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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May 10. 2019

'딸이 더 예쁘죠?'라는 질문을 맞이하는 아빠의 자세

feat. '여동생 예쁘지?'

딸을 낳고 가장 많이 들은 질문, 1위


지난 해 봄, 나는 아들도 있고, 딸도 있는 아빠가 되었다. 저출산이 극심한 이 시대에 아이를 낳은 것도 귀한 일인데, 그것도 둘이나 낳고, 게다가 아들도 딸도 하나씩 얻었으니 나는 정말 복 받은 아빠임이 틀림 없다.

딸이 태어난 그 푸른 오월의 날로부터 주변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단연 이 질문이었다.


딸이 더 예쁘죠?


10년이면 '강산'이 변하고, 20년이면 '사회 지형'이 변한다


내가 태어나던 1980년대만 해도 ‘남아선호사상’이 더 우세하던 때였다. 필자는 4남매 중의 막내로 살았다. 이러한 정보 하나만을 가지고도 1990년대의 사람들은 내가 ‘누나가 많은 아이’일 것이라고 추측하곤 했다.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아들이 나올 때까지 자녀를 출산하다보니 위로 누나들을 줄줄이 달고 탄생한 남자 막둥이들이 그 때까지만 해도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을 뿐인데 판도가 완전히 바뀐 듯 하다. 이제는 ‘자녀’의 출산이라기보다는 ‘딸’의 출산을 축하하는 사회가 되었고, 혹시 아들을 ‘연달아’ 낳은 부모가 있다면 심심한 위로를 건네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듯 하다.

혹시 아들을 ‘연달아’ 낳은 부모가 있다면 심심한 위로를 건네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듯 하다.


답정너 Question Dilema


그래서 그 질문의 답은 사실상 정해져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눈빛 속에 이미 나의 진실한 대답을 듣고자 하는 의지는 없어보였다.


네, 확실히 딸은 다르더라구요.


이렇게만 대답하면 별 무리 없이 부드럽게 흘러갈 수 있는 대화들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아들이 더 예뻐서도, 딸이 덜 예뻐서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아를 더 선호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거스르고자 하는 반항심도 아니었다. 그 마음은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기에 이 글을 쓰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열 손가락 마사지해서 안 시원한 손가락 없다


열 손 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했다. 자녀들이 혹여 잘못될까 노심초사 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느 자녀에게나 예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열 손 가락을 마사지해서 안 시원한 손가락도 없다는 뜻이다. 어느 자녀가 예쁘지 않겠는가?


아내와 나는 다섯 살이 되어 ‘엄마 싫어!’, ‘아빠, 저리 가!’를 외치기 시작한 아들이 너무도 사랑스럽다. 예쁜 짓을 할 때가 훨씬 많지만 한참 원인 모를 반항을 하기도 한다. 정말이지 아들을 키우다보면 인생의 희노애락을 하루에도 수차례 경험하곤 한다. 그렇게 때로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낸 날, 아들을 재워놓고 우리는 서로를 보며 이유 모를 미소를 짓는다. 미소를 띤 우리의 가슴에 증폭 장치가 달려 있다면 이렇게 소리로 울려퍼지지 않았을까 싶다.

"언제 커서 오빠로서 양보할 줄도 알고, 아빠 엄마를 배려해줄 줄 아는 아이가 되었는지. 분명 동생처럼 작고 힘없는 아가였는데 말야. 이제는 자기 주장도 강하게 할 줄 알고, 다양한 감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잘 표현하는걸 보니 잘 자라고 있구나. 소원이 키우느라 세밀하게 봐주지 못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컸니. 

많이 사랑해, 영원아! 미안하고 고맙다."


아들이 가장 많이 받은 질문, 1위


내가 ‘딸이 더 예쁘죠?’라는 질문을 수차례 받는 동안 우리 아들은 ‘여동생 예쁘지?’라는 질문을 나보다 더 많이 받아야 했다. 아빠보다 더 말 걸기 편한 다섯 살 꼬맹이다보니 어쩌면 당연히 맞이해야 하는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역시나 그 질문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들은 동생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때로는 아빠인 나보다도 더 예뻐하곤 한다.

