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서울대 출신이다. 아내는 심지어 대학을 한 번 더 가서 지금은 한의사다. 지능지수도 꽤 높은 편이다. 아주 오래전에 측정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둘 다 140을 넘었던 걸로 기억한다. 일도 곧잘 한다. 동업을 하기 전 각자의 직장에서 에이스로 불렸다. 그래서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더 설마라고 생각했다. 무지하게 잘난 척했지만, 결국 나는 바보인 셈이다.
'제이'의 태명은 '똘똘이'였다. 내 어릴 적 별명인 '똘이'에 '똘'을 하나 더 붙여 지었다. 평소 아이에 대한 대리만족 식의 기대를 혐오에 가까운 수준으로 싫어하는 나이지만 은연중에 나도 비슷한 바람이 있었던 거 같다. 아내가 마뜩잖아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여자 아이의 태명을 똘똘이로 지었으니 말이다.
아빠의 기대를 알았는지, 세상 밖으로 나온 제이의 눈빛은 강렬했다. 신생아라는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눈에 똘망똘망한 눈동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카리스마가 있는 아이였다. 주변 사람들 대부분은 눈매가 나를 쏙 빼닮았다고 했다.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서운해할 엄마를 염려해서인지 볼록한 이마는 아내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다. 순둥순둥한 성품도 아내를 닮았다. 짜증 부리는 일이 거의 없었고 방긋방긋 잘 웃었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이 얼마간 지나갔다.
몇 시간에 한 번씩 깨는 신생아 시절이 지날 무렵부터 몇 가지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우선 신체 발달이 느렸다. 뒤집기, 기어 다니기, 일어서기, 걷기 등 주요 성장 단계가 모두 느렸다.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년까지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더뎠다. 아내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무사태평했다.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단순히 좀 느린 걸로만 생각했다. 고개를 가눌 수 있게 되었을 무렵에는 사물이나 사람을 옆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것도 걱정하지 않았다. 내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그랬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히려 "씨는 못 속여" 라며 웃기까지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느린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제이가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다른 아이'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제이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무언가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호명도 하지 않았다. '엄마'를 불러야 할 나이에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대신 손을 잡고 끄는 것으로 원하는 바를 표시했다. 그 외에도 까치발로 걷는 다던가, 반복 행동을 한다던가, 반향어 - 상대의 말을 그대로 따라 말하는 것 -를 사용한다던가 하는 자폐를 의심케 하는 행동들을 하였다.
아내는 검사를 받아보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단순히 느린 아이일 거라고 했다. 나의 자만과 아내의 바쁨, 그리고 병원의 긴 대기가 어우러지며 결국 2년이 지나서야 제이는 검사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첫 진료 후 3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 치료를 받고 있다.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빗나간 자신감이 원인이었는지, 준비되지 않은 아빠의 무지였는지, 아니면 현실을 피하고 싶은 비겁함이었는지 헷갈린다. 하지만 의문도 있다. 그때 바로 검사를 받고 치료를 서둘렀으면 지금 제이의 상황이 달라졌을까? 수년간 유명하다는 대학병원, 사설 특수교육기관을 겪어본 바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아직도 '다른 아이'와 '느린 아이'를 오가며 평범함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제이의 이야기를. 그리고 제이와 함께 한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그럼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