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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의진 Jan 19. 2022

문재인 이후의 교육

어렵지만, 가끔은 필요한 한 발 물러서서 학교를 바라보기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장학사가 되어 이른바 '교육 당국'의 일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흐름 속에 놓여 있는지 잘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가끔은 어렵고 재미없지만, 교육에 관한 거시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이런 맥락에서 읽게 되었다.




원격수업은 성공한 것인가


저자는 우리 나라의 원격수업을 성공적이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원격교육을 거의 모든 학생에게 제공하는 일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만큼 짧은 시간에 '보편적 원격교육'에 성공한 나라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원격수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정보통신 인프라의 질이 좋다는 문화적 배경이며, 둘째는 EBS, e학습터 등의 공적 플랫폼과 콘텐츠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우리나라 정보통신 인프라는 세계적으로 봐도 최고 수준이다. 집에 PC가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스마트폰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거의 모든 국민이 인터넷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선 인터넷 망도 그렇고 무선 인터넷 망의 속도와 질 역시 최고 수준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정보통신을 국민의 기본 권리로 여기면서 저소득층의 인터넷 활용을 위한 기기와 이용요금 등을 지원해 왔기 때문에, 원격수업의 국면에서도 플랫폼 자체에 원천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학생이 거의 없었다. 학교 교육을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여기는 문화적 배경 아래 교육부, 교육청, 지자체, 민간기업 등이 협력하여 30만대가 넘는 기기를 원격수업을 위해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대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교육 당국이 과감하게 전면적인 원격수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공적 플랫폼과 콘텐츠가 원격수업 성공의 기반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EBS라는 방송 채널을 통해 다양한 미디어로 콘텐츠를 전달할 수 있었으며,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이라는 정부산하 연구기관이 이미 운영하고 있던 '위두랑', 'e학습터' 등의 플랫폼을 즉시 활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민간 서비스에 비해 분명 부족한 부분은 있었지만, 공공이 확보하고 있는 플랫폼을 바탕으로 보완하고 확장하는 방식으로 제도적인 측면과의 연계도 가능했다.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그동안 EBS의 다양한 플랫폼 등에 축적된 수많은 콘텐츠를 활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요리사들에게 단순히 레시피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활용할 수 있는 냉동식품을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접속 장애 등이 있었지만, 엄청난 데이터 유통을 견딜 수 있는 시스템적 지원도 훌륭했다는 평가였다.


저자는 과거 사교육의 핵심이었고, 교육 당국자의 입장에서 정책을 설계하면서 다양한 현상들을 접하였고, 시민들의 여론과 정치적 논리가 어떻게 교육에 반영되는지를 경험했으며, 앞으로의 방향은 무엇인지 연구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저자가 논리적인 근거를 들며 원격수업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현장의 교사들, 학부모들의 시각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나 역시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고 싶다.


이미 90년대부터 언론에서는 '교실 붕괴', '교권 추락' 등의 단어를 사용하며 학교 현장의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해 왔다. 성인의 시각에서 우리네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교실에 앉아 있는 모든 학생이 하루 종일 수업에 집중하지는 않았다. 학교는 다양한 학생들이 모여 다양한 일들이 역동적으로 펼쳐진다는 사실을 누구나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학교에 학생이 등교하는 순간, 학생이 학교의 모든 교육활동에 집중하여 성공적인 학습을 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와 자녀의 실제 학교생활 간의 괴리를 확인할 기회는 많지 않다. 하지만, 원격수업 국면에서 자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되면서 받아들이기 힘든 측면이 많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녀의 학교생활을 결과적 차원에서 마주하다, 과정의 차원에서 마주했을 때의 이질감은 생각보다 더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학부모들이 학교교육의 의미를 돌아보며 앞으로 학교교육이 방향과 교수학습방법 등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대학입시라는 결과로만 귀결되는 현실에서, 과정 역시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발전적 논의에 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든다.


저자는 원격수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교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프로그램 콘텐츠'를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표현으로 '수업에서 숙제로, 강의에서 프로그램 콘텐츠로'를 이야기한다. 일방향적인 강의를 넘어선 실시간 쌍방향 교육만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학생 한 명 한 명에 맞는 개별화된 차원의 학습 활용성을 고려하여 설계된 일종의 모듈형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야기인 것 같아 기억을 더듬어보니, 서울특별시 교육청에서 지향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교실'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였다. 좌우를 막론하고 지난 십여 년 동안 수 많은 정치인들이 주장하던 바로 그 흐름이기도 하다.




