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이라는 작가를 만난 건 - 제목마저 매력적인 소설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에서였다. 책은 일곱 개의 짧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 연관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작가 특유의 -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 공통된 분위기가 있었다. 이런 면에서는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을 닮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단편들은 모두 훌륭했다. 하지만 나는 유독 첫 번째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쩌면 내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이하 '순례자'-에 유별난 애착을 갖는 것은 개인적인 이유에서 일 수도 있다.
인간배아 디자인 해커인 릴리 다우드나- '순례자'의 주요 인물이자 주인공의 엄마 -는 자신의 얼굴에 있는 것과 똑같은 '얼룩'을 가지고 태어날 딸의 DNA를 개조하지 않는다. 대신 얼룩이 '이상함'으로 여겨지지 않는 마을을 만들어 얼룩이 '이상함'으로 여겨지는 시초지 - 지구 - 를 떠난다. 참 유능한 엄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제이가 '느린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인 것이 분명해졌을 때, 그래서 제이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했을 때 나는 제이의 세계를 지켜줄 수 있을까? 제이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그만큼 나는 유능한가? 용감한가? 릴리 다우드나처럼 지구를 떠나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제이가 다른 이들로부터 불필요한 상처를 받게 하고 싶지는 않다. 특히 내 능력이 모자라 어쩔 수 없이 그런 환경으로 내모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늘 조급해진다.
아내와 한의원을 시작할 때의 목표는 거창했다. 한의원을 빠르게 성장시켜 나만의 비즈니스 모델을 적용한 - 진짜 '나만의'인지는 잘 모르겠다 - 한의원 프랜차이즈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한의원을 캐시카우 삼아 다른 재미있는 사업들을 벌여 나가고 싶었다 - 아내의 생각과는 약간 결이 다르다 -. 다시 말해 한의원계의 '백종원'이 되는 것이었다. 코로나라는 암초를 만나 살짝 늦어지기는 했지만 우리는 선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큰 그림에서 보면 당초 계획했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여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자'라는 생소한 비전을 가진 동네 한의원이 몇 년째 매출 규모로는 전국 10% 안에 들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이와 함께 하게 되면서 나의 꿈은 바뀌고 있다. 아니, 확장되고 있다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제이'와 유능하지만 제이와 걱정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걸로 행복할 수 있다는 소박한 '아내',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본인의 꿈도 펼쳐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나'. 이렇게 서로 다른 세 명의 행복이 만나는 교집합을 찾는 것이 나의 새로운 과제다. 그리고 아마도 나의 새로운 꿈은 그 교집합 안에 머무를 것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새로운 꿈도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의 연장 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남들과 조금(?) '다른' 아이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돈이 모두 필요한데, 이게 어렵다.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지 않는 이상 시간과 돈은 대개 트레이드-오프 - 어느 것을 얻으려면 다른 것을 희생해야 하는 -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사업은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에 적합한 수단이다. 에셔의 판화와 같은 모순을 풀어나가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내가 생각하는 자영업과 사업의 차이는 이렇다. 내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것은 자영업이고 돌아가는 것은 사업이다. 즉 아내와 내가 최소한으로 일하면서도 한의원이 원하는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으면 그게 나에게는 사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직 자영업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아내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매출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엄마와의 시간이 더욱 필요한 시기가 제이에게 찾아올 듯하다. 그전에 나는 우리 한의원을 자영업이 아닌, 사업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 목표이다. 지금은 '한의계의 백종원'이 되겠다는 꿈은 잠시 접어 두었다.
뒤늦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한 가지 목표가 더 생겼다. 나의 사이드 프로젝트가 된 그것은 바로 천재들의 삶을 연구하는 것이다. 뭐라도 하나 얻을까 싶어 시작한 독서는 어느덧 거대한 프로젝트가 되어 버렸다. 이제 내 책장에는 50명이 넘는 천재들에 대한 70권이 넘는 벽돌책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들을 이해하기 위한 인문, 과학 서적들도 꽤 있다. 나는 한 사람에게서 한 가지씩 무기를 찾아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무기들에서 성공의 힌트를 찾을 것이다. 내 거창한 프로젝트가 내 삶을, 더 나아가 - 특히 나와 같이 늦은 나이에 - 도전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의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중요한 열쇠가 될 거라 믿고 있다.
두 가지 꿈을 향해 나아가다 보니 자연스레 버킷리스트가 하나 생겼다. 나는 사십 대의 끝자락에 제이와 아내와 함께 일 년 동안 세계를 여행할 것이다. 여행은 천재들의 삶을 따라가 볼까 한다. 지난 몇 년간 쌓은 지식을 뽐내고 싶은 마음도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는 더 커다란 목표가 있다. 그동안 고생한 아내와 제이에게 행복한 일 년을 선물하고 싶어서이다. 더불어 제이에게 살아갈 수 있는 무기를 하나 찾아주고 싶다. 나는 천재들의 발자취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물론 그 여행의 가이드는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