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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나 Aug 31. 2022

나는 왜 요가수련을 하는가

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이 동작을 하느라 애를 쓰는가?"


이 고민은 불현듯 내게 다가왔다. 요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된 지 2년 하고도 4개월이 지난 시점에, 요가를 수련한 지 3년 하고도 6개월이 지난 이 시점에 말이다.


왜 존중받는 숱한 선생님들이 몸을 혹사시키는 요가를 떠나서 점차 치유와 순환의 요가를 찾아나서는지, 왜 그들은 요가라는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만의 답을 발견하고 정립해왔는지, 그리고 점점 아사나 자체를 완성해내기보다 지식적인 채움과 나눔의 길로 들어서는지 이제야 알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도대체 왜 이 자세를 만들어내기 위해 끙끙대고 있을까? 단순히 집중의 상태로 또는 명상의 상태로 들어가기 위해서? 하고 나면 어깨가 저릿하고 요추가 뻐근하게 굳어진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면서? 몸이 건강해졌다는 기분보다 요가 자세를 좀더 잘 수행할 수 있는 몸으로 나아갔다는 기분을 느끼면서?


여러 스승님들이 종종 말씀하시는, 아사나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라, 라는 말을 이전의 나는 이해한다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사나의 목적을 '좀더 고차원적이고 영적인 명상 상태로 진입하기 위해서, 여러 힘든 동작들 속에서 생각과 감정을 가라앉히고 호흡을 조절하고 의식을 현재에 머물도록 함으로써 명상을 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 또는 좀 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신체를 얻기 위해서' 라고 생각했다. 물론 요가는 다른 운동에 비해 확실히 신체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수련을 오래 할수록,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요가를 안내할수록 더더욱 이 몸과 마음의 건강함이 실감이 된다.


하지만 수련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그 이상의 단계를 원하게 되면서 내가 자연스럽게 몸의 통증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수련은 강도 높게 하면서 대신 통증을 피하기 위해서 단지 조금 더 섬세하게 몸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는 몸에 대한 인지력을 높이고, 안전한 움직임의 방향으로 접근해나간다는 점에서는 꽤 유용했다. 하지만 내 몸은 늘 실험도구가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아무리 나의 신체구조에 적절한 방향으로 몸을 사용해나간다 해도 늘 깊은 후굴이나 전굴 자세에서 또는 상당량의 힘을 필요로 하는 자세에서 나의 고관절과 어깨, 그리고 허리를 지킬 수는 없었다. 수련 후 기분 좋은 시원함이 아닌, 긴장된 경미한 통증이 남아있을 때가 점점 잦아졌다.



요가 프라하와의 만남


그리고 이 근본적인 의문을 일깨워준 결정적 계기가 요가프라하였다. 요가프라하는 기존에 신체를 개별적 부위로 나눠 다루던 구조적 접근과는 반대로 몸 전체가 유기적으로 협응하도록 하는 기능적 접근으로서 인체의 신경학적인 움직임을 살핀다. 인간이 네발로 걷는 유인원에서 현재 이족직립보행을 하는 존재로 오기까지의 발달과정을 토대로 완전호흡이 이뤄지는 유기적이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탐구한다. '자연스러운 상태'를 잘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기의 발달과정이다. 경추의 전만, 흉추의 후만, 그리고 요추의 전만은 본래 타고난 것이다. 그렇기에 프라하는 평소에 잘못된 습관으로 생활하거나 또는 구조적 접근으로 몸을 대하면서 조금씩 부자연스러워진 신체를, 기능을 통해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데 방점이 있다.


완전호흡


가슴을 내민다고 해서 숨이 더 잘 쉬어지는 게 아니었다. 어깨와 등은 조금 말려있는게 자연스러운 건데, 이를 억지로 젖히고 펴야만 편한 상태가 되는 게 아니었다. 턱 끝을 당긴다고 해서 뒷목이 길어지고 거북목이 교정되거나 척추가 편안해지는 게 아니었다. 대신에 턱 끝을 살짝 치켜들고, 앞으로 나왔던 흉골을 들이고, 등이 부드러운 후만곡을 그리도록 자유롭게 놓아주니, 온 몸에서 숨이 순환되는 게 느껴졌다. 몸 전체 근육이 이 숨에 협응됨이 느껴졌다. 이렇게도 호흡을 할 수 있구나, 이게 바로 완전호흡이구나를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척추의 자연스러운 만곡에 대한 인지력이 높아졌다. 그리고 이는 수련 도중에 과한 후굴 자세를 하거나 어깨를 열어내는 동작을 할 때 특히 불편한 감정으로 연결됐다. 평소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통증의 감각들이 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정말 내 몸에 편한 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러운 게 무엇인지를 느끼고 나니 기존 내가 몸을 혹사시키던 그 수련의 목적이 도대체 무엇이냐에 대한 의문이 남았다.



요가에는 정답이 없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요가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몸을 다루는 것에 대한 수많은 이론이 있고, 그곳엔 소위 '대가'라고 불리는 존경 받는 선생님들과 이를 따르는 제자들이 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몸의 신비를 파헤치기 위한 여정에 있고, 누가 이게 정답이다, 라고 칭하고 있지도 않다. 나는 나만의 정답을 찾기 위해서 그만큼 많은 시간을 연구와 배움에 할애해야하며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해야한다. 나의 몸에는 적합할 수 있어도 나와 다른 체형의 사람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인가? 하나를 추구했을 때 다른 수련방식이 가지는 장점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각각을 함께 조합시켜서 해볼 수는 없을까? 서로 완전히 다른 이론일 때에도 적용 자체가 가능한 걸까? 내가 더 부지런히 알아보고 공부하는 수 밖에 없겠지.


그래서 어제 하타 수련을 하던 중에 자꾸 왜 이 아사나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떠올라 집중하기 힘들었다. 가을도 되었고, 날씨는 선선하고 마음은 들뜬다. 이참에 다니던 수련 공간을 잠시 멈추고 새로운 곳을 찾아 바꿔봐야겠다. 하타를 지속하다보니 허리가 조금 약해진 게 느껴진다. 하타가 아닌 다른 것으로. 수련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대신에 가끔 개인수련으로 안내해야할 지점들을 찾아내야지.


숨이 조금 더 자유로워지니 기분이 좋다. 몸 전체의 근육을 통해 호흡이 잔잔하게 퍼지는 게 느껴진다. 내 수업에 오시는 분들도 이 감각을 맛보면 좋겠다. 어떻게 잘 알려드릴 수 있을까. 나는 왜 계속해서 수련을 해나가야 할까. 어떤 수련을 해나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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