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정리법은 다르다' 마지막 챕터
시간이 조금 더 지났습니다. 어느정도 지났는지 인식하지 않았지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정리했던 집에 다시 물건들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거실 구석, 책상 모서리, 아이들의 방, 그리고 옷장 깊숙한 곳까지.
분명 지난 계절에 우리는 많은 것을 비웠고, 틈틈히 정리를 했지만 어느 순간 또 쌓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박스는 돌아오고, 종이봉투는 쌓이고, 작은 물건들은 어느새 집 안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분명 정리했는데, 왜 다시?'
그러다 곧 알게 되었습니다. 이건 실패가 아니라 살고 있다는 증거라는 걸요.
정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음도, 삶도, 집도 마찬가지죠.
살아가는 동안에는 다시 쌓이고 다시 흔들리고 다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저는 여전히 물건 앞에서 망설입니다.
아직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때의 감정이 너무 선명해서.
그러다 문득 깨닫습니다.
정리의 고민은 결국, "무엇을 버릴까"가 아니라 "무엇을 기억하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이라는 걸.
우리는 쉽게 잊습니다.
기억은 흐려지고, 의도는 바래지고, 새로운 것들은 끝없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가끔 생각합니다.
우리가 물건에 잠식되는 게 아니라 물건들이 우리의 시간을 대신 기억해주는 건 아닐까.
낡은 영수증 하나가 그날의 웃음을, 구겨진 메모지가 그때의 다짐을, 작은 장난감이 아이의 어린 시절을 조용히 간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라고 애써 위로도 해봅니다. 버릴지 말지 고민하는 저는 어제의 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를 닮은 아이들도 있고요. 슬프지만.
다만, 이제는 그런 저를 이해합니다. 완벽하게 비우지 못해도 괜찮다는 것.
정리는 '끝내는 일'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집 한편에, 여전히 열지 않은 박스 하나가 있습니다.
아직 다가가지 못한 기억, 마주할 용기가 덜 생긴 감정, 언젠가 다시 열어볼 시간.
그 박스는 이제 미루고 있는 증거가 아니라 제 삶의 한 페이지, 아직 남겨둔 여백처럼 느껴집니다.
정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끝나지 않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성장하고
조금씩 서로를 이해해 갑니다.
버리지 못한 것들도, 다시 쌓여가는 것들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도, 모두 우리의 삶을 이루는 조각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 박스를 조용히 바라봅니다.
언젠가 열게 되겠죠. 아니면 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이 집에서 이 여백에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정리는 반복되지만 그 반복 속에서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갑니다.
아주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