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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다시 태어난 기분을 만끽하다

코로나 음성, 그리고 퇴원, 기다리던 가족과의 상봉

"엄마, 손 좀 줘봐.
이게 꿈이야, 현실이야?"


함께 잠자리에 누운 다섯살 아들은 자꾸만 내게 손을 달라고 했다. 고사리처럼 작은 두 손으로 내 손을 꼬옥 감싼 뒤 녀석은 자신의 볼에 갖다 댔다. 자꾸만 "이게 꿈이야, 현실이야?"를 랩처럼 반복하던 녀석은 어느새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녀석이 깊은 잠에 빠지자 그제야 나는 내 얼굴의 반을 덮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서 침대 한켠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은은한 불빛 사이로 가만히 잠든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와 함께 가만히 잠든 사랑하는 아들을 한없이 바라보면서 나 또한 혼잣말을 했다. "정말, 이게 꿈은 아니겠지?"




어제 점심식사 시간 이후, 간호사실에서 수시로 내 병실 305호로 전화를 했다. 선생님들은 내게 용건을 말하기 전에 계속해서 전제조건 하나를 붙였다. "OOO님, 오늘 퇴원이 확정이 된다면......"이라는 전제조건이 붙지 않은 채 시작되는 말은 없었다. 퇴원이 확정된다는 가정 하에, 내가 병원에서 떼야하는 서류들을 확인하고, 추가로 처방을 원하는 약제들에 대해 논의하고, 보호자는 누가 올 것인지, 집으로 귀가하는 교통수단은 어떤 것을 사용할 건지 등등의 이야기가 진행됐다. 이 확률게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지 모든 사람의 관심이 주목되었다. 음성과 양성, 흑백논리로 가를 수밖에 없는 잔인한 현실 앞에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은 초조했다.


퇴원을 한다는 가정하에 간호사실에서는 짐을 좀 싸 놓으라고 했다. 선생님들의 어투에서 어느 정도 음성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이틀 내내 객담검사와 코로나 검사에서 '음성'을 받았고, 몸의 안쪽에 있는 가래에서 '음성'이 나왔으면 삼일째 시행한 코로나 검사에서도 재차 '음성'이 나올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느 정도 짐을 싸놓은 뒤, 서랍장 위에 남아 있는 물을 한없이 마셔가며 넷플릭스를 틀어 대만 드라마 <상견니>를 보기 시작했다. 작년에 우리나라에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드라마가 있다면 대만에는 '상견니'라는 이 드라마 압권이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터다. 워낙에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라던가 '말할 수 없는 비밀'과 같은 대만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첫회부터 깊이 빠져 들었다. 어느새, 나는 퇴원에 대한 부담감은 내려놓은 채 이야기에 몰입되기 시작했다.


내가 받았던 부담감은 꼭 퇴원을 하고야 말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두 차례 음성 판정을 받고 가족들은 오늘의 결과에서도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 마음의 부담감은 가족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는 부담감이었다. 행여나 '양성'이 나오더라도 나는 내 마음을 잘 다독이고 위로해 줄 준비가 되어 있는데, 가족들의 모든 마음을 내가 다 일일이 다독여 줄 수 없기에 그들이 받을 상처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 결과가 나오기로 한 시간은 17시 정도. 자꾸만 시계로 향하려는 내 눈을 억지로 끌어당기며 노트북만 바라보게 했다. 나름 몰입된 드라마 이야기에 마음은 빠져들고 있는데 머릿속은 온통 콩밭이었다. 짹각짹각.




