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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하 Nov 25. 2023

사랑하는 당신에게

영화 <너와 나>(The Dream Songs, 2023)

*영화의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서른한 명의 구독자님. 그리고 누구든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오랜만입니다. 늦봄의 한기가 남아있던 올초 마지막 편지를 쓴 기억이 나건만 이제는 다시 겨울이네요. 감기가 전성기를 누리는 계절이니 몸도 마음도 따뜻이 덥히는 일에 전력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뜸했던 시간을 무마하려 낯간지러운 제목을 지은 것은 아니고요.(약간의 아부 효과를 노리긴 했습니다.) 소개하고 싶은 영화가 있거든요. 지난달 개봉한 조현철 감독의 작품 <너와 나>인데요. 오늘은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을 함께 이해해보려고 합니다.


교실에 앉아있는 세미(박혜수 배우) 

이야기는 왁자한 고등학교 교실을 풍경으로 시작됩니다. 교복을 입고 저마다 무리 지어 재잘대는 아이들은 모두 은근히 들떠 보이는데요. 바로 다음날 수학여행을 떠나기 때문이죠.


하지만 창가 자리에서 자다가 깨어난 '세미'의 얼굴만은 기뻐 보이지 않아요. 세미는 왜인지 흐른 눈물을 멍하니 닦아내고는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조퇴를 하겠다며 떼를 씁니다. 이상한 꿈을 꿨는데, 그게 친구 '하은'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징조 같다면서 말이죠. 하은은 자전거에 부딪쳐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입원한 상태였는데요. 세미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는 선생님의 엄포에도 굴하지 않고 무단조퇴를 감행해 하은의 병실로 향합니다.


서론만으로도 짐작하듯 하은을 향한 세미의 마음은 조금 유난스러운데요. 세미는 수학여행 참가비를 병원비로 써버린 하은을 위해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무지개다리를 건넌 하은의 반려견 이야기를 들으며 울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그뿐만인가요. 세미는 하은과 친해 보이는 모든 사람을 주시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하은과 다툰 뒤 노래방에서 절절한 이별 노래를 부르며 울기도 합니다.


참 우습고 유치하죠? 세미가 이토록 우습고 유치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는 알고 있어요. 누군가를 너무 아껴서 그만 두려워지는 마음, 그의 전부를 알고 싶고 갖고 싶은 마음, 그와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니까요. 세미는 하은을 사랑합니다. 이 단순 명료한 진실이 영화의 코어(core)를 이루고 있죠.


얘기를 나누고 있는 세미(왼쪽)와 하은(오른쪽, 김시은 배우)

하지만 영화가 세미의 사랑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어째 복잡 미묘합니다. 영화의 말미에서 세미는 연락이 끊어진 하은을 찾아 헤매다, 느닷없이 실종 전단지에 본 강아지를 발견하는데요. 심지어 하은이 나타났는데도 그를 지나쳐 강아지를 쫓아갑니다. 강아지를 되찾아준 세미와 하은에게 반려인은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마음이 얼마나 애달팠는지 들려줘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세미는 하은에게 오전에 꾼 꿈에 대해 고백합니다. 세미는 울면서 말해요. 꿈에서 수학여행에 다녀왔더니 동네에는 아무도 없고 네가 죽어있었다고. 그런데 어느 순간 죽은 네 얼굴은 다른 친구들이 되고, 선생님이 되고, 엄마와 아빠가 되고, 내가 되었다고.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었다고.


그 고백의 순간, 문득 꿈결처럼 시간이 뒤엉키고 영화는 버스에 홀로 앉은 하은을 보여주는데요. 라디오에서는 무감한 목소리로 이러한 단어들이 흘러나옵니다. 팽목항, 실종자 수색 중단. 세미와 함께였던 자리에 혼자 남은 하은은 조용히 무너져 울죠. 그제야 관객들은 깨닫습니다. 세미와 친구들이 뛰어다니던 안산역, 그들이 곧 떠나게 될 수학여행의 의미가 무엇인지요. 그렇게 영화는 귀엽고 유치한 사랑 이야기만이 아닌 아픈 결말이 정해진 이별 이야기가 됩니다.


