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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큐 Apr 04. 2024

에필로그.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제이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기간이 아닐까 한다. 학교라는 문턱에 들어서는 순간 그동안 제이를 둘러쌓고 있던 보호막들은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젠 사회와 직접 대면해야 한다. 더 이상 옆에서 도와줄 사람은 없다. 게다가 같이 지내야 하는 친구들은 아직 '다름'을 인정할 만큼 성숙하지 못하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다. 그런 녀석들 틈 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제이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얼마 전 아내의 친구들과 부부 동반 모임을 가진 적이 있다. 그중 하나가 경찰이었는데 그 친구의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영화에서나 볼법한 범죄들이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현실화되고 있다고 했다. 아니 더 심하다고 했다. 친구들(?)을 괴롭히는 수준은 이미 깡패들이나 하는 짓거리와 비슷했고 심지어 초등학생이 마약에 손을 대는 사례도 있다고 했다. 가뜩이나 초등학생 자녀를 둔 친구들의 이야기에 걱정이 늘어가고 있던 우리 부부는 제이에 대한 염려로 도저히 그 자리를 즐길 수 없었다.   



          사실 그동안 제이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아왔다. 우리 부부는 제이가 발달이 더디지 않았어도 이렇게 했을까 싶을 정도로 제이에게 관심을 쏟아내고 있다. 아내는 잠을 줄여가며 제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확보하고 있고 나도 나름 시간을 쪼개 제이에게 필요한 일들을 하고 있다. 재정적으로도 최선을 다해 지원한다. 덕분에 나는 십 년이 넘은 디젤차를 타고 있다. 좋아하던 골프도 끊은 지 오래다. 빈 틈은 어머니- 제이에게는 할머니 -가 채워주신다. 어머니는 제이를 어린아이가 아닌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신다.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김소영 작가가 말한 어린이의 '체면'을 지켜주신다. 아마도 제이의 구김 없는 성격은 어머니의 따뜻한 배려 덕분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제이는 해맑다.   



          뿐만 아니다. 어린이집 원장님은 제이에게는 거의 은인과 같은 존재이다. 일반 어린이집- 장애영유아가 없는 어린이집 -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제이를 배려해 주신다. 예민한 제이를 위해 담임선생님 배정까지 일일이 챙겨 주실 정도다. 덕분에 제이는 어린이집에 입학하고 첫 3년 동안 같은 선생님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멀리 야외 활동을 갈 때는 원장님이 동행하시기도 한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제이를 챙겨주시기 위해서다.



          센터에는 놀이치료 선생님이 계신다. 이 분은 제이의 '따라잡기' 프로젝트의 사령관이다. 우리 멤버 중 유일한 특수 교사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나의 푸념에 가까운 이야기를 - 아무런 대가 없이 - 일일이 들어주시고 제이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 얼마 전부터는 한 달에 한번 - 교육의 일원화를 위해 - 어린이집에 방문해 주신다. 덕분에 제이는 어린이집과 센터를 오가면서도 별다른 혼선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제이가 고마운 분들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 부부는 조만간 제이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초등학교 입학을 일 년 유예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이다. 늘 그렇듯 이 부분에 대해서도 아내와 나의 생각은 다르다. 아니, 아직 우리 둘 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편이 더 맞겠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무언가 결정을 하는 데 머뭇거림이 없는 나도 이번만큼은 주저하게 된다.



          지난 몇 년 간 제이는 성장했다. 얼마 전에는 어린이집 원장님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원장님 예뻐요"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제이를 내려주다 에 머리를 부딪친 나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후후" 하고 입김을 불어주기도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지만 제이에게는 무척 특별한 일이다. 다른 사람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제이는 요새 우리 부부를 놀라게 할 만한 말들을 툭툭 던지곤 한다.



          하지만 자기만의 세계를 즐기는 성향은 여전하다. 아직도 혼자 있을 때면 머릿속 상황에서 떠오르는 맥락에 맞지 않는 단어를 말하거나 노래를 부르곤 한다.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무언가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 귀를 막는 버릇도 여전하다. 무언가 규칙을 찾아 지키려고 하고 - 이 부분은 나도 비슷하다 -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계속 신경 쓰는 도 여전하다. 이런 데도 내년에 초등학교에 보낼 수 있을까?



          초등학교를 유예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 있다. 제이가 급격한 발전을 하지 않는다면 일 년 늦게 들어왔다는 편견만 더해질 수 있다. 게다가 제이는 키가 크다. 이 부분은 초등학교를 유예하는 데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더 쉽게 다른 아이들의 눈에 띄기 때문이다.



          결정된 것은 없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다. 그동안 제이는 열심히 성장할 것이고 우리 부부를 포함한 제이의 '따라잡기' 프로젝트 멤버들의 고민도 깊어질 것이다. 사실 제이의 인생도 결정된 것이 없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제이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될 것이지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



          논어에서 사십은 불혹(不惑)의 나이라고 한다. 여기서 '혹'이란 '죽은 자를 살리려 하고 산 자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부분을 욕심내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수능공부는 게을리하면서 운명에 'S'자가 있나 궁금해서 점쟁이를 찾아가는 행위가 바로 '혹'이다. 우리 부부는 '혹'하지 않으려 한다. 머나먼 미래를 걱정하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려고 한다. 세상 거의 모든 일이 그렇듯 결과는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럴 땐 마흔이 넘은 늙은(?) 아빠가 좋은 점도 있는 듯하다. 최소한 '혹'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를 닮은 제이에게 내 인생을 점철한 운빨(?)인복이 깃들기를 기원하며 연재를 마친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너그러운 독자들께도 행운이 가득하시길 빌어본다. 굿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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