16시 30분 즈음 내 병실 305호에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침대에서 뛰어 내려오다시피 하며 전화기로 달려갔다. "네, 여보세요?" "OOO님, 검사 결과 '음성' 나왔대요. 퇴원하실 수 있게 됐어요. 정말 축하드려요!!!" 음성이라는 단어보다 그토록 듣고 싶던 '퇴원'이라는 말에 내 가슴은 울렁거렸다. 퇴원이라니, 내가 진짜 집으로 갈 수 있다니!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토록 듣고 싶던 '퇴원'이라는 단어를 위해 25일을 혼자 격리되어 지리한 스스로와의 싸움을 감내해야 했던 지난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코로나 확진자니깐 보건소 연락이 올 때까지 외출하지 말라는 문자를 받았던 그 순간, 생활치료센터로 이송된 후 혼자 우울증과 불면증을 이겨내야 했던 확진 첫 주, 어느 정도 마음을 가다듬고 글쓰기에 집중하며 우울감을 털고 다시금 희망을 외쳤던 날들, 퇴소할 줄 알았는데 병원으로 전원 된다는 소식에 좌절을 맛보았던 그날의 기억, 병원으로 와서 오히려 간호사 선생님들과 라포가 형성되고 되려 위로받았던 날들, 어느 날 아들이 영상통화 중에 "엄마, 혹시 죽은 거야?"라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서 충격받았던 그 순간, 검사에서 '음성'이라는 결과에 행복했던 날, 그 후 조금씩 키워왔던 퇴원에 대한 희망의 꽃. "OOO님, 듣고 계시죠? 이제 짐 다 싸면 되실 것 같아요. 배우자 분은 병원에 이미 도착하셨다는 거죠?" 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남편은 이미 두 시간 전부터 병원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행여라도 '양성' 결과가 나와서 다시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경우의 수도 있었지만, 긍정의 화신 남편은 이미 나의 '음성'을 확실시하고 있었다. 병원 인근에서 공부를 하며 기다리겠다던 남편이 정말 제대로 공부를 했을지는 미지수다. 완벽하게 짐을 싸고, 내 모든 흔적을 없애기 위해 나는 찬찬히 병실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바닥도 살펴가며 나의 긴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는 것들을 주워다가 폐기물 통에 버렸다. 11일 동안 나와 한 몸이 되어주었던 침대를 정리하며 좋은 추억으로 남은 분홍 이불을 개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불행한 게 아니라 행복했노라!'라고, '삶에 대해 이토록 진중하게 생각해 본 적이 이런 기회가 아니면 내게 또 있었을까.'라며 어쩌면 나는 불운이 아닌 행운을 선물 받은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준비해 온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매일 아침마다 눈 비비며 다가오는 내게 '괜찮아, 오늘 하루의 끝에는 더 나은 내일이 있을 거야, 더 나은 내일 끝에 결국 너는 희망을 만나게 될 거야, 그러니 버텨, 그러니 힘내, 그러니 오늘도 웃자!'라며 용기를 주었던 내 마음의 안식처인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정말 고마웠다고, 니가 없었다면 나는 다시 용기 내지 못했을 거라고. 그때, 전신 방호복을 입고 내 병실에 들어온 남자 간호사 선생님으로 인해 생각의 꼬리는 접혔다. 그는 내게 남편의 진행상황에 대해 물었다. 회사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 발급을 위해 의무발급실에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행하고 있는 남편이, 나를 만나야 하는 장소 지하 2층 하역장에서 대기 준비가 되면 나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고 했다.


잠시 우리 둘 사이에 적막한 고요가 흘렀다. 침묵을 깬 건 남자 선생님의 한 마디였다. "저도 그 글(19. 코로나, 코로나와 싸우는 사람들) 봤거든요. 환자분이 쓰신 저희 간호사들에 대한 이야기요. 저희들 모두 이 글을 공유하며 정말 많이 위로 받았어요. 감사합니다!" 어느 날, 간호사 선생님이 저녁에 병실 청소를 하실 때 내가 노트북으로 한창 글을 쓰고 있던 걸 보게 되었다. 나는 코로나 확진의 우울감을 떨치기 위해 일기처럼 글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블로그냐고 물어봐서 폐쇄형 블로그쯤 되는 브런치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후에 선생님이 내 브런치를 찾아보게 되었고, 그러다 간호사 선생님들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고, 병동 선생님들이 공유를 하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또 다른 선생님은 내 병실에 들어오셔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동료 간호사가 좋은 글이 있다며 공유를 해 줬는데 알고 보니 내가 쓴 글이었단다. 자신이 돌보고 있는 환자의 글이라서 신기해하셨다는 말에 내가 더 신기했다. 내 글이 무엇이라고 이토록 간호사 선생님들이 공유할 정도인지 신기했다. 선생님들끼리 내 글을 한 부분 부분을 캡처해서 이 부분에 특히 감동받았다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는 말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 말에 나는 다시 한번 글쓰기의 위력을 느꼈다. 나 살겠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끝없는 우울감과 불안감에 추락할 것 같은 내 인생 한번 살려보겠다고 시작한 글쓰기가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하고 지쳐 있는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훈훈한 마음을 나누는 가운데 남편이 지하 2층 하역장에서 대기 중이라는 연락이 와서 나는 진짜 병실을 떠날 준비를 했다. "우리 진짜 이별인 거죠? 정말 고마웠습니다.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 말씀 전해주세요."라는 내 인사에 선생님은 "환자분이 음압 병동 마지막 환자분이신 거 아시죠? 환자분 퇴원하시면 저희도 정리하고 오늘 퇴근해요. 11월부터 다시 음압 병동 개시하는데 그때까지 며칠 쉬게 될 것 같아요."라며 웃음을 내비쳤다. "아, 진짜요? 그러면 저의 퇴원이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거네요? 아, 좋다. 여러모로 감사해요, 진짜 갈게요, 안녕!"이라고 나는 말하며 손을 흔들고 나왔다.