교사이자 공무원이라는 이중성


저자는 교사를 교사답게 만들지 못하는 제도적 문제로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교원 인사 시스템의 문제로 인하여 교사들이 교육을 준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사의 자율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는 세부적인 국가교육과정의 존재다.


첫 번째 지적을 쉽게 풀어서 이야기하면, 교사가 3.1.자로 새로운 학교로 이동하게 되고, 같은 학교에 있다고 하더라고 2월 말이 되어서야 새로 맡게 되는 학년과 학급을 알 수 있게 되는 시스템으로 인하여 연구하고 준비할 물리적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나 역시 교사로서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교사들 역시 공감하고 있을 것이다. 저자의 지적이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저자의 문제의식처럼 교육의 논리보다는 행정의 논리에 의해 이렇게 운영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교원국가직 공무원이며,  시도 교육청에 소속되어 공무원으로서의 인사제도를 적용받고 있다. , 명확하고 안정적이며 예측가능한 법률과 지침에 따라 학교를 이동하며 담당하는 학생들이 결정되는 것이다. A라는 교사가 상대적으로 훌륭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학교에 다른 교사들보다  오랜 기간 머무는 것은 불가능하며, 반대로 B라는 교사의 역량이 다소 부족하게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교육 당국이 임의대로 학교를 이동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공무원의 인사라는 것이 너무나도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문구 하나 단어 하나를 바꾸는  역시 너무나도 어렵고 조심스럽다. 다만, 시도교육청 차원에서도 가능한 학교와 교사의 입장에서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저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2 초에 인사발령을 하고 2월에 '신학년도 집중 준비기간' 운영하도록 지원하는 중이다. 앞으로도 빠르지는 않겠지만 조금씩이나마 개선되어 가리라 믿는다.




교권의 핵심은 '교과서 자유발행제'


길게 살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인되거나 권위있는 표준(Standard, Reference, Official 등)을 좋아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우리보다 선진국이라고 여겨왔던 나라들의 사례를, 상대적으로 더 믿을 수 있는 기관의 연구 결과를, 국가에서 정의내린 개념 등을 표준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쉽게 말하면, 다른 대학교 교수의 주장보다는 서울대학교 교수의 주장을 신뢰하며, 지자체 산하 연구기관에서 정의한 개념보다는 국책 연구기관에서 정의한 개념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의 통일된 개념, 표준화된 제도와 시스템을 선호하는 것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분명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향이기 때문이다. 교육 현장 역시 마찬가지의 경향이 지배하는 것 같다. 서울의 강남구 소재 고등학교 수업 방식과 내용이 지방의 농촌 소재 고등학교 수업 방식과 내용과 동일해야 한다는 전제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원격수업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학부모들은 A교사가 담당하고 있는 내 자녀의 원격수업과 B교사가 담당하고 있는 다른 학생들의 수업이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코로나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동일 학교의 동일 학년이라면 동일한 교육과정과 평가기준에 따라 학업성취도가 결정되기 때문에, 학급별로 교과 수업 담당 교사가 다르다고 해서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수업의 다름'을 체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이 집에서 원격수업을 받는 모습을 온전하게 목격하는 과정에서 학부모들은 수업의 질을 적극적으로 비교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험적으로도, 원격수업 초기에 많은 학부모들이 개선을 요구했던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교사들 역시, A플랫폼을 활용하는 교사와 B플랫폼을 활용하는 교사가 서로 비교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도 있었고, 교육부 또는 교육청에서 전국적으로 동일한 플랫폼과 교수학습방법을 지정해 주기를 바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자율이라는 이름 하에 교사에게 고민과 선택, 그리고 이에 따른 연구의 고통을 강요하지 말라는 맥락의 이야기였다. 개인적으로도, 학부모들의 민원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제발 좀 동일한 플랫폼을 지정해 달라는 교사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다.


