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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큐 Mar 14. 2024

예의 없는 녀석

제이는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났지만 예의가 없다. 그렇다고 제이를 무례하다고 하기도 좀 그렇다. 제이의 '예의 없음'에는 그 어떠한 의도도 없으며, 이는 철저하게 '무지(無知)'로부터 온 날것이기 때문이다. 제이는 상대방이 반갑게 인사하면 자신도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 간단히 말해 사회성이 없다. 예의는 사회적 구성원들 간의 암묵적 약속이니 사회성이 부족한 제이가 예의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제이는 예의를 차리기 위해 벌써 몇 년째 병원과 센터를 오가며 애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전, 다시 말해 제이를 단순히 '느린 아이'로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제이가 슬슬 놀이의 즐거움을 알아가던 무렵이기도 했다. 당시 제이는 엄마보다 아빠를 좋아했다 - 지금 최애는 당연히 엄마다 -. 나하고 노는 것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 아이들의 최애 순위는 대개 잘 놀아주는 순위와 비례한다 -. 짧지만 강렬한 나와의 놀이는 제이를 '까르르' 웃게 했다. 그럼 제이는 내 손을 잡아끌며 한 번 더 해달라는 의사표시를 대신했다. 나는 그런 제이의 웃음이 좋았고 이런 시간이 좋았다.



          그런데 그토록 좋아하던 제이가 잠시 후에는 언제 그랬더냐는 식으로 나를 밀어내곤 했다. 그러고는 또 놀이가 필요하면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 제이는 부탁할 때 이런 표정을 자주 짓는다 - 다시 손을 잡아끌 곤 했다. 같은 일이 몇 번 반복되면서 나는 서운해졌다. 배신감마저 들었다. 지가 필요할 때는 오고, 지가 필요하지 않을 때는 밀어내? 나는 이참에 인사를 안 하는 것까지 묶어서 교육을 하기로 했다. 솔직히 '서운한 감정 반, 가르치려는 의도 반'이었던 거 같다.



          나는 제이에게 함무라비 전법을 쓰기로 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이 녀석아! 참 속 좁은 아빠였다. 아무튼 교육을 하기로 마음먹고는 제이가 인사를 하지 않는다던가 나를 밀어내면 나도 똑같이 제이가 잡아끄는 것을 무시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네가 아빠에게 한 데로 나도 하는 거'라고 설명해 줬다. 제이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듯하였다. 오히려 '갑자기 이 사람이 왜 그러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의 함무라비 전법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내의 핀잔만을 남긴 채 이틀도 채우지 못하고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고 나서 일 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 사이 제이는 센터에서 특수교육을 받고 있었다. 하루는 놀이치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제이에게 아직 사람은 물건과 같을 수 있어요. 그래서 앞에 사람이 있으면 물건 치우듯이 손으로 밀고 가는 거예요." 아!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제이는 단순히 내가 필요할 때는 다가오고 필요 없으면 밀어냈던 것이다. 그런 걸로 그렇게 서운해했다니. 부끄러운 마음과 함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인간의 본성 아닐까? 사람들도 본인이 필요하면 다가가고 필요 없으면 멀어지지 않는가. 다만 제이의 방식은 좀 투박할 뿐이다. 사실 방식을 조금 세련되게 하는 것이 사회가 요구하는 예의일지도 모른다.



          하루는 제이와 소파에서 놀고 있는데 제이가 갑자기 나를 밀어냈다. 나는 - 서운해하는 대신 - 물었다. "아빠 가?" 제이가 말했다. "가!" 제이가 말을 하다니. 신기했다. 내 말을 따라 하는 대신 제이가 자발적으로(?)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아빠 가?" 제이가 대답했다. "가!" 흐뭇했다. 제이를 센터에 데리고 다닌 지난 노고에 보답받는 듯했다. 바보처럼 웃고 있는 나를 옆에서 지켜보시던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가라고 하는 좋아하는 아빠는 너밖에 없을 게다." 뭐 그런 것도 같다.  



          몇 년 새 제이는 부쩍 성장했다. 요즘에는 의사 표현도 제법 한다. 하지만 여전히 방식은 투박하다. 이젠 '가'라고 했는데 상대방이 가지 않으면 한 단어를 더 붙이기도 한다. '저리로 가!' 때론 '나와 나와'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마 내 말투를 따라한 듯싶다 -. 나는 예의 없는 딸을 보면서도 그저 흐뭇할 뿐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자신의 의사를 잡아끄는 것으로 표현하던 모습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 아닌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예의는 중요하다. 하지만 본질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배가 부를 때야 식사예절을 따지고 있겠지만 배가 고프면 수저 없이 손으로라도 집어 먹기 마련이다. 예의를 따지기 것보다는 우선 먹고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제이는 아직 배가 많이 고픈가 보다. 우선 배부터 채우게 하고 예의를 가르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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