버스에 앉아있는 하은

영화가 현실의 시간을 따른다면 남겨진 하은의 모습에서 결말을 맺어야겠지만요. 영화는 영화의 시간을 따라 세미에게로 되돌아옵니다. 하은과 솔직한 마음을 주고받은 후 귀가한 세미는 엄마, 아빠와 투닥거리며 국수를 배불리 먹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반려 앵무새 '조이'에게 연거푸 속삭여요. 사랑해, 사랑해. 그 한 마디가 한참을 메아리치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저는 영화 밖의 현실을, 해피엔딩이라 말할 수 없는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요? 처음엔 결말이 잘 이해되지 않더라고요. 영화가 세미의 입을 통해 전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와닿지 않아서, 엔딩 크레딧이 전부 올라갈 때까지도 어리둥절하고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영화를 본 날에 친구들을 만났거든요. 제가 무척이나 아끼는 귀하디 귀한 친구들인데요. 영화는 잠시 잊고 그들과 어둑한 밤까지 놀고서, 작고 말랑한 몸을 서로 안아주며 지하철 개찰구 앞에서 헤어졌어요. 친구들의 동그란 뒤통수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 돌아서는데 덜컥, 영화에서 본 얼굴들이 떠오르더라고요. 수학여행 잘 다녀오라고 질릴 때까지 손을 흔들던 하은, 얄밉게 구는 딸을 타박하면서도 국수를 거듭 그릇에 덜어주던 세미의 엄마, 별것 아닌 일로 무섭게 다투다 금세 어깨를 맞붙이고 키득대던 세미의 친구들 그리고 세미의 얼굴까지도요.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친구들의 얼굴이, 영화 속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세미가 꿨던 꿈처럼요.


세미에게 손을 흔드는 하은

재난 참사 유가족들을 만나온 정혜윤 피디는 책 <삶의 발명>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유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구해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많은 유가족들의 편지는 '한 사람'에서 시작해 '모든 사람'으로 끝나는데요. 올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 9주기 때 단원고 2학년 6반 이영만 학생의 형 이영수 씨는 동생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 형은 모두가 조금은 알아줬으면 한다. 이례적인 일은 사실 언제나 이례적이지 않다는 걸. 너희를 보내고 남은 우리가 해온 건, 슬픔의 강요가 아니라는 걸. 너희의 죽음만 특별하게 기억하려는 게 아니라, 반대로 모든 죽음이 위로받을 일이고 모든 생명이 귀함을 알아주길 원했다는 걸. 나라는 언제나 사람들의 삶과 안전을 담보로 서 있다는 걸. 그리고 대규모 참사는 그 약속에 뚫린 큰 구멍을 보여주는 일이란 걸. 여기에 ‘놀러 가서 죽었는데’ ‘적당히 해야 하는데’ 같은 말은 들어올 자리가 없다는 걸.”


너를 너무 사랑해서 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생을 지키고 싶어졌다는 고백, 그 지극한 사랑의 편지는 올해도 쓰였습니다.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식에서도, 오송 궁평 지하차도 참사의 합동분향소에서도, 서이초등학교 앞에서도, 해병대에서도, 또 수많은 일터에서도. 그것이 무참하고 무력한 결말을 담은 절망의 편지가 아닌 사랑의 편지임을 생각하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한 문장 안에 담긴 말 없는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화의 끝에서 울려 퍼지는 "사랑해"라는 한 마디가 어쩐지 관객을 향해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이유도 말이죠.


고로 오늘의 편지는 지금껏 쓰인 수많은 사랑 편지에 대한 답장이자 제가 사랑하는 얼굴들에 이름 모를 당신을 덧입히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늦은 안부이지만, 소중한 사람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손을 흔드는 마음으로 전합니다.


모두 잘 있으셨나요? 저는 잘 있습니다.


2023.11.23. 사하 보냄.






*“유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구해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삶도 죽음도 무의미하지 않기를 바라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중략) 그러기에 이것이 많은 유족들이 반복적으로 하는 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한 문장 안에 담긴 말 없는 말이다.” 정혜윤, <삶의 발명>(2023, 위고) 중.


https://blog.naver.com/joomincenter/223076236745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1101457.html

https://www.newsclaim.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21764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73209

https://www.inews365.com/mobile/article.html?no=77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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