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식사가 내일 날씨를 정한다면

육식과 기후위기, '선택'하는 삶에 대해-영화<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

by 사하

감각이 바뀌는 순간이 있다.

지겹던 공간이 그리워지거나 이해되지 않던 노래가 절실히 와닿는 순간, 좋아하던 사람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아름답던 것이 추해 보이는 순간들. 그런 순간 우리는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전에는 몰랐던 것을 이제는 알게 되어, 보이지 않던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감각을 바꾸는 이러한 ‘앎’은 수학 공식이나 영어 단어 암기와는 다르다. 단순한 지식의 획득이 아닌 새로운 세계관의 체득이기 때문에, 한 번 ‘앎’의 경계를 넘어서면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란 쉽지 않다. 얼마 전, 나는 내가 그 경계 하나를 넘어섰다는 걸 실감했다. ‘하늘에서 음식이 내리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면서 말이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은 2009년 막 개봉했을 적 상당한 인기를 몰았다. 놀이터가 질린 아이들이 보호자와 함께 영화관을 찾았고 나의 가족 역시 그 무리 중 하나였다. 세세한 장면은 기억에서 휘발되었으나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남아있는 감상은 분명했다. ‘먹고 싶다’ 그리고 ‘좋겠다.’ 원하는 음식이 무한 리필로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설정과 먹음직스러운 그래픽 이미지는 어린 나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11년이 흘러 다시 영화를 봤을 때 내게 남아있는 감각은 그때완 판이했다. 내가 영화에서 다시금 느낀 것은 ‘역겨움’, 그리고 ‘공포감’이었다.


common.jpg 영화 중 한 장면. 닭다리 비가 내리는 모습.

당연하지만 영화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발명가 ‘플린트’가 물을 음식으로 변환시키는 ‘슈퍼음식복제기’를 하늘로 날려버린 뒤 온갖 음식들이 비처럼 쏟아진다는 줄거리는 동일했다. 집채만 한 스테이크와 샛노란 치즈 호수에 고개를 파묻은 캐릭터들의 황홀한 표정도 그대로였다. 기계의 오작동으로 음식 재난 사태를 맞이한 도시를 플린트가 구한다는 결말도 변함이 없었다. 오로지 영화를 보는 나의 감각만 달라져 있었고 다시 말해 나는 11년 전에는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의 식사가 내일의 날씨를 결정한다는 생각이 그저 상상이 아님을, 음식을 향한 욕망이 기후 재난으로 번진 영화의 비극은 바로 지금의 우리가 맞이한 현실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크기변환_축산.jpg 미국의 공장식 축산업 모습. 미국은 공장 시설에 사는 동물이 99%다. 구글에 '공장식 축산'을 검색하면 보다 사실에 가까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출처: 프레시안.

음식과 날씨를 연결시키는 거대한 고리는 ‘육식’이다. 영화에서 플린트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기계에 입력하는데 이는 전부 육식이다. 햄버거, 미트볼 스파게티, 연어스테이크는 동물을 죽여야 먹을 수 있고 빵, 아이스크림, 치즈는 닭이 낳은 알과 젖소의 몸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영화에서는 물 분자만 있으면 음식 제조가 가능했지만, 현실의 우리는 햄버거와 스파게티, 스테이크를 먹기 위해 매년 600억 이상의 동물을 죽인다.(수생동물의 경우 그 수가 방대해 측정조차 불가능하다.)


그 아득한 수의 동물들은 죽기 전까지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공장에서 살고, 공장을 짓고 사료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숲을 베고 토지를 갈아버린다. 육류와 유제품 산업에 필요한 땅의 면적은 북미와 남미를 합친 크기. 그 크기만큼 나무는 줄어들고 탄소배출은 늘어난다. 그 결과 미친 듯이 비가 쏟아지고 눈이 내리고 땅이 흔들리고 산이 무너지며 다시, 동물들이 죽는다. 이번엔 그 동물에 사람도 포함이다. 어제 먹은 음식에 깔려 죽을 위기에 처한 영화 속 캐릭터처럼 오늘 우리가 즐겁게 먹은 식사가 그렇게 거대한 불운으로 다가온다.


e502e3d1-1181-447a-85dc-552547f92f17.jpg 벌목된 아마존 땅. 아마존 땅 벌목의 91%는 축산업 때문이다. 출처: 중앙일보.

이 모든 ‘재난’은 미래의 일도 허구의 망상도 아닌 눈앞에 치달은 현실이지만 우리는 이를 감각하지 못한다. 당연하다. 알지 못하니까, 배우지 않으니까 감각할 수도 없다. 영화에서 플린트는 도시에 쌓여가는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멀리 날려’라는 발명품을 만든다. 그는 누구도 쓰레기가 쌓여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도록 문제를 눈앞에서 ‘치워버린다.’ 플린트의 문제 해결 방식처럼 ‘식사’와 ‘기후’ 사이에는 의도적이고 치명적인 ‘단절’이 있다. 그 간극을 인간은 고기를 먹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근거 없는 속설이*, 기후 위기는 먼 미래의 일이라는 무책임한 무지가 채워가며 우리는 우리의 파멸에 가뿐히 힘을 보태고 있다.

*육식 위주의 식사에 박차를 가한 공장식 축산업은 1960년에 발명되었다. 인간이 육식을 주식으로 한지는 고작 6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뿐더러, 육식은 우리가 필요한 열량은 단 18%만 제공한다. 나머지 82%는 식물에서 얻어진다.


그 단절을 다시 메우기 위해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내가 스크린 속 거대한 스테이크를 더 이상 ‘맛있게’ 느끼지 못하고 흥미로웠던 영화의 전개에 공포를 느낀 것은 음식을 생명으로, 식사를 기후로 연결시키는 ‘앎’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 번 알고 나면, 무엇을 맛있다고 느끼고 어떤 문제를 중요하다고 느낄 것인지에 대한 ‘감각’이 형성되고 나면 그 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존재임을. 무엇을 먹고 어떤 미래로 나아갈 것인지를 우리의 의식 속에서 선택할 수 있고, 바라는 그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믿게 된다.


221E193752DCE61319.jpg 영화 중 한 장면.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음식복제기계를 만들었던 플린트는 결국 거대한 재앙으로 되돌아온 자신의 발명품과 마주한다. 파멸로 나아가는 도시를 보며 플린트는 좌절하지만, 끝에는 목숨을 걸고 하늘로 올라가 제 손으로 기계를 파괴한다. 플린트처럼 필사적인 결단까지는 아니더라도, 망가져가는 세상을 조금이나마 붙들어보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한 끼만이라도 육식을 줄이고 플라스틱을 줄이고 소비를 줄이면서 조금씩 파멸에서 멀어지고자 애쓰는 사람들. 최악의 최악으로 치닫는 중에도 에이씨, 하고 기어코 그 반대 반향으로 몸을 트는 사람들. 미련하지만 강인한 그 마음들을 헤아리면서 내일 식사 메뉴를 생각한다. 오늘의 식사가 내일의 맑음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참고

이슬아, <식습관이 날씨를 바꾼다>, 경향신문.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3150300105

그레타 툰베리의 메시지: https://www.youtube.com/watch?v=v5A8X2lVNG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