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22살 때 필리핀에 어학연수를 갔었다. 그 당시 혼자 생각할 시간이 많아 이것저것 생각을 하다 미래의 나에게, 미래의 남편에게 그리고 미래의 아이에게 편지를 썼었다. 나에게 쓴 편지는 미래에 내가 가장 힘든 순간 읽어보려고 썼고, 남편에게 쓴 편지는 결혼을 하게 되면 결혼 당일 주려했다. 그리고 아이에게는 아이가 20살이 되는 해 생일 선물로 주려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 당시 누가 나의 남편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미래의 아이에게 편지를 왜 썼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여러 가지 환경적인 변화로 생각이 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젊었을 때 나의 생각을 아이에게 그대로 전하고 싶었다.
아이는 20살이 되면 22살 때 엄마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예전부터 너의 20살 생일 선물은 엄마가 22살에 적은 편지라고 이야기를 해서 아이도 알고 있다. 언젠가 "그냥 지금 그 편지 주면 안 돼?"라고 했지만 "지금은 네가 이해할 수 없어."라고 대답했다. 내년이면 아들이 15살이기에 이제 5년 남았다.
나는 그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순간 궁금해졌다. 내가 젊었을 때 어떤 생각을 아이에게 전하고 싶었을까? 결국나는 편지봉투를 살짝 뜯어 읽어보았다. 다행히도 그때와 지금의 생각은 변함이 없어 안도했다.그대로 전해주어도 되겠다.
22살 미래의 아이에게 쓴 편지.
내 미래의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들
처음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말문이 트이질 않는다.
아마도 넌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아이겠지? 아직 결혼도 안 한 내가 이런 편지를 쓰는 것 자체가 좀 우습기도 하지만.. 이걸 보는 너란 아이가 아들일지. 딸일지. 지금 난 22살이란다. 그리고 여긴 한국이 아닌 필리핀이라는 곳이고.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단다.
첫 번째 이유는 영어를 더 잘하기 위함이고 두 번째 이유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깊이 사고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란다.
아직 난 네가 어떤 아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내가 널 정말 사랑한다는 거겠지? 그래서 난 너에게 하고 싶은 몇 가지의 말이 있어서 이렇게 편지를 쓴단다. 과연 내가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든다면 지금 이 생각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 아마도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 해서 지금 너에게 편지를 쓴단다.
내가 너에게 과연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너에게만큼은 존중받고 싶구나. 내 나이 22살. 정말 꿈 많은 나이이기도 하고 가장 좋을 때지. 너도 아마 너만의 삶의 목표가 정해져 있을 거야. 만약 삶의 목표가 아직 없다면 한 가지를 정하도록 해. 지금 나의 삶의 목표는 '후회하지 말자'라는 거란다. 내가 생각하기 론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은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후회할 일을 하는 거거든. 대부분 사람들이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 일을 진행시키지. 예를 들면 지금 내가 여기서 지쳐버려 노는 것에 정신을 판다면 후회할 것은 안 봐도 뻔하거든. 하지만 그것을 참지 못하고 쾌락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거든. 난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내 삶을 후회해 본적이 아직은 한 번도 없단다. 후회할 만한 일들이 있긴 하지만 매 순간 난 최선을 다 했기에 후회하지 않는단다. 너 또한 과거에 집착하며 '그때 더 잘할걸'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안되길 바라. 그것보단 현실에 충실히 해서 시간이 흐른 뒤 그때 정말 잘했었다는 생각이 들도록 생활하길 바라.
그리고 난 너라는 아이가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을 더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 됐음 한단다. 자기 자신에게도 또 사람을 사귈 때에도. 외적인 것을 좋아해서 어떤 이를 친구로 만난다면 그 사람이 사고를 당해 외적인 것을 손상했을 때 그때도 넌 여전히 그 사람 곁에 있을 수 있겠니? 외적인 것은 언제라도 변하지만 내적인 것은 잘 변하지 않는단다.
난 네가 내적으로 아름답고 또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 그리고 항상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해. 사람이 살아가면서 혼자 살 수는 없는 법이란다. 어디를 가든지 너라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남도록.
또한 어느 곳에 속하든지 너란 사람이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길 바라.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라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너무 서글프지 않을까? 항상 너를 필요로 하는 곳에 너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살아가면서 돈과 마음의 풍족함 중에서 선택하라면 마음의 풍족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돈이란 있어도 없어도 문제가 되지만 마음의 풍족함이란 없으면 문제가 되는 것이요. 있으면 삶을 살아가는데 행복을 느낄 수가 있단다. 그래서 난 내가 결혼하게 되는 사람이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었으면 한단다. 아마도 너의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겠지?
그리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항상 내적으로 외적으로 자신을 가꾸어 나가고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길. 또한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지혜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마음이 따뜻해서 남들에게 사람 냄새가 난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남의 험담을 하지 않으며 (남의 험담은 곧 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경우가 되므로) 친구의 소중함을 인식하길.
그리고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을 자신보다도 더 믿을 수 있는지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인지,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인지를 생각해보고 배우자를 선택하길..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그냥 한번 쭉 적어봤단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보다는 너와 비슷한 나이일 때 이렇게 적어두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나도 아직 이런 사람이 되려면 멀었지만 지금도 노력하고 있단다.
너도 항상 노력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쯤 난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지 참 많이 궁금하구나. 다른 건 몰라도 평화로운 가정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구나.
마지막으로 사랑한다..
2002.11.11
필리핀에서 너의 엄마가 22살 때...
다행히 나의 생각들이 지금 변한 것이 없다. 5년 뒤 이 편지를 받고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매년 아이의 생일이 올 때마다 미래의 그 날을 상상하곤 한다. 아들이 이 편지를 먼저 읽고 2년 뒤, 딸이 20살이 되는 생일에 그대로 이 편지를 다시 전해줄 것이다.
나도 너희와 같은 나이가 있었다고. 그리고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꿈꾸며 살았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