아들은 동생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때로는 아빠인 나보다도 더 예뻐하곤 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포커스가 맞춰지지 않은, 그저 ‘예쁜 여동생의 오빠’로 존재해야 하는 질문 앞에 아들의 표정에서 행복과 슬픔을 동시에 읽을 때도 있다. 어쩌면 다섯 살의 얼굴에서 행복과 슬픔이 그렇게도 드라마틱하게 교차하는지. 그 질문이 반복될 때마다 ‘네. 진짜 예뻐요!’라고 늘 진심을 담아 대답하는 아들 녀석의 눈빛을 아내와 나는 유심히 살펴보곤 한다. 녀석의 동공의 흔들림까지도 우리는 읽어내야 한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혹시 모를 상처가 그의 마음 안에서 자라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너 아니었으면 어떻게 할 뻔 했니?


딸인지, 아들인지는 사실 우리에게 크게 중요치 않았다. 자녀를 낳기 전에는 막연한 상상 속에서 ‘딸이면 좋겠다’, ‘아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뱃 속에서 열 달을 함께 보낸 아이가 세상으로 나와 우리와 눈을 마주쳤을 때, 그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는 정말 중요치 않게 되었다.

그가 처음 우리와 눈을 맞추고 웃을 때, 처음으로 주사를 맞을 때, 처음으로 모유가 아닌 음식을 먹을 때, 처음으로 뒤집었을 때, 그 떨리는 순간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는 어느덧 아들과 함께 방바닥을 기어다니며 생각했다.


너 아니었으면 어떻게 할 뻔 했니?


'딸 육아'의 신세계를 경험하다


둘째를 낳으면서도 성별에 대해서는 자유로웠고, 개의치 않게 되었다. 아들이어도 감사하고, 딸이어도 감사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신은 우리에게 딸을 주셨다.

딸을 키우는 일은 정말이지 ‘신세계’였다. 안았을 때의 느낌, 목소리의 세기, 우는 소리, 손을 잡았을 때의 촉감, 기저귀 갈 때 젖는 부위, 떼를 쓰는 방법조차 아들 키울 때와는 전부 달랐다. 딸만 키운 부모가 아들 키운 부모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도, 아들만 키운 부모가 딸 키운 부모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애초부터 딸과 아들은 비교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경쟁의 대상은 더더욱 아니었다. 신이 사람을 만들 때, 애초부터 다르게 만든 것이었다. 남자 아이는 남자 아이대로, 여자 아이는 여자 아이대로 너무도 특별하고 고귀하게 만들어주셨다.


너 아니었으면 어떻게 할 뻔 했니?


우리는 딸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또 다시 이 고백을 해야만 했다. 그것은 딸이기 이전에 ‘소원이’가 우리에게 와 준 것에 대한 깊은 감사였다. 그녀가 아들로 우리에게 찾아왔더라면 우리는 그 녀석으로 인해 감사했을 것이다.



답정너 질문에 다르게 답하다


이제 ‘딸이 더 예쁘죠?’라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을 말하려고 한다.


영원이는 영원이대로 예쁘구요
소원이는 소원이대로 예뻐요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들이다. 누군가는 그로 인한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아들이거나 딸이기 때문에 더 사랑을 받거나 혜택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혹 자신의 성별로 인해 상처가 있는 분들이 있다면 진심어린 위로를 전한다.


아들이라서, 딸이라서가 아니라 '그 아이라서'


진정한 사랑이라면, 아들이라서, 딸이라서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배웠다. 아들, 딸, 첫째 둘째, 외동이, 막둥이 등의 수식어보다 아이 자체의 진실된 눈빛과 손짓이 사랑의 시작임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회의 변동에 의해서 아들의 매력이 줄어들고, 딸의 매력이 증가한다면 그것은 자녀를 바라보는 사랑의 시선에 무언가가 더 얹어진 것이 아닐까. 그저 사랑이 존재하고, 흘러간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혹여 ‘육아의 노동 강도’나 ‘노후에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에 차이가 생긴다한들 어떠한가. 그것 역시 그 아이들의 매력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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