는 말인데 어린 시절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선천적으로 타고나기를 계획형 인간이 나에게, “나의 생각과 계획대로 살지 않으면 못살고 있는 것이야!”라고 폴 발레리가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 명언을 맹신해 버린 어릴 적 나는 — 그 심오한 뜻은 모르고 자기 멋대로 해석했지만 — 학업이든 일상이든, 커리어든 계획을 짜고 그 계획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을 때 안정감이 들고 행복해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폴 발레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그런 삼십 대 어른이 되었고, 그런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휘몰아치는 많은 사건들을 겪으니 어쩌면 무기력해지고 부정적으로 변한 건 당연한 수순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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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전문점을 퇴사하고 일주일 동안 본가에서 지냈다. 가족들의 정성 어린 응원과 마음을 받았고, 엄마의 집밥을 먹었다 — 비록 살이 찌긴 했지만 엄마 집밥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 속에는 무엇인가 불편한 감정이 해소되지 않았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패배감과 자기 불신. 그리고 무기력함과 부정적인 감정들에서 완벽히 회복되지 않은 채 찝찝한 마음으로 본가를 떠났다.
다시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나 혼자 사는 서울의 집은 일주일 전 본가로 떠나기 전 너저분하게 어질러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애초에 본가를 떠나면서 생각했던 계획은 글을 쓰고 또 글을 브런치스토리에 올리는 일이었지만, 차마 더러운 내 집의 꼴을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청소부터 해야겠는데?”
일단 환기를 시키고 — 차마 동남아보다 더 더워져버린 서울에서 10분 이상은 힘들었다 — 빨래들을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청소기를 돌리고, 어질러진 물건들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솔로 화장실에 핀 물때를 돌려 닦고. 이 작은 원룸에서 청소를 한 시간 동안 하니 어질러져있던 방의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청소가 끝나니 이마에 땀이 맺혔다.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하기 위해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일주일 만에 서울에서 맞이한 나의 모습은 꽤나 초췌했다. 본가에 가있는 동안 수염은 보기 안 좋게 삐죽삐죽 자라 있었고, 한 달 넘게 정리하지 않은 머리는 지저분해 보였다. 청소하면서 흘린 땀 때문에 냄새도 쾌쾌하게 날 것 같았다. 나는 아주 시원한 물로 나를 흠뻑 적셨다. 시원한 물줄기를 맞으면서 몸에 열을 식혔다. 그리고 폼클렌징과 샴푸, 바디워시로 온몸을 아주 깨끗이 닦았다. 마지막으로 일주일 동안 기른 수염을 말끔하게 밀었다. 샤워 후에는 토너와 앰플과 로션으로 스킨케어까지 해주었다 — 가끔은 귀찮아서 안 하지만 오늘은 꼭 하고 싶었다.
그리고 곧장 미용실을 예약했다. 최대한 가장 빠른 시간으로. 도착한 미용실은 평일 오후라 한가했다. 디자이너 선생님은 바로 나의 부스스하고 지저분한 머리를 다듬어 주시기 시작했다. 귀 위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옆머리를 정리하고, 안구를 찌르던 앞머리는 적당히 이쁠정도의 기장으로 잘라주고, 뒷머리도 깔끔히 정리하고 숱까지 치니 내 모습은 제법 말끔해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오랜만에 집에서 요리를 해 먹어야지. 메뉴는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밀푀유나베다. 알배추와 깻잎과 고기를 카트에 담고 이왕이면 내일 점심도 건강하게 먹으면 좋겠다 싶어 샐러드 거리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냉장고는 신선한 야채와 고기로 가득 찼다. 이런 빵빵한 냉장고를 보니 뿌듯하고 든든했다. 당분간은 먹을거리로 걱정은 없겠다.
저녁을 맛있게 차려 먹은 뒤 나는 책상에 앉았다. 연재하던 시리즈의 글도 쓰고, 앞으로 어떻게 일상을 꾸려나갈지 스케쥴러에 계획도 했다. 중간에 집중력이 떨어질 때는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깔깔 웃기도 했다. 그리고 잠이 들기 전까지 친구가 선물해 준 에세이를 읽으며 잠에 들 준비를 했다.
평소의 나였으면 아주 평범한 일들로 가득 찬 하루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청소를 하고, 깨끗이 씻고, 미용실에 가고, 시장을 봐 저녁을 해 먹고, 글을 쓰고, 내일을 계획하고, 책을 읽는 하루의 일들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떨 때는 이런 일들은 지겨워 훌쩍 떠나버리고 싶기도 하는 일들이지만, 이런 것들이 현재의 나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었다. 나를 재건축하기 위해, 내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는, 지금 내 모습을 사랑스럽게 해주는, 나를 돌보는 일.
무너진 나를 재건축하기 위해서는 먼저 건물이 무너진 나의 땅은 폐기물을 버리고, 땅을 깨끗하게 다듬고, 다시 괜찮은 상태로 돌려놓는 일이 필요했다. 무작정 땅을 파 기초를 박으려는 나의 욕심은 오히려 나를 더 무너지게 할 뿐이었다는 것을 이제 와서 깨달았다. 나에게는 어떤 계획보다 일상을 회복하는 일이 제일 필요했다. 계획대로 살지 않았지만 하루를 잘 살았다는 생각을 하며 잠에 들었다.
Ps. 앞서 말한 폴 발레리의 명언에서 나는 반쪽만 믿고 살아왔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만 혼자 해석하고 믿었다. 그래서 내가 계획한 일을 악착같이 해내려고 했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도 삶에서 필요한 것 아닐까? 어차피 인생은 계획대로 굴러가지 않으니 사는 대로 생각도 하면서 살아가는 게 진짜 폴 발레리가 말하려던 인생의 지혜이지 않을까 바보같이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