그런데, 저자는 바로 이 부분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 학교 교육이 국가 주도로 너무나도 세부적인 사항까지 규정해 두는 경향 때문에 교사의 '교권'이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국가교육과정은 대강화가 이루어져 교과별로 1~2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우리나라 국가교육과정은 너무나도 세부적인 부분까지 하나하나의 내용을 규정하고 있으며, 내용영역별로 세부적인 성취기준을 제시해주기까지 하기 때문에 교사의 자율성이 반영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수십년간 더욱 고도화되며 발전한 국가주도 교육과정 때문에 표준화된 교육의 질은 관리할 수 있었지만, 교사가 생각하지 않고 편안하게 주어진 것을 실행하기만 하도록 만드는 과오를 범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더욱 창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교육을 위한 교사들을 제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상징적인 대안은 '교과서 자유발행제'에 있다.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채택한 국가의 공통점은 교육과정의 대강화, 간소화(slimming)에 있으며, 이를 통하여 교사가 자율적으로 창의적인 전문성을 발휘하게 한다는 것이다. 교사에게 더욱 더 많은 권력(교육과정 재구성, 평가 등)을 주고, 이 과정에서의 시행착오를 적극적으로 보호해주며, 다양한 인센티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에 공감한다. 하지만, 이 책의 후반부에서 거론했듯이 공정과 공평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상대적인 경쟁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체육 교과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체육 교과 수업의 경우, 교실에서 수업하는 이해 중심의 교과와는 다르게 이미 수천년 전부터 교육과정 재구성이 일상화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예를 들면, 탁구 수업은 좁은 실내공간에서 할 수 있지만 축구 수업은 넓은 운동장이 필요하며, 한 학급 10명이 할 수 있는 스포츠 종목과 한 학급 40명이 할 수 있는 스포츠 종목은 다르다. 어떤 학교에는 체육관이 있지만 어떤 학교에는 실내 체육 공간이 없고, 어떤 학교는 운동장이 아주 좁지만 어떤 학교는 운동장이 넓다. 갑자기 비가 오면 야외에서 계획했던 수업을 할 수 없으며,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야외 활동이 금지되기도 한다. 따라서, 체육 교과 교육과정은 내용역역별로 하나의 신체활동을 지정하지 않고 선택의 범위를 다양하게 제시하며, 교과서 역시 선택적인 활용이 가능하도록 백화점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체육 교과 수업은 이러한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학교별로 학년별로 교사들의 협의에 의해 교육과정이 결정되고 운영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이십여년 동안 체육 수업의 질이 향상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최근 강조되고 있는 교육과정 재구성, 과정중심평가 등의 개념이 새롭게 다가오지 않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대학 입시와 큰 연관성이 없는 교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모든 교과에서 교사가 자율적으로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문화가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나라 학교교육(K-에듀)의 3대 성공 원칙


저자는 이른 바 'K-에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원칙은 '교사자율성'이다. 우리나라 교육 특유의 과잉표준화는 지양되어야 하며, 온라인 공간에서도 과잉표준화가 재현되면 교사의 역량과 자율성을 제약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공의 플랫폼을 발전시키되, 이를 '표준·독점' 플랫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보편적 교육 보장의 도구로서 공공 플랫폼을 고도화하고, 교사들이 자율적으로 다양한 플랫폼을 활용할 수 있도록 바우처를 지원하는 등의 방식을 장려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둘째 원칙은 '콘텐츠 다양성'이다. 학습은 배움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익힘과정이 수반되어야 하며, 익힘을 위한 전통적인 수단인 '숙제'를 활용하는 것을 넘어, '프로그램 콘텐츠'를 통해 익힘을 효과적으로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 교사들이 원하는 콘텐츠를 비용과 저작권의 제약 없이 활용할 수 있도록 '공급은 기업과 개인이, 수요결정은 교사와 학생이, 가격 결정과 지불은 정부가' 하는 방식으로 공공성과 시장원리를 조화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지향하고 있다.


세번째 원칙은 '보편적 접근권'이다. 2020년 3월 온라인 개학의 전격적인 결정과 더불어, 정부는 통신사와 협의하여 원격수업을 위한 사이트에 접속하는 경우 데이터를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동시에 정부, 지자체, 민간이 협력하여 31만6천대의 기기를 무상대여 방식으로 지원하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배경은 우리나라가 이미 저소득층 가정 13만3천명에게 이미 컴퓨터와 인터넷 통신비를 무상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격수업의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지원해야 하는 부분으로 드러난 것이, 학습을 할 수 있는 공간의 지원 측면이다. 학생이 제대로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바우처 지원 등의 다양한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K-에듀의 세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궁극적으로는 단위 학교의 경계를 넘는 온라인 학점제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교육부와 교육청의 입장에서 고교학점제의 전면적인 실시에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학생이 원하는 교과를 모두 개설할 수 없다는 부분이었다. 학생이 원하는 교과를 개설하는 방법적 측면에서, 서울특별시교육청 역시 공유캠퍼스 등 학교 간 협력 교육과정 운영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운영의 기술적 차원에서 현실적 제약이 있어 확산이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온라인 개학을 하고 전면적인 원격수업을 실시하며 모든 학교와 교사가 경험적 지식을 축적하게 되었다. 저자의 주장처럼 고교학점제의 전면적인 실시를 위한 환경적 준비가 된 것이다.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실천될지는 모르겠지만, 온라인 수업 운영 경험이 학교의 모습을 발전적으로 이끌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수능 vs 학종


