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고 글쓰기 전문가의 마지막 생각 정리
바쁘다는 핑계로 독서 참 오랜 시간에 걸쳐서 몇 장씩 읽었던 책이다. 그렇게 읽다보니, 앞 부분이 생각나지 않아 책의 여기저기 왔다갔다를 반복했다. 돌아보니, 최근 몇 개월동안 혼자서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며 보내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 마저도 불규칙적이었다보니 책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본다. 불현듯, 책을 읽어주는 서비스가 떠올라 처음으로 시도해 보았다. 덕분에 2~3일 동안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길을 걸으며 책의 내용을 읽어주는 목소리를 귀로 들으며 완독할 수 있었다. 듣는 책의 경험이 새롭기도 하지만, 참 좋은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자주 시도해 보아야겠다.
'이어령'이라는 이름은 참 오랜 시간동안 들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뉴스에도 나오고, 교양 프로그램에도 나오는 할아버지로 기억한다. 항상 차분하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주는 지혜로운 영감님의 이미지랄까.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데, 젊은이들 못지 않게 컴퓨터도 자연스럽게 다루고 최신 트렌드에 민감한 모습도 뇌리에 박혀있었다. 가끔 미디어에서 이 분이 쓴 글을 접할 때면, 어떤 분인가 검색해보면서 이어령이라는 사람은 '문화'라는 키워드 그 자체인 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나이가 엄청나게 많은 분이라고 알고 있었기에, 몇 년 전에 마침내 부고 기사를 접하면서도 크게 놀라지는 않았었다. 이런 분이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풀어냈다고 하니, 지혜로운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마음에 저절로 끌려가는 책이었다.
이 분이 젊은 시절 어떤 분이었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 문학 비평을 열심히 했고, 초대 문화부 장관을 하였으며, 서울올림픽 개막식 굴렁쇠 소년을 기획했고, 한예종을 만든 사람이라는 정도의 단편적인 정보들만 기억하고 있었다. 이 책을 덮고 나서는 나도 이렇게 지혜로운 노인의 모습으로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지식이 쏟아져나오고 옛 것의 쓸모가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지혜를 구하고 싶어하는 노인의 모습말이다. 이런 모습의 어른이 주변에 점점 없어지는 시대이기에 더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기억에 남는 책의 주요 내용을 중심으로 생각을 정리해본다.
“갈증이 사라질까 두려워서야. 내겐 갈증이 필요하다네. 나는 그것을 두레박 같은 갈증이라고 불러. 두레박은 물을 푸면 비워야 해. 그래서 영원히 물을 풀 수 있어. 독은 차면 그만이잖나. 채우는 게 목적이니까. 반면 두레박은 물의 갈증을 만들지. 물독들은 제 인생을 남만큼 물로 채우겠다고 아웅다웅하며 살아. 반면 두레박들은 눈이 반짝반짝해. 좀 까칠하고 불만도 많고 빨리 걷지. 딱 두레박이야. 두레박들은 원하는 거 줘도 금방 딴 거 할 사람들이야. 붙들려고 하면 떠나버려. 지적 보헤미안인 거라. 내가 늘 말하는 우물 파는 사람들이라네.”
나는 두레박인가. 아니면 물독인가. 물독을 가득 채워서 두레박들이 와서 떠 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었다. 물독이 가득 차면 다른 물독을 만들기도 했던 것 같다.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것은 많지만, 그렇다고 이것저것 다 해볼 용기는 없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어령 선생이 이야기하는 '갈증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도 가득한 사람이기도 하다. 노년의 나이가 되어도 갈증이 계속 남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삶의 에너지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알아도 모른 체하고 몰라도 아는 체하며 사는 게 습관이 된 사회는, 삐걱거리는 바퀴를 감당 못 해. 튕겨내고 말지. 나뿐이 아니네. 글을 쓰는 사람들, 한 치 더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고통을 겪게 돼 있어. 요즘엔 더하지 않나? 생각이 자랄 틈을 안 주잖아. 인터넷에 물어보면 다 나와. 이름 몰라도 사진 찍어서 올리면 다 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내 머리로 생각한다네...(중략)...모르는 시간을 음미하는 거야. (활짝 웃으며) 모르는 게 너무 많거든.”
내가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교육청에 들어와 살아보니, 아는체 하는 것보다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수많은 민원인들 역시 곧바로 대답할 때보다는, '관련 내용을 검토한 후에 정확하게 다시 설명해 드리겠다.'는 취지의 답변을 더욱 신뢰하는 느낌이 들었다. 모르기에 질문하고, 모르기에 공부를 했다. 아직까지 잃을 것이 많이 않은, 사회적으로 쌓은 것도 많지 않은 비교적 젊은 남성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오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지적처럼, 우리 주변에는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이며 그가 인식하는 세상의 틀로만 모든 일을 이해하려는 사람도 분명 있다. 내가 이어령 선생이 말하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는 즐거움'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 안도감을 느꼈다.
