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지 3년이 넘었을 무렵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의외였다. 아내는 평소 직장으로 전화를 잘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침착하면서도 나지막한 아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언가 중요한 일임을 직감한 나는 핸드폰을 들고 사무실 비상계단으로 갔다. 아내가 갑작스레 물었다. "오빠, 아이가 꼭 있어야 돼?"
우리 부부는 아이가 없었다. 특별히 임신을 피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무지하게도 아이는 때가 되면 그냥 생기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비상계단에서의 망설임 없는 대답으로 임신에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술자리도 줄이고 운동도 하고 심지어 속옷도 사각팬티로 바꾸었다. 하지만 일 년이 다 되어가도록 아이는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결국 병원으로 향하게 되었다.
산부인과는 불편한 곳이었다. 여자에게는 당연히 그랬다. 아무리 의사라지만 여러모로 편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여자들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산부인과는 남자에게도 그리 편한 곳은 아니었다. 새벽에 강남에 있는 병원에 가서 - 회사는 광화문 근처였다 - 야동을 보며 정자를 배출한 후 회사로 출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지하철에서 괜히 눈치를 보게 되는 그런 이상한 일이었다. 최첨단을 달리는 시대에 맞지 않는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모든 병원에서 그렇게 한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담당의사의 의견에 따라 우리는 인공수정을 먼저 시도하였다. 하지만 시술을 한다고 모두 임신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두 차례 실패가 이어지자 임신의 기준으로는 고령인 아내는 여유가 없는 듯 보였다. 우리는 결국 시험관 시술을 하기로 하였다. 아내는 다니던 직장 - 한의원에서 봉직의로 근무 중이었다 -까지 그만뒀다. 본격적으로 몸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스스로 처방한 한약을 먹으며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이렇게 우리는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 사이 한 가지 변화가 있었다. 내가 퇴사를 하고 아내의 사업에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애초 계획은 이랬다. 아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임신을 준비하면서 한의원 개원을 염두에 둔 책을 한 권 출간하기로 했다. 그래서 임신이 되면 개원을 좀 미루고, 임신이 안 되면 개원을 하는, 갑오경장 이래로 성공한 적이 없다는 일석이조 전략이었다. 하지만 내가 합류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우리는 임신이 돼도 개원을 미룰 수가 없었다.
문제는 아이의 상태가 불안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양수 검사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검사가 아니어서 그런지 결과가 나오기까지 한 달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아이가 꽤 높은 확률로 다운 증후군이나 에드워드 증후군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다운 증후군은 그래도 들어는 보았지만 에드워드 증후군은 생소했다. 찾아봤다. 그날 저녁 나는 친구와 소주잔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90%가 생후 6개월 이내에 사망한다고 했다. 그나마도 생존한 아이의 절반은 1세 이전에 같은 길을 가게 된다고 했다. 절망적이었다.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동안 행운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나에게 드디어 6천 명에 하나인 불행이 찾아오는 것인가? 내가 평생 쓸 운을 다 써버려서 내 아이가 고통을 받는 건가? 아내는 고민도 하지 않았겠지만 솔직히 나는 아이를 지워야 하나 하는 생각을 적어도 잠깐은 했던 거 같다.
개원식날 기어코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전날 떡을 돌리며 무리를 했는지 아내가 하혈을 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결국 아직 개시도 안 한 5번 베드에서 개원식을 소리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담당의는 아이가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겁이 났다. 결국 우리는 개원을 미루기로 했고 아내는 입원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 담당의도 그렇게 말했다 -. 병실에 누워 수액을 맞는 것이 전부였다. 아내는 몰래 한약을 지어먹으며 - 담당의는 아내가 한의사인지 몰랐다 - 이 시간을 버텼다.
아이의 상태가 점차 안정기에 들어서자 우리는 미뤄놨던 개원을 강행하였다. 그렇게 아내는 임산부와 대표원장이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불안의 연속이었다.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는 하나 언제 갑작스레 아이의 상황이 안 좋아질지 몰랐다. 더군다나 아이가 다운증후군이나 에드워드 증후군인지는 낳아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한의원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첫 개원임에도 용감하게 텅 비어 있는 새로 지은 아파트 상가에서 시작했다. 당연히 첨부터 잘 되기 힘들었다. 아이와 한의원 모두 여러모로 불안한 시기였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제이의 출산 예정일이 되었다.
세상에 나온 제이는 우려와 달리 초롱초롱했다. 처음 보는 세상의 빛이 부담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떴지만 눈빛만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손가락, 발가락 개수도 정상이었다. 무엇보다 다운 증후군도, 에드워드 증후군도 아니었다. 안도의 마음이 밀려오며 한 바터면 울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