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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인생에도 표지판이 필요해

병실에서 보이는 표지판을 바라보다 느낀 잔잔한 생각들


하얀 장갑을 낀 그의 손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쁘게 움직인다. 그의 손은 들어오는 모든 차들을 우선 세운다. 그러면 운전자들은 창문을 빼꼼히 연다. 그가 운전자들에게 물어보는 질문까지 내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병실에서 그의 모습을 열흘 넘게 바라본 내가 조심스레 예측해 볼 때 운전자들의 병원 방문 목적을 묻는 듯했다. 그는 운전자들의 답변을 듣고 하얀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어서 가라는 제스처를 한다. 싸인을 받은 운전자들은 창문을 다시 올리면서 가던 길을 재촉한다. 그들이 지나가는 도로 위에는 하얀색 글씨로 택시, 현관, 주차장이라고 쓰여 있다. 차들이 지나가는 길을 바라보며, 멀리서 바라보는 나 또한 그들이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있다.


자그마한 병실에서 보는 창 밖 모습은 매일 똑같다. 그나마 병실 한쪽이 창문으로 가득해서 병원 밖 세상의 모습을 넓게 볼 수 있고 햇살도 마음껏 마주할 수 있어 좋다. 하루의 시간 중 가만히 산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주차관리 요원들의 모습을 마주한다. 처음에는 하루 종일 서서 근무를 해야 하는 직무라서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겠다는 생각도 하고, 도로 위에 목적지에 맞게 어디로 가면 되는지 커다란 글씨와 화살표가 그려져 있는데 관리요원들이 필요할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창틀에 걸터앉아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그들을 마주한 운전자들이 주차요원과의 짧은 대화 후에 차의 방향을 틀어 다른 길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역할이 왜 중요한지 새삼 알게 되었다. 주차요원들은 살아있는 표지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창 틀에 앉아서 눈길을 조금만 돌리면 저 멀리 대형 마트가 하나 보이고 그 앞에 도로가 있다. 시력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라서 여러 가지 표지판 중에 <사고다발_속도를 줄이시오>라고 쓰인 표지판이 보인다. 그냥 한참 동안 표지판을 쳐다보았다. '인생에도 저런 표지판이 있다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앞만 보고 달리는 무한경쟁 시대 가운데 가끔씩 과속 방지턱도 나타나서 내 삶의 속도를 조절해 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마도 살아가는 인생 순간순간에 나타나는 일련의 여러 가지 사건들이 그런 역할들을 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가끔은 너무나 숨 가쁘게 삶을 살아내느라 그런 싸인들을 놓치거나 무시를 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은행을 다니면서 운전면허증을 땄다. 신입이라는 딱지를 떼자 누구나 그렇듯 일상의 단조로움에 나 또한 조금씩 지쳐갔다. 새로운 활력이 될만한 것들을 찾다가 같은 지점에 있던 동료와 마음이 맞아서 함께 운전면허증을 따기로 했다. 지점장님은 우리의 계획을 들으시고는 수능 끝나고 면허도 안 따고 뭐했냐며 우리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해 주셨다. 동료와 퇴근을 하고 운전면허학원으로 정해진 요일마다 다시 출근을 했고, 면허시험 당일은 휴가를 내서 실기시험을 봤다. 결국 우리는 운전면허를 취득했고 나는 그 김에 중고차 하나를 샀다. 물론 중고차 한 대를 구입하게 된 데에는 그 사이 사귀었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면서 홧김에 산 이유가 더 크다. 이유가 어쨌건 완전 초보인 나는 겁도 없이 열심히 차를 몰고 다녔다.


중고차 시장에 가서 차를 끌고 나오는 것부터 누구의 도움 없이 직접 했다. 차를 인수받으러 가기 전 남자사람 친구의 도움을 받아 자동차보험에 가입도 했다. 중고차 사장님은 운전 경험도 없는 여자 둘이 나타나서 꽤 당황해하셨다. 두 사람끼리 정말 괜찮겠냐며 몇 번이나 물었지만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되려 사장님을 내가 다독였다.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었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같이 면허를 딴 동료를 조수석에 태우고 우리 둘은 호기롭게 출발했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직진 밖에 없으면서 그렇게 나는 올림픽대로를 탔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내비게이션의 말에 온 신경을 기울이며 눈과 손은 완벽한 협응을 보여줬다. 때때로 조수석의 앉은 동료가 비명을 지르기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나는 동료의 남자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 노량진까지 그녀를 무사히 데려다주었다.  