“생명체 전체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는 거지. 그럴수록 경계를 알아야 해. 누군가와 대화할 때 그가 인간중심주의로 말하고 있는지, 탈인간중심주의로 말하고 있는지 그것부터 가늠해야 한다네. 철학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 아까 말한 자연계(피지스), 법계(노모스), 기호계(세미오시스)처럼 범주를 구분해서 사고할 줄 알아야 하는 거야. 기호 안에서도 정확한 개념을 토대로 사고해야 하고.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자연계, 법계에는 그나마 고개를 끄덕여도 기호계까지는 못 넘어와. 기호계야말로 놀라운 세계라네. 기호계에서 문학이 나오고 예술이 나오고 본격적인 철학이 나오거든...(중략)...법의 잣대로 볼 때는 ‘소설 쓰시네요’라는 말이 얼마나 비웃는 얘긴가. 법으로 보면 소설이 가소롭겠지만, 소설계에서 보면 법이야말로 웃기는 말장난이야. 소설이 진리에 더 가깝지. 법은 내일이라도 바뀌어. 지역에 따라 달라져. 여기선 불법이 저기선 합법이지. 그게 무슨 진리인가. 그런데 소설로 쓰여진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 전쟁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도 마치 내 비극의 가정사처럼 느껴지거든.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들인데도, 내 형제자매 같지. 그게 기호계의 힘이야. 그래서 나는 답답하다네. 과학 하는 사람, 정치 하는 사람, 경제 하는 사람이 문학을 알아야 해. 교양으로 인문학 하라는 게 아니야. 인문학은 액세서리가 아니라네.”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이야기의 힘'을 참 쉽게 표현하고 있었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 바로 '기호계'의 힘이라는 것이다. 왜 사람들이 사회가 더 정교화되면 정교화될수록 이야기를 찾아다니는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한 편으로는, 무서운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야기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걱정도 들었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인간이면 언어를 가졌고, 이름을 가졌고, 지문을 가졌어. 그게 바로 only one이야. 무리 중의 ‘그놈이 그놈’이 아니라 유일한 한 놈이라는 거지. 그렇게 내가 유일한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남을 사랑하고 끌어안고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거야. 내가 없는데 어떻게 남을 끌어안겠나? 내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있어? 그런데 ‘나 없는 우리?’ 아니 될 말씀이야. 큰일 날 소리지. 그래서 내가 사이를 강조했잖아. 나와 너 사이. 그 사이에 나도 있고 너도 있다는 거지. 자네와 나 사이에 interview가 있는 것처럼...(중략)...앞으로 점점 더 interface 접속장치가 중요해. (컵을 가리키며) 이 컵을 보게. 컵은 컵이고 나는 나지. 달라. 서로 타자야. 그런데 이 컵에 손잡이가 생겨봐. 관계가 생기잖아. 손잡이가 뭔가? 잡으라고 있는 거잖아. 손 내미는 거지. 그러면 손잡이는 컵의 것일까? 나의 것일까?...컵에 달렸으니 컵의 것이겠지만, 또 컵의 것만은 아니잖아. ‘나 잡아주세요’라는 신호거든. ‘손잡이 달린 인간으로 사느냐. 손잡이 없는 인간으로 사느냐.’ 그게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그런데 또 한편 컵에 손잡이가 아니라 자기 이름이 쓰여 있다고 생각해봐. 갑작스럽게 내 것이 되잖아. 같은 사물인데도 달라지는 거야. 유일해지는 거지. 이런 생활 속의 생각이 시가 되고 에세이가 되고 소설이 되고 철학이 되는 거라네...(중략)...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 게 아니야. 스토리텔링이 럭셔리한 인생을 만들어. ‘세일해서 싸게 산’ 다이아몬드와 첫 아이 낳았을 때 남편이 선물해준 루비 반지 중 어느 것이 더 럭셔리한가? 남들이 보기엔 철 지난 구식 스카프라도, 어머니가 물려준 것은 귀하잖아. 하나뿐이니까. 우리는 겉으로 번쩍거리는 걸 럭셔리하다고 착각하지만, 내면의 빛은 그렇게 번쩍거리지 않아. 거꾸로 빛을 감추고 있지. 스토리텔링에는 광택이 없다네. 하지만 그 자체가 고유한 금광이지.”
나는 손잡이가 달린 컵일까. 내 삶의 손잡이는 무엇이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것이 스포츠였고, 체육이었고, 글이었고, 영상이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누군가와 나를 연결해주는 'inter-'의 기능을 할 것이다. 이어령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가 그것을 열망하고 있지는 않았더라도 은연 중에 누군가가 손을 잡아주기를 바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일을 잘 하는 사람보다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을 더 동경한다. 언젠가 나만의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목표가 다시 한 번 떠올랐다.