나는 대입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위치에서 일을 하고 있고, 아직 수험생 학부모도 아니기 때문에 대입에 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교육문제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귀결되는 대입에 관련된 이야기이기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읽게 되었다. 저자는 전문가들이 제도를 만들고 국민들에게 교화하는 방식의 접근은 더 이상 좋은 방법이 아니며, 시민들의 가치관을 반영하여 제도를 결정하는 것이 정당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내신성적을 상대평가로 산출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상대평가는 교육적 부정성과 함께 '균등 선발 효과'라는 정치적 정당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내신성적 상대평가는 비례성에 근거한 결과적 형평성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에 지지받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대중이 자율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 자율이 개인의 자율이 아닌 권력체(대학·고교)의 자율이며, 자신들이 끌려갈 수 밖에 없다고 인식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학종은 분명 학교 현장을 보다 교육적으로 변화하는 효과도 분명히 가지고 있다. 수능의 타당성은 두번 말 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수능도 논술도 내신도 모두 나름대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육적으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동시에 여러가지를 반영했기 때문에 부담을 키우고 사교육을 자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더하기 개혁이 아니라 빼기 개혁이며, 좋은 제도가 이상적으로 실현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사람들의 잘못된 욕망적인 태도 때문이라는 접근은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학무보들이 학종을 싫어하는 이유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교육은 교육만의 문제가 아닌, 정치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솔직히 말해서, 장학사로서 교육지원청에서 경험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입수학능력시험'이라는 시스템은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제도의 취지와 타당성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스템의 운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입수학능력시험 제도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놀랍고도 치밀하게 체계적으로 국가적인 역량을 총동원하여 구현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업무담당 장학사도 아닌 옆에서 지원하기만 하는 장학사가 보기에도, 이 시스템은 정말 엄청나다. 말 할 수 없는 부분이 워낙 많아서 표현하기 어렵지만, 정말 엄청난 시스템이 맞다. 지금과 같이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야만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면, 1년에 수능을 여러 차례 치르자는 의견에 두 손 두 발 모두 들고 반대할 수밖에 없다. 시스템의 사용자 입장에서 왜 수능은 이렇게 해 주는데, 다른 시험은 그렇게 운영 못하느냐는 사람들의 불만에 공감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마도 지구상에 현재의 수능처럼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여 만들어낸 시험은 없지 않을까 감히 이야기하고 싶다.   


운영자 측면의 푸념과는 별개로, 반대로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수능 시험이라는 시스템은 신뢰도가 높은 것이 분명하다. 국가 주도의 표준화된 시스템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하는 것이겠지만, 교육지원청에서 수능이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경험해 봤기에 그 신뢰도는 더 커졌다. 운영 측면에서 개선해야 될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정도로 체계적인 시스템이라면 당연히 믿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경험적 이야기처럼, 궁극적으로는 절대평가로 자격고사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공감한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우리나라의 수능 시험은 문제의 질이나 운영의 체계성 등 모든 측면에서 정말 훌륭한 시스템이라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물론, 이게 좋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하면서 운영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남는다. 좁은 식견의 내 주제에 결론을 내리기에는 정말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학벌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우리나라의 학벌주의를 대입서열화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정리한다. 경쟁은 시험을 통한 변별이나 학생 서열화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의 격차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대입 경쟁이 극심한 이유는, 대학입학 결과에 따라 결정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대입 경쟁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입 결과에 따라 얻게되는 것들의 차이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대학 서열화의 원인으로 다섯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 대학 서열화의 원인  >>
1. 교육여건: 학생 1인당 투입 교육비, 학생대 교수 비율, 교육 프로그램의 질과 수준 등
2. 후광효과: 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대학의 사회적 평판에 의한 영향
3. 네트워크효과: 동문 인맥으로 인한 사회적 유·불리
4. 지리적위치: 서울에 소재한 이른바 인서울 대학이 선호됨
5. 동료효과: 재학 중 소속 집단에 의한 영향, 이른 바 '또래효과'


