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에게 닿기를 Apr 23. 2021

예의있게 사람을 망가뜨리는 법

2019년 어느 연말의 지극히 개인적인이야기

'수고했어'

연인과 헤어짐을 전했을 때 내 친구 S는 이렇게 말했다. 아닌척했어도 이번 연애에 내 마음을 많이 쏟아부었더랬다. 노력이 부족했던 건지, 원래 맞지 않는 옷이었던 사람이었는진 모르겠지만 그와의 연애는 마지막 20대의 기억으로 남게 됐다. 


이별 한 지 약 2주가 지났다. 그는 내게 '이렇게 감정적으로 힘든 게 연애라면 감당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의 입에서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담담했다. 더 이상 상처 받을 필요도 없을 만큼 내 마음도 지쳐있었다. 솔직하다는 미명 하에 관계를 흔드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버리는 그 사람이 미웠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그 사람의 세계에 나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본다. 그 사람은 내가 자신의 일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몸서리 칠 만큼 싫어했던 것 같기도 하다. 


늘 긍정적인 영향을 줬으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다. 싸움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 사람의 취향을 나름 존중한답시고 내 마음을 눌렀지만, 결국 예상치 못한 순간에 터져 나오는 건 어쩔 수 없겠더라. 연애의 행복한 모습만을 취하고 싶어 하는 그 사람에게 난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나 자체를 사랑했다면 그 입에서 절대 '사랑 타령할 시간이 없다' 따위의 말이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극도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피알(PR) 욕구도 남들보다 강했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번지르르한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정말 이 사람이 날 많이 사랑하는구나 착각이 들만큼 말도 잘했다. 다툼이 있을 땐 그는 내가 늘 잘 못해서 이 관계가 망가지고 있다고 생각 들게 만들었다. 난 그 사람에게 싸움을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였다. 내가 속상한 원인엔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에게 내 감정은 '고작 그런 이유'로 축소되곤 했다. 반대로 내가 내 생각을 전하며 반박하면 '결국 다 내 탓이라는 거네?'라며 모든 내 논리를 무너뜨렸다. 


자신이 사랑하는 방법은 성숙한 어른의 연애라고 말했다. 내가 하는 사랑은 고등학생들이나 할 법한 사랑이라고 했다. 그는 한번 더 생각하고 배려하고, 최대한 긍정적인 마인드로 화내지 않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다 맞는 말이라,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다. 그야말로 이성적이고 교과서적인 사랑의 모습이다. 글쎄 그의 말대로 내가 부족한 사람이었는지 몰라도, 나는 질투하고 사랑하고 행복하고 때론 의심도 하는 그냥 보통의 사람이다. 누구나 사랑을 할 때는 비이성적이 된다. 물론 폭력을 행사하거나 욕설을 허용할 수 있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의 사랑 방식은 날 숨 막히게 했다. 감정의 교류는 이때부터 막혔다. 슬프고 행복한, 행복한데 슬픈 그런 복합적인 감정들을 그와 공유하기 힘들었다. 내 감정은 '내' 감정, 당신의 감정은 '당신'것이라는 걸 나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선들은 '저 사람은 절대 날 이해해줄 수 없을 것'이라는 문장으로 정의됐다. 사랑이 스미기도 전에 그가 말하는 수많은 선들이 그와 나를 구분 지었다. 선을 넘으면 사랑받지 못했다. 그가 생각하는 선을 넘는 날은 내가 버려지는 날이 되곤 했다.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딱지와 함께. 


나는 정형화된 방법으로 내 감정을 전달하려 노력해야 했다. 심지어는 내가 극도로 감정이 격한 상태에서도 그는 내용보다 폼(form)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맞다, 그는 사실 애인이면서도 완벽한 타인이기에 그가 수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마음을 전한다면 훨씬 더 좋겠지. 모르지 않는다. 잘 안된다. 그의 말이 맞다. 다독인다. 답답하다. 그래, 그의 말이 맞다. 노력했다. 감정은 사라졌다. 인정받지 못했다. 공감받지 못했다. 그래도 그의 말이 맞다. 숨 막혔다. 화가 났다. 내 마음을 말하지 않게 됐다. 어파치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니, 내가 끙끙 앓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가 내 마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답답해했지만, 그걸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아쉬운 소리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너를 만나면서 딱 3번 울었다. 연애하면서 그렇게까지 많이 울었던 적 없다. 그냥 서러움이 밀려와서, 하염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경험을, 널 만나면서 했다. 물론 많이 좋아했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다. 너보다 더 많이 좋아했던 사람 앞에서도 그렇게 서럽게 울진 않았다. 이 사랑을 지키고 싶은데, 이 연애를, 너를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것이란 직감을 했던 것 같다. 


식었다. 내 마음도. 직감적으로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관계는 끝이라는 것을. 수고했다는 친구의 말이 마음속에서 울릴 만큼 최선을 다했다. 그는 말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도처에 있는데, 당신이 보지 않는 것"이라고. 아니, "당신을 버릴 이유가 도처에 깔려 있었지만, 사랑했기에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간 연애했던 남자 중에 제일 나쁜 놈이 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거짓말했던 사람, 눈치 없었던 사람, 날 화가 나서 미치게 했던 사람, 잠수 이별했던 사람 등등 수많은 '거지' 같은 놈들이 있었지만 그중 제일이다. 강요가 아닌 듯 강요하는 사람. 나 자신을 작아지게 만드는 사람. 나 스스로를 별로라고 여기게 만드는 사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습관이나 삶의 방식을 좋지 않은 것으로 치부했던 사람. 그러면서도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그렇게도 고결하고 완벽한 것임을 끊임없이 어필했던 사람.


넌 정말 예의 있게 사람을 망가뜨린다. 세상 가장 부드러운 투로 했던 말들, 그 온도는 영하 천도쯤 되는 것 같다. 본인의 생각 속에 있는 것들은 뜨거웠지만, 나는 뜨거운 그의 마음을 받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날 너는 다시 한번 말했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연애는 감당할 수 없다'라고. 감정을 동요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도 모르고. 사랑 앞에 겸손하지 못한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내가 이별의 순간 너에게 한 마지막 말이다. 내 곁에서 파도치는 감정에 피로를 느껴 홀로 있고 싶다는 너에게 할 말이 없었다. 


작가의 이전글 이별에 다른 약은 없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