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는 잘 웃었다. 새로운 세계를 맞이한 즐거움이었을까? 자그마한 아기 침대에 누워서 보는 자그마한 세상이 뭐가 그리 흥미로웠는지 하루 종일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이곳저곳을 살폈다. 육아 필수품이라는 세련된 음악이 나오는 모빌을 설치해 준 이후로는 더욱 즐거워 보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모빌을 바라보다가 맘에 드는 음악이 나오면 까르르 웃었다.
제이와는 다르게 우리 부부는 웃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내는 출산 2개월 만에 복귀하였다. 개원 4개월 차 한의원을 남에게 맡겨두고 맘이 편하지 않았는지, 예정되었던 3개월을 다 채우지도 못한 채 진료실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출산한 환자들에게는 충분한 휴식을 권하던 아내가 정작 본인은 최소한의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현장으로 복귀한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제이를 집에 두고 출근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남자들이 이해할 수는 있지만 알 수는 없는 엄마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아내는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들었던 것 같다. 산후우울증이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나대로 힘들었다. 아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혼자 고군분투해야 했다. 우선 고용인의 역할이 어색했다. 직원들은 무언가 모르게 나를 피하는 듯했다. 회사생활 내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마치 걸그룹 센터라도 된 듯 살아왔던 내가 아이러니하게도 내 사업장에서는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여자들만 있는 환경도 쉽지 않았다. 대부분 남자들로 구성된 조직인 기업재무팀과는 많이 달랐다. 매사가 조심스러웠다. 더군다나 나는 한의사가 아니었다 - 지금도 아니다 -. 전문가들의 세계에서 라이선스가 없는 사람이 라이선스가 있는 사람에게 지시를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내가 돌아오면 다 좋아질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복귀한 아내는 열정이 없어 보였다 - 이것이 산후조리의 중요성이다 -. 머릿속으로는 아내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의욕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의원에 머물려고 시작한 사업이 아니기에 우리는 항상 스타트업을 창업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했다. 그런데 공동창업자 격인 아내가 시름시름 앓고 있으니 맥이 빠지는 일이었다. 이런 우울한 상황에서 제이는 우리 부부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 주었다. 우린 제이를 바라볼 때면 약속이나 한 듯 웃었다. 제이의 해맑은 웃음은 복잡한 일들을 잊게 해 주었다.
엄마, 아빠의 상황을 알았는지, 제이는 웬만해서는 짜증을 부리지 않았다. 잘 울지도 않았다. 배가 고프다거나 기저귀를 갈아줘야 할 때, 즉 생존에 위협을 받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평화로워 보였다. 제이는 고양이의 눈을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마치 세상의 진리라도 발견한 듯 웃곤 하였다. 한 마디로 순한 아기였다. 그렇다고 아이가 둔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민했다. 특히 청각적인 자극에 민감했다.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랐다. 시각적인 자극도 즐기는 듯했다. 갑자기 얼굴을 들이민다거나 사물을 보여줬다 숨기는 장난을 좋아했다. 예민한 성격은 보통 짜증이나 신경질로 연결되기 쉽지만 순한 천성과 만나면 양상이 달라진다. 겁이 많아진다. 그렇다. 제이는 겁보였다. 이는 몇 년 뒤 진료에서 담당의가 발달지체의 원인으로 지목한 부분이기도 하다.
미묘한 사경으로 왼쪽 목덜미를 주물러줘야 하는 것만 제외하고는 제이는 건강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았다. 6개월이 지나서도 뒤집기를 시도하지 않자 아내의 걱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제이는 엄마의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워있는 게 이렇게 편안한데 뭐 하러 뒤집어?'라고 하는 듯한 편안함을 보였다.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남들보다 한참 늦은 뒤집기를 수행한 이후에도 제이는 만만디였다. 기어 다니기, 앉기, 일어서기 등 모든 발달단계가 느렸다. 결국 1년이 훌쩍 넘어서야 걷기를 시작했다. 생후 19개월 차에 간 유후인 여행 사진을 보면 걷는 모습이 무척 어색하고 조심스럽다. 하지만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인생은 긴데 몇 달 늦게 걷는 게 뭐 그렇게 대수이겠는가?
하지만 제이가 눈을 마주치지 않고 호명에 반응하지 않으며 우리를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는 슬슬 염려가 되기 시작했다. 아내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소아정신과 진료를 받아보자고 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 수많은 이프(if)들 중에 제이가 남들보다 뒤처진다는 생각은 없었다. 결국 나는 몇 달을 더 지체하고서야 아내의 말에 동의했다. 그땐 미처 몰랐다. 소아정신과 진료는 받고 싶다고 당장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명대학병원의 한 교수는 대기가 5년이었다. 2살 때 예약을 하면 학교 갈 때쯤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리저리 수소문 한 끝에 결국 그나마 대기가 가장 짧은 - 그것도 1년이었다 - 집 근처 병원 교수님께 진료 예약을 했다.
아내는 진료를 기다리면서 우선 사설특수교육기관에서라도 교육을 시작하자고 했다.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당시 아내는 진료에 매여있는 상황이라 내가 시간을 빼서 제이를 데리고 다녀야 했다. 부담스러웠다. 사업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속에서는 제이를 이미 '다른' 아이가 아닌 '느린' 아이로 규정지었던 것 같다. 기관의 이름도 마음에 안 들었다. 'OO발달장애아동센터'.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장애라는 단어는 나에게 무척이나 생소했다. 부끄럽게도 나와는 관련이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가족과 주변의 주목을 받고 살아온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아직도 나의 교만함이 제이의 치료를 늦췄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지금껏 살아오며 했던 수많은 선택들 중 가장 바보 같은 짓이었다. 아무튼 나의 미숙하면서도 오만한 결정으로 인해 제이는 진료를 기다리는 1년 동안 치료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쯤,
제이, 그리고 우리 부부에게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바로 코로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