저자는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여건'이라고 이야기한다. 학생 1인당 투입 교육비를 기준으로 대학을 나열하면,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대학의 서열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UNIST, GIST 등의 신생 대학교가 단시간에 학생들이 선호하는 이른바 상위권 대학으로 자리잡게 된 사례를 제시한다. 학생들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를 약속한 학교를 학생들이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 기억을 더듬어 봐도, IMF 시절에 4년 장학금을 보장하는 학교의 선호도가 일시적으로 급격하게 올라갔던 것을 분명하게 기억한다. 교육 당국의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접근하여 대입 경쟁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적 효용성 차원에서도 저자의 의견에 공감하게 된다.


'학벌주의'의 성립 과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제시대 때부터 이미 교육여건에 따른 대학 서열화는 존재했다. 우리나라 특유의 관 선호 현상과 고시제도는 대학 서열화와 맞물려 정부의 학벌을 만들어 냈으며, 이것이 정부 주도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민간의 학벌로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대입서열화에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학벌주의가 완화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사회경제의 주도권이 국가에서 민간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이어졌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학벌주의가 대학 서열화와 경쟁을 가져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갈라파고스 교육학'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며, 이러한 태도 때문에 경쟁의 원인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 결과의 격차를 줄이겠다는 접근 없이, 시험과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학종에서의 교과 경쟁을 비교과로 확산시킨 주범이 바로 이런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출세경쟁에서 공포경쟁으로


저자는 과거의 교육 경쟁이 '출세경쟁' 즉 더 잘되기 위한 경쟁이었다면, 지금의 교육 경쟁은 공포에서 멀어지기 위한 '공포경쟁'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것은 개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게 혼재되어 있다고도 했다. 한국 대입 제도에서 유난히 '변별력'이 중요한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과의 격차가 워낙 큰 만큼,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인 변별력을 요구하게 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공정에 대한 요구를 차별이나 혐오로 환원하는 태도는 구조의 문제를 도덕의 문제로 치환하는 심각한 오류이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명문대 졸업장의 가치가 낮아지고 스펙의 가치가 낮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불안감이 줄어들지 않고 있는 이유는, 좋은 일자리와 그렇지 않은 일자리의 양극화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헬조선'이라는 말도 생활 수준이 과거보다 나빠졌기 때문에 생긴 말이 아니라, '미래에는 형편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기 어렵게 되어 생긴 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탈스펙과 양극화는 동시에 나타나고 있지만, 그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계층은 구분된다. 상위 25%에서는 탈스펙 현상과 동시에 전문성이 중요해지고 있다. 이 계층에서는 지금도 공포경쟁보다는 출세경쟁이 계속되고 있다. 반면, 양극화로 인하여 하위 계층의 공포경쟁은 더욱 심화된다. 격차를 좁히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지위가 공정하게 배분되도록 요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이른바 '공정 신드롬'은 '큰 격차'와 '좁아진 사다리'의 결합이 만들어낸 산물인 것이다.


이 책은 이 밖에도 기초학력, 혁신학교, 고교평준화, 대학의 상향 평준화 등의 문제를 연구결과와 통계자료 등을 근거로 제시하며 가능한 객관적으로 풀어내려 노력하고 있다. 내가 느끼기에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은 교육문제에룰 해결하기 위해서는 '철학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에서의 접근'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제도적인 차원에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저자는 나를 포함한 교육 당국자들에게 아무리 취지가 좋은 제도라고 할지라도 이에 따른 현상을 통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두 시간이 넘는 TV 토론 프로그램을 시청한 느낌이 들었다. 주제도 무겁고 재미없을 뿐더러, 그 내용도 답답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필요한 이야기인 것은 맞는데 직접 관여하고 싶지는 않은, 전문가들이 알아서 잘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바로 교육 당국에 소속된 사람이었다. 현재 내가 담당하고 있는 업무와 세부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는 않지만, 교육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큰 흐름 속에 놓여있기 때문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주제였다. 아직 내공도 부족하고 역량도 부족하여 잘은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느끼기에는 분명 교육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껴진다. 업의 무게감이 더 크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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