“그래. 인간이 태어나서 사는 과정이 그래. 아기 때는 어머니 치맛자락 붙잡고 떨어지면 죽는 줄 알지. 그러다 대문 밖으로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친구들하고 정신 빼놓고 놀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지. 그러다 부르면 화들짝 놀라서 원위치로 가는 거야.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거라네.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잖아. 탄생의 그 자리로 가는 거라네. 그래서 내가 일관되게 얘기하는 것은 죽음은 어둠의 골짜기가 아니라는 거야. 까마귀 소리나 깜깜한 어둠이나 세계의 끝, 어스름 황혼이 아니지.”
80년 넘게 살았다고 해서 다 이어령 선생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아직 죽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진다고 해서, 누구나 다 저절로 이렇게 멋진 표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오면 저런 표현이 자연스럽게 술술 나오게 되는지 궁금하다. 내 자녀들에게 바로 이런 능력을 길러주고 싶다.
“신념에 기대 사는 건 시간 낭비라네. 말 그대로 거짓이야. 신념 속에 빠져 거짓 휴식을 취하지 말고, 변화무쌍한 진짜 세계로 나와야 하네. 여행자가 될 텐가, 승객이 될 텐가? 그것부터 결정해야지. 승객은 프로세스가 생략돼 있어. 비행기 타고 한숨 자고 나면 뉴욕이지. 신념을 가진 사람은 인생 프로세스를 생략한 사람이야. 목표만 완성하면 끝이지. 돈이 신념이다? 백만장자 되고 나면 어떻게 살 거야? 집 한 채 갖는 게 목표다? 집들이 하고 나면 허무해서 어떻게 살아? 프로세스! 집이 아니라 길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나. 나는 멈추지 않았네. 집에 정주하지 않고 끝없이 방황하고 떠돌아다녔어. 꿈이라고 하는 것은 꿈 자체에 있는 거라네. 역설적이지만, 꿈이 이루어지면 꿈에서 깨어나는 일밖에는 남지 않아. 그래서 돈키호테는 미쳐서 살았고 깨어나서 죽었다고 하잖나. 상식적인 사고로는 이해가 안 되는 헛소리일 수도 있어. 하하. 이런 역설을 모르면 인생 헛산 거라니까. 꿈이라는 건, 빨리 이루고 끝내는 게 아니야. 그걸 지속하는 거야. 꿈 깨면 죽는 거야. 내가 왜 남은 시간을 이렇게 쓰고 있겠나? 죽고 나서도 할 말을 남기는 사람과 죽기 전부터 할 말을 잃는 사람 중 어느 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인가? 유언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거라네.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네.”
꿈은 이루는 것도 아니고, 깨어서도 안 된다는 당부였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꿈을 꾸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실적이고 냉정하게 판단하여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이 어른이고 유능한 사람이라는 사회적 요구가 우세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고 싶다기보다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발버둥을 치는 아이로 남는 것이 더 행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승객이 아닌 여행자가 되고 싶다.
“그 차이가 뭔 줄 아나? 리빙과 라이프야. 의식주와 진선미지. 월급 더 많이 받고, 자식이 더 좋은 학교 가고…… 이게 목적이 되면 그건 리빙이야. 진선미에서 오는 기쁨이 없지. 그러니까 돈은 더 벌지 몰라도 인생이 내내 고된 거야. 진선미를 아는 사람은 밥을 굶어도 웃는다네. 공자가 그러지 않나.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에는 식사를 잊어버린다고. 자는 걸 잊고 먹는 걸 잊어. 의식주를 잊어버리는 거지. 그게 진선미의 세계고, 인간이 추구하는 ‘자기다움’의 세계야. 그게 아이덴티티거든. 자기 무늬의 교본은 자기 머리에 있어. 그걸 모르고 일평생 남이 시키는 일만 하다가 처자식 먹여 살리고, 죽을 때 되면 응급실에서 유언 한마디 못 하고 사라지는 삶…… 그게 인생이라면 너무 서글프지 않나? 한순간을 살아도 자기 무늬를 살게...(중략)...올림픽 때 내가 운동장에서 무엇을 보여줬나? 여섯 살짜리 한 아이가 자기 혼자 굴렁쇠를 굴리는 모습을 보여줬잖아. 굴렁쇠를 굴리면서 파란 잔디 위를 지나가잖아. 그게 노동인가? 놀이지. 이해할 수 있겠지? 내가 억만금을 줘도 단체로 흔들면서 신념을 전시하는 매스게임하고 그 놀이를 바꾸겠나? 절대로 안 바꿔. 그게 내 일생인 거야. 매스게임 하지 않고 굴렁쇠를 굴리며 산 삶. 그것을 좌와 우의 개념으로 보면 안 되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으로 보면 안 돼. 자본주의라도 노동은 재미없는 거야. 인생 그렇게 살면 노예 되는 거야. 노예는 사회주의에도 있고 자본주의에도 있어. 반대로 예술은 사회주의에서도 할 수 있고 자본주의에서도 할 수 있어. 단, 그러려면 자유의지가 있어야 하네. 길을 일탈해서 길 잃을 자유가 있어야 해. 그게 선이든 악이든 일단 나의 행위가 있어야 하는 거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인간은 신에 가까운 자유의지를 갖게 된 거야. 신이 그것을 허락한 거야. 신은 자유의지를 가져도 실수를 안 하는데, 인간은 실수할 수 있어. 악도 선도 행한다네. 그래서 선악과야. 그게 인간의 원죄인 거야. 그 모든 배경을 알고 이제는 자네가 답할 차례야.”
