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림 Jan 17. 2023

더, 먼 행복한 곳으로.

온몸이 까슬거리는 느낌이 나고, 으슬으슬한 기운이 올라와 나른한 마음으로 가만히 세상을 내려다보는 오후. 새해부터 엉망진창으로 깨져버려 둘쭉날쭉한 손톱과 깊게 파여버린 무릎 상처 위로 하얗게 올라오는 고름과 흘러내리는 진물의 잔해는 도통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톰한 폼을 올려 상처를 가려도 아프지 않을 뿐, 덧나기를 반복하는 꼴이 퍽 우스워 웃었다.

잠시 닮았다고 생각했나 보다.


멍하니 칠판에 그려진 달력을 바라보다 문득 벌써 보름이나 지났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날짜를 하나, 하나 눈으로 쓸었다. 새해의 첫 달이 안녕하기라도 했다면 좋았을 것을, 안녕하지 못한 날이 절반이나 된다는 사실이 조금 눈물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의 눈물이 새해의 첫 눈물이었던가. 아니었던가, 아니다. 좀 더 앞의 일이었다.


새해가 되어 처음으로 선생님을 뵈러 갔던 날, 나는 거의 간이식을 두 번이나 받고도 또 간을 망가뜨린 환자가 된 것과 진배없는 환자가 되었다. 선생님의 단호한 목소리와 톤은 나를 따끔하게 혼내는 것 같아서 돌아서 나오는 길에 내가 잊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 봤다.


나의 안녕과 행복을 몇 번이나 기원하지만 속절없이 또 무너지는 그녀의 곁을 지킨 지도 스물여덟 해다. 나는 아마도 그녀의 행복을 위해 가짜 행복을 찾았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미지근한 온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화상을 입고 나왔다. 그게, 가짜 행복의 온도였다.

찬물에 씻어내려도 따끔거리는 것이 정신을 번쩍 나게 하는 데는 한몫했다.


선생님이 내게 그랬다.

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 내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스펙트럼을 넓혀보라고.


애석하게도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아서 눈물이 흘렸던 것이 첫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가짜 행복을 내려놓고, 그녀와 헤어질 준비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와 동시에 어느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감히 너를 사랑하기보다 나를 한번 더 사랑하기로 했다. 그럼 더 이상 같은 화상은 입지 않을 수 있겠지.


그녀가 내게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한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황혼의 문턱에 서있는 그녀인데도 어느 한구석은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아서 자꾸만 눈이 밟히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며칠 전, 찰나가 내게 그랬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희생하는 것이 싫었더라고.


'그렇구나'라고 답했지만, 너는 모르겠지. 그게 내게 사무치도록 아플 수 있는 말이었음을.

내 눈가에 비친 모든 것을 사랑하진 못했어도 죽지만은 말라고 온몸으로 바치던 내 삶이 부정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란 걸 너는 알까. 내가 진정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또 다시 돌아온 두 번째 스물여덟의 해에도 절대 후회하지 않는 것은 딱 하나다. 그녀가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그렇게 해서 새 삶을 살아간 누군가와, 새 생명으로 찾아와 환희 웃는 내 핸드폰 배경화면의 사랑스러운 아이가.


내가 후회하지 않는 이유의 전부이다.

 

안다.

나를 오랫동안 봐왔던 이정표가 되어줬던 등대도, 내 행복을 위해 마다하지 않는 키 큰 친구도, 사진으로 마음을 담는 내 작은 친구도. 때론 세상의 고배를 다 마신 어른처럼 구는 귀여운 내 동기들도.


차마 말하지 않았던 큰 걱정은, 기나긴 밤 끝에 내게 새벽이 오지 않을까 봐.

끝까지 행복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도 알았지만 그들도 차마 말하지 않았던 것 중 하나였다는걸 안다.


그러나 그들도 무엇을 위해 했는지는 십 분은 알기에 가만히 숨을 참아주는 것이라는 것을.

미끄러지는 숨을 가득 끌어안고는 눈물을 삼키면서, 다시 말하지만 후회는 없노라고.

네가 나로 살아본 적 없듯, 나도 너처럼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평생 이 마음은 몰라도 된다고.


찰나야, 그래도 네가 나아가듯 나도 나아갈 거라는 것.


스물아홉의 해에는 작별을 고할 것이다. 무엇과

적어도 세상과의 안녕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의 안녕을, 나의 행복을 위해서 수많은 것과 작별할 것이다.

마음이 많이 아프겠지, 그러겠지.


이것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만 부디 용기를 주기를.

네가 선택한 길 위에는 새 희망이 피어오를 거라고.


한 번만 용기를 주기를 바라보는 오후다.

이전 17화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