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코로나가 확산되기 시작하던 2020년 봄.
우리 부부는 한의원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텅 빈 점포에서 매출 제로로 시작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아내 스스로가 페르소나여서 - 그 누구보다 환자들을 이해할 수 있어서 - 그랬는지, '요즘 여자들의 삶의 질을 높인다'라는 다소 생소한 비전에도 불구하고 한의원 매출은 수직 상승했다. 주식으로 치면 떡상(?)할 종목이었다. 문제는 스무 평 남짓한 규모였다. 비좁은 공간에서 환자들과 직원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내 야생마 같은 천성과 어우러지며 나는 자연스레 확장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가 2019년 늦가을 무렵이었다.
마침 한의원 옆 점포가 3년째 비어있었다. 마음에 썩 드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임차료가 저렴했고 - 첫 계약기간이 끝나고 해마다 올릴지는 몰랐다 -, 무엇보다 한의원을 이전하지 않는 이상 그곳 이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그래서 덜컥 계약을 했다. 아내는 불안해했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 일을 벌일 때 가장 신이 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 지금도 그렇다 -. 나는 열정적으로 일했다. 심지어 엑셀로 모눈종이를 만들어 평면도까지 직접 그렸다 - 몇 년 후 일부 재공사라는 참사를 겼었다 -. 그러던 차에 코로나가 터진 것이다. 대구 봉쇄까지 논의되던 시기에 우리는 인테리어를 거의 마무리하고 치료센터 오픈 커팅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은 코로나의 특별한(?) 위상이 사그라들었지만 그 때야 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세상의 종말이라도 온 듯한 분위기는 엘 그레코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우리는 떨었다. 개개인의 공포심은 주변의 사람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게 하였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소중한 친구들과 친절한 이웃들이 아니었다. 잠재적인 바이러스 덩어리였다. 사람들은 외출을 꺼렸다. 한의원 주차장도 점차 한가해졌다.
가장 큰 리스크는 코로나에 걸린 사람이 내원하는 것이었다.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초창기에는 확진자가 다녀가면 한의원은 2주 동안 문을 닫아야 했다. 2주라는 기간은 우리가 매출 없이 버티기에는 상당히 긴 기간이었다. 규모가 확장되며 직원들을 충원한 상황이라 더욱 그랬다. 아내가 코로나에 걸리는 것도 한의원에는 치명적이었다. 한의원에서 아내의 비중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코로나 규제가 좀 완화된 이후에도 조심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과장하면 이년 동안 거의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덕분에 한의원은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제이는 아니었다. 한창 새로운 자극과 마주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시기에 집에만 있었다. 당시에는 집 앞에 나가는 것조차 부담이었다.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 유모차를 타고 잠깐 바람을 쐬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코로나에 대한 공포가 누그러지고 나서도 제이는 나갈 수가 없었다. 우리 가족 중 하나가 코로나에 걸린다는 것은 곧 한의원 생존에 대한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당시 제이의 세상에는 엄마, 아빠, 할머니밖에 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 하는 이상한 시대도 문제였다. 이는 제이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 모두의 문제였다. 가뜩이나 상호작용의 기회가 현저히 줄어들었는데 그나마 만나는 사람들은 입을 가리고 있었다. 당연히 사회성 발달에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언어발달의 지연으로 이어졌다. 아이들은 상대방의 입모양을 보며 말을 배우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화여대 아동발달센터》가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2019년 태어난 545명의 아이 - 마포구, 서대문구 어린이집 원아 대상 - 중 18.34%인 100명의 아이가 발달 지연이 의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중 82%는 언어 영역에서 문제를 보였다고 한다. 이런 초유의 시대적 상황은 제이의 타고난 천성과 어우러지며 제이의 발달을 더욱 더디게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어린이집이었다. 국공립이 좋다는 누군가의 말에 선택한 어린이집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최악의 결정이었다 - 물론 국공립 어린이집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 우선 문을 닫는 날이 너무 많았다. 한 살 터울의 조카가 다니는 어린이집은 하는데 제이가 다니는 어린이 집은 작은 이슈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마 국공립이라는 위상과 원장의 보수적인 성향이 어우러진 결과가 아닌가 싶다. 교육 방식도 이상했다. 통합 어린이집 - 장애 아동도 있는 어린이집 -이었는데도 배변 교육을 비롯한 모든 교육은 집에서 해와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는 조금 일찍 데리러 갔더니 제이가 낮잠을 안 잔다는 이유로 원장이 있는 사무실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 결국 제이는 그 어린이집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네 살이 되어서야 조카가 다니고 있는 어린이집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다사다난했던 2020년은
제이에게는 - 아이들의 발달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 세 살을 맞는 해였고
제이는 그 시기 동안 할머니와 둘이 거의 집에만 있었다.
그리고 다음 해 봄,
제이는 무려 1년을 기다린 끝에 첫 진료를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