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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로 Sep 27. 2023

10. 육아를 시작한 나

"얼른 화장실로 들어와, 고개 숙이고 뒤돌아봐."


내 동생들과 4살 5살 차이가 난다. 둘째는 여동생이었고, 막내는 남동생이었다. 내가 10살에 그들은 5살 6살이었다. 나는 스스로 할 수 있는 나이었지만 동생들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동생들을 케어하는데 열중했던 터라 육아라는 개념조차 모를 때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힘들어서 도망갈까 봐. 


상황이 상황인지라 동생들을 잘 돌보지 않으면 안 됐다. 엄마 혼자서 돈 벌고, 혼자서 나를 포함한 동생까지 키우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포기하고 사라질 수 있는 환경이니까. 버림받은 경험이 있는 나는 동생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분유 타기, 파우더 바르기, 기저귀 가져오기, 젖병물리기 등을 해왔다.


동생이 초등학교에 입학해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챙겨줘야 할 것이 많다. 알림장, 일기장, 준비물, 공책 등등. 나는 초등학교6학년이었기에 책임감을 가지고 동생들의 학교 생활을 체크했다. 알림장에 엄마 사인이 필요하면 대신 흉내 내서 한 적도 많다. 



동생들은 한참 자라나는 시기였기 때문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밖에서 뛰어다녔다. 엄마가 없으니 누군가 통제해 줄 사람이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늦게까지 놀고 있었으니까. 늘 우리 3명은 밖에서 누구의 간섭도 없이 놀았다. 친구들이 엄마에게 혼난다고 들어갈 때쯤에야 우리도 집에 들어왔다. 동생들은 대체 어디서 놀았는지 흙투성이가 되어서 왔다. 이대로 동생들을 재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


둘 다 옷을 벗기고 화장실로 차례대로 들어오라고 한다. 둘째를 세면대에 세우고 머리를 대라고 한다. 샤워기로 머리를 적힌 다음, 샴푸질을 해준다. 눈에 들어간다고 투덜대지만 한 번도 울거나 나가겠다고 떼를 쓰지 않았다. 몸에 샤워볼로 거품을 내어준다. 거품 가지고 놀게 시킨 다음 막내를 들어오라고 한다. 똑같이 샴푸질해 놓고 샤워볼을 넘겨준다. 둘째의 몸 구석구석 샤워기로 씻기고, 막내도 똑같이 씻긴다. 그렇게 둘을 씻기고 나면 나는 사우나를 다녀온 사람 마냥 땀으로 샤워를 한다. 그리고 나도 옷을 벗고 드디어 씻는다. 



저녁을 챙겨 먹어야 하는 것이 일종의 미션이었다. 나는 요리라는 것을 살기 위해 시작했다. 엄마가 하던 요리를 도울 때 옆에서 보고 배웠다. 가스밸브를 세로 돌린다. 가스불을 켜본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계란을 깬다. 역시 계란 껍데기가 우르르 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처음 계란 프라이라는 것을 해보았다. 사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프라이가 아니라 '스크럼블에그'라고 하는 것이었다. 왜냐면 뒤집지를 못해서 볶아버렸으니까.


동생들이 지금도 싫어하는 것이 된장찌개비빔밥이다. 가장 간단한 것이 엄마가 끓여놓은 된장찌개에 계란을 넣고 밥을 비벼 먹는 것이었다. 양도 양푼에 잔뜩 해야만 했었다. 남동생과 여동생이 한참 크고 있을 시기라 엄청나게 먹어댔다. 나중에는 "이제 비빔밥 제발 좀 그만 먹으면 안 돼?" 하는 소리까지 나왔다. 난들 맨날 똑같은 음식이 먹고 싶었나. 먹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렇지. 


나중에는 할 수 있는 메뉴들이 많아졌다. 라면, 김밥, 된장찌개, 소고깃국, 미역국 등 중학생 때는 웬만한 요리는 섭렵했던 것 같다. 엄마가 늦게 들어오면 속이 쓰린 경우가 많았는데, 그때 먹으라고 음식들을 조금씩 남겨두었다. 늘 엄마는 "어쩜 이렇게 간을 딱 잘 맞추니"하고 칭찬했다. 특히 잘하는 음식은 김밥이었는데 밥에 간을 하고 재료들을 볶아서 준비했다. 그리고 그때 당시 아주 유행했던 누드김밥을 쌌다. 사실 맛은 똑같은데, 멋을 위해 누군가 유행시킨 요리다. 나는 요리왕 비룡에 빙의하여 누드김밥을 휙휙 잘도 쌌다. 그때마다 엄마와 동생들이 매우 좋아했다. 味味味 세 글자가 박힌 듯한 눈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동생들을 씻기고 같이 밥을 먹고 나면 피곤해서 잠이 쏟아진다. 마지막으로 동생들의 책가방을 챙기면 오늘의 할 일은 끝이다. 아참 여기에 덤으로 주말에는 나의 실내화와 더불어 동생들 실내화를 같이 빨아야 했다. 큰 대야에 세탁세제를 넣고 거품을 낸 다음 실내화를 거꾸로 넣어 면 부분이 닿도록 한다. 실내화 솔로 실내화 6개를 박박 닦아서 화장실 모퉁이에 세워두면 된다. 실내화 면이 어찌나 안 닦이는지 팔이 빠지는 줄 알았다. 



참으로 우스운 것이 나도 어린애였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케어를 받아야 하는 나이에 나는 필사적으로 동생들을 케어했다.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혼자되는 것이 무서웠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생존본능에 가까웠다. 정말 하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싶고, 엄마가 씻겨주면 좋겠고, 엄마가 책가방을 챙겨주면 좋겠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내 것을 하고 동생들 것까지 신경 쓰기에 빠듯했다. 그리고 엄마가 힘들지 않을까 눈치까지 봐야 했다. 힘들다고 엄마에게 내색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이미 나에게는 아빠라는 존재는 없어진 지 오래다. 엄마에게는 아빠 역할을 해야 했고, 동생들에게는 엄마 역할을 해야 했다. 지금은 알고 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어서 한 것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러한 환경은 나의 가치관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당시에는 비혼주의니 비출산주의니 하는 말들은 없었다. 당연히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일반적이고 상식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절대 아이를 낳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육아라면 정말 지긋지긋하고 신물이 나니까. 그렇게 나는 비혼주의와 비출산주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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