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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Mar 26. 2024

엄마는 죽음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Mia엄마의 보호자


35년 전, 지금처럼 하루 생활권은 생각도 못하던 시절에 낯선 부산으로 시집을 갔던 엄마는, 서른 살에 다시 혼자가 되었다.


 내가 태어나고 넉 달이 채 되지 않을 때

가정폭력으로 이혼을 하고, 어린 딸과 함께 대구로 돌아왔다.


이혼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았던 그때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딸을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는 게 부끄러울 시절이었다.


동네에 소문이라도 난다면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좋았다.




90년대 초에 서른 살의 젊은 엄마가 세상과 어린 딸을 감당하기에 쉽지만은 않았다.


고졸에, 변변치 않은 집안배경에, 이혼, 어린 딸까지 가진 엄마는 산후조리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분유를 살 돈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엄마 젖을 먹던 시절에는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소일거리를 맡아 부업처럼 했다고 했다.


내가 살던 대구 봉덕동 근처에는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미군부대 내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미군의 자녀들의 시험지를 채점하는 부업이었다.


지금으로 보았을 때는 재택근무를 한 셈이다.




상업고를 졸업하고, 금융권 사무직을 했던 엄마는 성실하고 꼼꼼했다.


그리고 늘 모든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엄마의 가난한 삶의 굴레는 아무도 벗겨내주지 못했다.



내가 5살이 되었을 무렵부터 엄마는 90년대 '보험블루오션'을 꿈꾸고 생명보험사의 영업사원이 되었다.


지금처럼 암보험, 생명보험이 보편적이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발로 뛰는 현장영업을 했었고,


자동차나 지하철이 없었던 시절이라 산 넘고 물 건너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소개로 문을 두드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지금처럼 여자의 사회생활 내 입지가 그다지 탄탄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여자는 당연히 치마를 입고, 구두를 신고, 화장을 하고, 상품화가 되어야 한다'라는 보험사소장의 오더로 엄마는 어울리지 않는 정장과 구두를 신고 하루종일 녹초가 되어갔다.


어린 나는 어렴풋하게 엄마가 그렇게 입고 출근하는 모습을 보았다.


출근이라도 할라 하면, 현관문 앞에서 생이별하는 것처럼 울어댔고 엄마가 출근하는 게 슬펐다.


그러게 하나씩 돈을 악착같이 모았던 엄마는 명품은 아니라도, 계절마다 나를 백화점에 데려가서 깨끗한 옷을 사주었고 시간을 내어 나와 주말을 놀아주었다.


하지만 나는 학교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땐 엄마가 늘 없었고 외할머니가 반겨줄 뿐이었다.


그런 삶에 불만은 없었지만, ' 엄마가 기다리는 집'이 부럽기는 했다.


외할머니가 늘 반겨주었지만, 엄마의 사랑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학부모수업, 참관수업, 학부모면담...


학교에서 하는 모든 학부모 관련에서 나는 늘 외톨이였다. 때로는 친구들이 '넌 엄마도 없냐'라는 말이 상처가 되었다.




엄마가 출근하고 없는 날에는

엄마가 벗어두고 간 잠옷의 체취를 맡으면서 울곤 했다.


젖냄새도 아니고, 향수도 아니고, 그냥 엄마의 체온이 남아있는 부드러운 면의 잠옷이 좋았다.


그 냄새가 아련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엄마가 퇴근하면 나는 잠에 들어있었고 엄마가 출근하면 나는 그제야 일어났다.


항상 엄마가 그리웠고, 보고 싶었다.





그런 엄마가 이제는 나를 영원히 떠날 준비를 한다...

엄마의 체온이 남은 잠옷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온갖 독한 약을 먹어서 특유의 약냄새만 남아있다.


이제는 나이도 들어 갱년기를 지나면서 체취의 향기도 달라졌다.


마치 노인냄새처럼


구두를 신고, 화장을 하고, 이쁜 옷을 입던 엄마는


이제 항암치료로 머리가 다 빠지고 림프절이 부어서 퉁퉁한 다리와 마약에 취한 몽롱한 얼굴만 남아있다.


새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쓰지도 않고, 그대로 남은 빨간 립스틱 3개를 보았다.


엄마는 항상 빨간 립스틱을 예쁘게 발랐다.


참으로 잘 어울렸다.


피부가 맑고 고았던 엄마는 특별한 고급 화장품을 쓰지 않아도 피부에서 광이 났다.


내가 늘 부러워하던 피부였다.


하지만 이제는 푸석푸석하고, 창백함만 남아있다.

화장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엄마가 아까워서 쓰지도 않은 새 립스틱을 차마 버리지 못해 구석에 고이 모셔두었다.


언젠가 엄마가 먼 길을 떠날 때 손에 꼭 쥐어주려고 한다.





오늘 은 엄마가 문득 울면서 '숨 쉬는 것도 짜증 나고 힘들어'라는 말을 했다.


자신의 삶이 언젠가 끝날 것을 알고 있기에 하루하루가 지옥 같고, 힘들다고 했다.



엄마의 행복은 언젠가부터 일회용이다.

아무리 엄마를 웃게 해주려고 해도, 그때뿐이고

아무리 엄마의 입맛을 돋우려 해도, 그때뿐이고

아무리 엄마에게 삶의 행복을 찾아주려 해도, 웃지 않는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엄마에게 쏟는 행복은 물처럼 흘러가 흔적도 없다.



엄마의 삶은 이제 어디까지 가 있을까,

평생을 일만 하다 병이 든 엄마의 썩어 문드러지는 속을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이렇게 살다가려고 악착같이 살았던 것은 아닌데 너무 속상하고 분통이 터진다고 하였다.


엄마의 투병생활이 1년이 넘어가면서부터 나도 지치고, 함께 이겨내 보자는 말을 쉽게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 우리 항암치료 해봅시다, 할 수 있어요!'라고 다독여주던 담당교수와 전담간호사는 엄마의 상태를 보더니 호스피스를 권유했다.


그때 살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었다.


당신들이 살리지도 못하면서 왜 항암치료를 해서 고통만 더 느끼다가 가게 하는지 원망한 적도 많았다.


이제는 그만 항암치료를 안 하고 싶다는 엄마의 말에 두 번 고민도 안 하고, 그러자 했다.



그렇게 우리는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하루하루 엄마는 그 길을 걸어가고 있고, 나는 뒤에서 가는 엄마를 바라볼 뿐이다.



나의 하루, 엄마의 하루


똑같은 시간과 공간이지만  우리는 각자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꿈꾸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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