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a엄마의 보호자
엄마는 수술직전 몸무게가 35킬로였다.
이미 수술 전 CT상 3기 이상으로 예상했던 터라 개복범위도 컸고, 약한 몸으로 긴 수술을 버틸 수 있을지 모두 걱정했다.
6시간 이상이 걸린 걸친 대수술은 무사히 마쳤고, 나는 '그날' 밤을 잊지 못한다.
평소 제대로 된 효도를 해본 적이 없던 터라
대수술을 마친 엄마를 특실로 모셨다.
여러 가지 치료가 가능한 침대를 제외하고는 어느 호텔방보다 좋았다.
엄마가 이렇게 되기 전까지 대학병원은 고사하고, 웬만해서는 병원 근처도 가지 않았다.
그 결과 이런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엄마의 수술날
밤새 5인실에서 나머지 4명의 환자들의 코골이 오케스트라를 들으면서 나와 엄마는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금식도 했고, 관장도 주기에 맞춰해야 해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암 통증으로 힘들어하는 엄마를 부축해서 밤새도록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불이 꺼진 복도를 걸으면서 ‘저렇게 코 골면서 잘 자는 환자들 사이에서 우리는 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밝으면 엄마가 수술을 하러 간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수술실로 빨려 들어가다 시피 들어간 엄마를 뒤로한 채
병실에 돌아와 침대 앞에 주인을 기다리는
낡은 샌들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의 것이었다.
밑창이 삭아 본드가 떨어져 있었고, 합피는 벗겨져서 너덜너덜했다.
좋은 데 갈 때 신으라고 사다 준 신발은 어디 가고
신발하나 못 사준 자식이 된 것 같아서
속상하고 짜증이 났다.
뭐 그리 돈을 아낀다고 병원비까지 아껴서 이렇게 된 건지 억척같은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낡은 신발을 당장이라도 갖다 버리고 싶었다.
220도 겨우 되는 작은 신발이
나에게 ‘이제 니 현실을 받아들여!’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좁은 침대 옆에 쭈그려 앉아서 커튼을 치고 숨죽여 울었다.
앞으로 내가 마주해야 할 어둠을 어떻게 헤쳐나가야하는 지 막막했다.
턱이 마비가 된 것 처럼 목이 메여왔고, 엄마의 낡은 신발 위로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수술은 5시간을 예상했지만 6시간이 훨씬 지났다.
그동안 나는 엄마병실을 특실로 옮겼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환자들 사이에서 큰 수술을 마친 엄마가 누워있는 게 싫었고, 일단 내가 편하고 싶었다.
수술실 앞 모니터에 ‘회복 중’이라는 메시지가 떴고, 얼마 있지 않아 엄마는 병실로 올라왔다.
만신창이가 된 엄마가 무서웠다.
얽혀있는 링거줄과 30센티 이상의 개복한 흔적이 고스란히 눈앞에 마주했다.
수술 마취를 깨우기 위해 엄마를 계속 흔들어 깨웠다.
어렵사리 눈을 뜬 엄마는
엄마의 엄마를 찾았다.
외할머니였다.
딸의 아픔을 짐작도 하지 못했던 고령의 외할머니에게 차마 전화할 수 없었다.
환갑이 넘은 딸은 그렇게 하염없이 ‘엄마...’라고 부르면 찾았다.
떨어지는 산소포화도를 밤새 체크하며 그렇게 3일이 지났다.
27살 무렵, 성격이 너무나도 달랐던 엄마와 나는 늘 말로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었다.
그렇게 도망치듯이 엄마와 같이 사는 집을 뛰쳐나왔다.
그렇게 나의 독립은 시작되었다.
그 후로 5년 동안 뜨문뜨문 엄마집을 방문했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 엄마랑 같이 있는 시간이 어색하고,
그런 아픈 엄마를 응원하고 다독여가는 것조차 어색했다.
30센티가량 개복한 배를 부여잡고
엄마의 컨디션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병실 주변을 하루종일 부축하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엄마의 손을 쉽게 잡을 수 없었다.
어색했고
내가 무너질 것만 같았다.
나는 엄마가 입원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엄마 앞에서 울지 않았다.
나는 강하고, 엄마 없이도 잘 지낼 수 있으니 걱정 말라는 메시지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가슴 아래부터 아랫배 끝까지 개복을 했고,
철심이 20개나 박혀있었다.
철심이 피부를 파고들어서 고통스러워했지만
살이 모두 아물 때까지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수술결과는 투명세포난소암 3기 후반~4기 정도로 판정받았다.
난소암 중에서도 가장 악질이었다.
담당교수는 덤덤하게 당장 항암치료를 권했고
엄마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항암치료를 하면 1년 이상 생존, 하지 않으면 3개월을 버티기 힘들다고 했다.
이래나 저래나 죽는다는데 , 돈 쓰고, 힘든 항암치료를 엄마는 계속 거부했다.
나는 엄마의 보호자로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 순간을 함께 논의할 다른 가족은 없었다.
당시 나의 남편(지금은 전남편)은 아무런 힘이 되지 않았다.
주변에 답을 구할 곳도, 찾아갈 사람도 없었다.
엄마의 보호자가 된 나는
나의 선택만이 답이었다.
나도 겪어본 적 없기 애 쉽게 엄마에게 항암치료를 강요할 수도 없었고, 무엇이 최선의 방법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수술만 잘 끝나서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게 모두 꿈이라면...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회사에 낸 휴가도 소진이 끝나가고
대학병원에서 머무를 수 있는 기간도 거의 다 되어갔다.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고,
그럼에도 엄마의 항암치료를 하는 쪽으로 정했다.
엄마는 내 선택을 따라주었다.
그렇게 2주를 채워 퇴원했고
비가 내리는 7월의 어느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