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큐 Feb 13. 2024

자폐와 천재

자폐와 천재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감각이 뾰족하다는 것이다. 이는 발달이 더딘 아이를 둔 부모를 헷갈리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폐 성향을 가진 친구들의 모습이 때론 천재들의 어릴 적과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제이는 시각적인 감각이 발달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거의 모든 면에서 나무늘보와 같은 발달 속도를 보이는 제이도 남들보다 압도적으로 잘하는 것이 있다. 바로 퍼즐이다. 한 살 많은 조카가 스무 개 남짓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제이는 이미 백 개가 넘는 조각을, 그것도 서로 다른 퍼즐 두세 개를 동시에 맞출 수 있었다. 마치 퍼즐 전체를 사진 찍듯이 시각적으로 기억해서 맞추어 나가는 듯했다. 이런 면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리고 잠시나마 희망을 갖게 하였다.



          제이는 운 좋게 - 특수교육기관도 보통 대기가 길다 - 첫 진료를 받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집 근처 특수교육 시설 - 이하 센터 -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센터는 한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시설이었는데 영리기관이지만 비영리기관의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선생님들은 무언가 사명감이 있는 듯 보였고 오래 근무하신 분들도 많았다.



          우리는 센터 책임자 - 센터에서는 그분을 부소장이라고 불렀다 -의 의견에 따라 우선 일주일에 한 번 센터에 가고 아이의 적응 상황을 보며 수업을 늘려나가기로 했다. 수업은 놀이치료와 감각통합치료 두 가지였다. 놀이치료는 30분 동안 진행되는데 선생님과 상호작용을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듯보였다. 일반적인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것이 제이와 같은 성향을 가진 친구들에게는 당연하지 않기에 모든 것을 연습해야 했다. 누가 나에게 인사를 하면 상대방의 눈을 보며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조차 제이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수업은 다소 기계적으로 보였다. 그야말로 훈련이었다.



          놀이치료가 정신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 수업이라면 감각통합수업은 신체적인 발달에 주안점을 두는 듯했다. 수업을 하는 공간은 흡사 키즈파크를 방불케 했다. 아이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방은 미끄럼틀과 볼풀을 비롯한 재미있어 보이는 것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당시 두 발 뛰기도 잘 못하는 제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제이는 그곳에서도 다소 정적인 치료부터 받았다. 수업은 특이했다. 그중 가장 신기했던 건 구강마사지였다. 선생님이 손가락에 실리콘으로 된 무언가를 끼우시고 아이의 입 안을 마사지해 주는 것이었다. 감각을 자극하는, 혹은 무디게 하는 치료가 아니었나 싶다.



          센터에 다니기 시작하고 이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놀이치료 선생님 - 센터에는 담임제가 없었지만 나는 항상 그분께 상의를 하였고 그분은 기꺼이 시간을 내어 아무런 대가 없이 상담에 응해주었다 -과 상담을 하던 중 나는 문득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선생님 감각통합치료는 왜 하는 거예요?" 치료를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난 시점에는 적합하지 않은 엉뚱한 질문이었지만 선생님은 친절하게 답해주셨다. "남들보다 예민한 부분은 누그러뜨려주고 남들보다 무딘 부분은 날카롭게 해주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의문이 들었다. 천재들은 일정 분야에서 남들보다 훨씬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개 그 예민함은 그들을 천재로 만든다. 그런데 그토록 귀하디 귀한, 예민한 감각을 무디게 하는 수업이라니! 이런 모순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내 생각을 읽으셨는지 - 나는 원래 생각이나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다 - 선생님이 덧붙이셨다. "센터 치료의 목표는 제이가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을 줄여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발달을 저해할 정도의 예민함은 누그러뜨려야 해요"   



          물론 선생님 말씀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속 한 구석에는 무언가 모를 찜찜함이 남아 있다. 시대를 초월하는 천재들 중 일상생활을 원만하게 했던 사람이 있었던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이 제이가 천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제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 어쩌면 불행하지 않기 위해 예민함을 누그러뜨리는 것으로 타협하고 수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래도 못내 아쉽다.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아빠는 예민함을 뾰족하게 하기 위해 관심도 없던 미술작품까지 보고 있는 상황에, 딸아이는 예민함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수업을 받고 있다는 현실이. 하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은 원래 아이러니한 것이 아니던가.

이전 06화 예의 없는 녀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