중고차를 인수받기 전 운전이라고는 학원에서 받은 도로연수 때와 아빠를 백번 졸라서 아빠 차로 동네 한 바퀴를 돌았던 것이 전부였던 나는 그 날 이후로 자신감이 생겨서 운전하기를 즐거워했다. 여자들이 어려워한다는 주차도 내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평소에 거리 감각이 둔하기로 소문난 나인데도 주차를 할 때만큼은 완벽한 거리 감각을 뽐냈다. 지하철과 버스만 타고 다니느라 서울 토박이지만 서울의 교통 지리에 약했던 나는 모든 걸 새롭게 배우기 시작했다. 이곳저곳 열심히 다니며 도로표지판에 적응을 하고,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벌써 10년 넘게 무사고인 나이지만 이제 막 초보 딱지를 뗄 무렵, 결혼식이 있어서 다녀오는 길에 결국 나는 첫 사고를 냈다. 그것도 버스와의 사고를. 난생처음 가보는 길이었는데 내가 신호대기를 하며 앞으로 나가야 할 길을 바라보니 직진이지만 굉장히 왼쪽으로 구부러진 길이었다. 내비게이션 또한 길을 안내할 때 전방 몇 m 직진이라고 이야기했다. 게다가 그 길은 현재 공사 중이었다. 차선 표시조차 없는 길에 초보인 내가 차선 맨 앞에 위치한 차이다. 내 앞에 다른 차라도 있으면 그 차를 따라가기라도 할 텐데 빨간불에 신호를 대기하고 있으면서 나는 점차 초조해졌다. 이윽고 초록불로 바뀌었다. 좌회전을 나타내는 왼쪽 화살표가 신호등에도 없는 걸 보니 지금 가는 이 길은 직진이 맞다고 스스로 확신했다.


액셀을 밟으며 천천히 직진을 하며 나가는 순간, 쿵! 그 소리에 심장도 같이 내려앉았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지?'라며 정신을 차리니 나는 버스와 접촉사고를 냈다. 버스의 왼쪽 부분과 내 차의 오른쪽 부분이 서로 맞닿아 있었다. 버스 기사 아저씨가 소리를 치며 내게 다가오는 모습에 핸들을 붙들고 있는 나는 점점 쪼그라들었다.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문을 열고 내리자 왜 왼쪽으로 차를 꺾지 않고 직진을 하냐고 삿대질을 하며 소리 지르는 기사 아저씨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 정신은 멍해졌다.