이 책의 저자가 이어령 선생과 대화하며 '재미'를 추구하는 삶에 대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놀이란 그런 것이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위해서 하기보다는 그냥 그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에 목적이 된다. 삶이 힘들면 여유가 없고, 삶 속에서 놀이를 하려는 성인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철없이 행동한다며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놀이를 할 줄 모르는 재미를 위해 행동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창의성을 기대하기란 어렵다는 이어령 선생의 이야기에 큰 공감이 된다. 꿈을 꾸며 재미를 쫒는 삶, 아이같은 모습을 잃지 않는 삶. 그 자체로 참 멋진 것 같다.
"에너미(enemy)는 안 돼. 라이벌(rival)이어야지. 라이벌의 어원이 리버(river)야. 강물을 사이에 두고 윗동네 아랫동네가 서로 사이가 나빠. 그런데도 같은 물을 먹잖아. 그 물이 마르고 독이 있으면 동네 사람이 다 죽으니, 미워도 협력을 해. 에너미는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살지만, 라이벌은 상대를 죽이면 나도 죽어. 상대가 있어야 내가 발전하지. 같이 있는 거야. 그게 디지로그 정신이야. 기업도 마찬가지라네. 대기업과 중소기업, 벤처는 에너미가 아니라 라이벌이야. 큰 조직은 작은 조직의 모험 정신을, 작은 조직은 큰 조직의 시스템을 배우며 수시로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해야 해. 이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 줄 아나? 인터페이스야. 위치로 보면 목! 분리하면서도 이어주는 목! 머리와 가슴을 잇는 목, 손과 팔을 잇는 손목, 발과 다리를 잇는 발목. 모든 국가, 모든 기업, 모든 개인은 이 '목'이 가장 중요해. 사람 꼼짝 못 하게 할 때 어떻게 하나? 목에 칼 씌우고, 손목에 수갑 채우고, 발목에 쇠고랑 채우지. 인터체인지를 묶는 거야. 우리 어릴 때 놀 때 어른들이 '사이좋게 놀아라' 그러잖아. 그 사이가 '목'이야. 디지로그와 생명자본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목이 막히지 않고, 사이가 편한 상태야. 반면 코로나는 문명과 자연의 사이가 나빠서 왔지. 이 나쁜 사이, 뭉친 목을 풀어줘야 세계가 잘 굴러간다는 얘길세. 그런 사람이 바로 21세기의 리더고 인재라네. 어느 조직이든 이쪽과 저쪽의 사이를 좋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조직은 망하지 않아. 개발부와 영업부, 두 부서를 오가며 서로의 요구와 불만을 살살 풀어주며 다리 놓는 사람, 그 사람이 인재고 리더야. 리더라면 그런 ‘사잇꾼’이 되어야 하네. 큰 소리 치고 이간질하는 ‘사기꾼’이 아니라 여기저기 오가며 함께 뛰는 ‘사잇꾼’이 돼야 해."
조직 생활을 하다보니, 실무 역량에 대한 평가와 인화력에 대한 신화적 기대감이 공존함을 느낀다. 둘 모두를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현실 속에서 완벽하게 모든 기대를 충족하는 인재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실무 역량보다는 인화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똑똑한 사람들이 가득한 조직을 경영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어령 선생이 표현한 '사잇꾼'이 가장 필요한 역량일 것 같다. 이 분야에 탁월한 분들은 대부분 타고난 것처럼 보였다. 나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영역처럼 느껴딘다. 무섭지만, 학교가 바로 그런 곳이다. 나는 사잇꾼이 될 수 있을까.
노년의 그는 딸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평생을 고민했던 철학적 문제에 대한 해답도 '영성'을 느낌으로서 해결한 모습이었다. 편안하게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모습에서 안정감도 느껴졌다. 멋지게 늙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