그랬다. 그 길은 신호가 떨어진 순간부터 핸들을 살짝 왼쪽으로 틀어서 나아가야 하는 상당히 왼쪽으로 커브진 직진 길이었다. 길이 뭐 이렇냐고, 밤 중이라 어두워서 잘 몰랐다고, 이제 막 면허를 딴 초보라고, 게다가 길이 공사 중이라 차선 표시도 제대로 없지 않았냐고 따져봐도 여지없는 변명이다. 잘못은 내가 했다. 결국 나 때문에 그 버스에 있던 승객들은 내려서 대체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나는 기사 아저씨와 난생처음 경찰서라는 곳도 가 보았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가벼운 접촉사고였지만, 경위서를 쓰면서도 이게 도대체 뭔 일인가 싶었다. 그 날 나는 새로운 걸 배웠다. 운전이라는 게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표지판들을 잘 본다한들, 내가 가는 도로가 어떠한 모습인지 전혀 모르고 달리면 결국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의 인생도 매 순간이 새롭다. 때때로 열심히 앞을 향해 가다 보면 가보지 못한 새로운 길에 들어설 때도 있다. 그런데 인생길의 운전대는 내가 잡고 있지 않는가. 아무리 인생이라는 게 행운과 불행의 연속이라고 해도 핸들은 내가 조절하고 있다. 결국 좋은 길로 인도하는 것은 내가 쥐고 있는 핸들이다. 내가 가는 내 인생길에 안개가 자욱해서 앞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더라도, 내가 지금 가는 길의 대략적인 모습과 어떻게 운전을 해야 할지는 운전자 스스로가 결정하고 선택해야 한다. 수만 가지 선택지들이 인생길 앞에 놓이고 우리는 그때마다 수많은 결정들을 해야 한다. 그럴 때 주위에서 내게 두는 훈수나 잔소리가 때로는 우리 인생의 표지판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인생의 주체는 나라서 다른 이들의 조언 따위 필요 없을지도 모르나, 깜빡이를 킬 줄 몰라서 직진만 하다 보니 어느새 부산까지 가 있더라는 어느 초보 운전자처럼 되지 않으려면 모든 이들의 조언을 다 무시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정보의 홍수라고 지칭한다. 원하는 정보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고, 삼삼오오 몰려있는 카톡 채팅방마다 쓸데없는 정보들도 무한정 쏟아진다. 원치 않아도 불필요한 정보들에 자연스럽게 노출된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정보를 빠르게 취득했냐 보다는 그 정보가 옳고 그른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과 내게 필요한 정보를 얼마나 정확하게 찾고 그것을 문제에 제대로 적용하느냐, 그게 아닐까. 인생도 마찬가지이지 싶다. 내게 주어진 관심과 사랑이 다양한 조언들로 포장되어 들려질 때, 그것의 옳고 그름을 분별해서 흘릴 이야기는 스쳐 버리고 귀 담아야 할 이야기는 마음에 새기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실천력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내가 가진 지식과 주변의 정보를 조합하여 매일 같이 펼쳐지는 새로운 인생길 위에 접목시킬 수 있는 능력, 나 또한 그런 능력이 요구되는 때인 것 같다. 때때로 나타나는 인생의 표지판을 제대로 읽어내고 속도를 줄여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제대로 안다면 지금보다 더 근사한 나로 한 단계 성장하지 않을까. 남편이 내게 줄곧 이야기하는 것 중에 하나가 "거참, 진짜 놀 줄 모르네. 당신은 진짜 쉬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아."라는 말이다. 나는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집에서도 끊임없이 일거리를 찾아 헤맨다. 잠깐 주어진 짬이 생기면 아들의 옷장을 정리하거나 괜스레 냉장고를 정리한다. 물론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지금 당장 하지 않는다고 집안이 망가지는 것도 아닌데 잠시 뒤로 물리면 어떠랴. 내 마음에 집중하고,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걸 한다거나 먹고 싶은 걸 먹으며 농땡이를 치는 그런 소소한 삶이 가끔은 내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의 일기를 빼먹은 어제, 나는 굉장히 아팠다. 코로나 확진자가 된 후, 발열로 고생하던 거 다음으로 가장 아팠던 날인 듯싶다. 아침부터 울렁거리는 속은 쉽사리 진정될 줄 몰랐고, 두통과 어지럼증, 기력 없음이 한 번에 몰려와서 나는 24시간 침대와 붙어있어야 했다. 결국에는 구토까지 하면서 내 팔에는 주사가 들어가고 링거가 들어갔다. 사실 어제 점심까지만 해도, 그저께 객담검사에서 '음성'판정이 나오고 어제 오전에 실시한 코로나 재검사에서도 '음성'판정이 나와서 퇴원을 계획해 볼 수 있겠다는 간호사 선생님 말에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이런 기분 상태로라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시점부터 나는 계속 아팠다. 즐거움을 만끽할 여유도 없이, 몸이 골골거렸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도 생각했다. '인생 참, 뭐 이래. 나한테 너무하네, 진짜...'라며 툴툴거렸다.


그러면서 또 생각했다. 그래, 퇴원하는 그 날까지 정말 제발 푹 좀 쉬라는 싸인인가 보다. 그래서 어제 정말 하루 종일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이렇게 아파서 자다가 죽으면 어쩌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몸이 안 좋으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자는 것 밖에 없었다. 앉아서도 자고, 누워서도 자고, 끝없이 자면서 지금이 자야 하는 시점이라고 내 인생 표지판이 알려주는 거라면 그냥 열심히 자 보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면서 나는 진짜 쉴 수 있었다. 매일 일기 형식의 글을 쓰는 것도 잡생각을 지워버리기 위한 일이었지만, 어쩌면 내 정신에게는 나름의 무리를 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가 뭐라고, 내 몸이 더 중요하지-라는 생각에 모든 걸 내려놨다. 하루가 지나고 나는 완전히 멀쩡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제보다 상태가 훨씬 좋다. 다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오늘 아침에도 객담검사와 코로나 검사가 시행되었다. 오늘도 이 두 가지에서 전부 '음성'이 나오면 나는 진짜 집으로 갈 수 있게 된다. 코로나 확진자가 되고 스물다섯 번째 날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혹시, 행여라도 둘 중 하나에서 ‘양성'이 나와 내가 집으로 가는 계획이 물거품이 된다 할지라도 나는 아주 많이 실망하지 않을 생각이다. 어쩌면, 아직도 내게 쉼이 더 필요하기에 더 쉬라고 이야기하는 내 인생의 표지판이 주는 싸인일지도 모르니깐. 그래도, 집에 가고 싶기는 하다.


- 내 병실 창밖으로 보이는 병원 현관 주차요원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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