하역장에서 만난 남편의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너무나 반갑고 그리운 모습에 서로를 안으며 고생했다며 격려했다. 함께 눈시울을 붉히던 간호사 선생님의 배웅을 받으며 2020년 10월 22일 17시, 나는 그렇게 남편과 함께 병원을 떠났다. 가장 먹고 싶은 게 뭐냐고 물어보는 남편의 질문에 "버거킹!"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대답을 한 뒤, 차 창문을 활짝 내렸다. 바깥의 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거리는 하루를 마감하려는 사람들의 발길로 분주했다. "여보, 나 신생아가 된 것 같아. 엄마 뱃속에만 있다가 세상으로 나왔을 때 신생아들이 이런 기분일까?" 내 말에 남편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여보, 걸음마하는 돌쟁이들이 이런 느낌일까? 자기 스스로 두 발을 움직여 세상을 구경하는 기분이 아마 내가 느끼는 느낌과 똑같을 것 같아! 하, 내가 살아 있다니, 살아서 숨 쉬고 밖을 구경할 수 있다니, 여보, 나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아!" 남편은 깔깔대고 웃으며 버거킹 메뉴를 물어봤다.


집 현관벨을 누르자 친정엄마가 "OO야~~"라고 소리치며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우리 둘은 얼싸안고 서로의 존재에 감사했다. 엄마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자고 했다. 그간의 내 삶을 눈동자처럼 인도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 올려드렸다. 버거킹을 우적우적 먹으며 엄마와 하하호호 그간의 날들을 추억했다. 그리고 겸허하게 어린이집 하원 후 귀가 중인 아들을 기다렸다. 여느 때처럼 외할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올 텐데,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아들이 까무러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때 현관문의 비밀번호 소리가 띡띡- 울렸다. 나와 엄마는 현관문 앞에서 대기했다. 문이 열리고 외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아들의 눈에 동공 지진이 일어났다.


"엄마!!!!!"

라는 외침과 함께 아들은 내 품에 뛰어들었다. 못본새 키도 더 크고 몸무게도 늘어서 무거워진 것 같은 아들 녀석은 자신의 얼굴을 엄마 볼에 한참을 비비며 "진짜 엄마야? 엄마 맞네? 근데 엄마 왜 울어?"라며 내게 행복 가득한 미소를 날렸다. 그동안 엄마와 떨어져 나름의 분리불안을 겪어낸 아들에 대한 사죄의 마음을 가득 담아, 나는 한참 동안 아들을 꼬옥 안은채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 가족들이 모여 경사스러운 오늘을 축하할 때, 아들은 내 손을 이끌고 자신의 장난감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에게 책을 읽어 달라며 책장에서 책 한 권을 뽑아 들고 온 아들의 손에는 내가 사랑하는 <엄마의 가슴>(15. 코로나, 녹슬어 버린 엄마의 가슴)이라는 책이 들려 있었다. 내가 이 책을 왜 골랐냐고 물어보니 아들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니깐.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으니깐."

이라고 답 했고,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는데 자꾸만 목이 메어서 읽기가 힘이 들었다.




그 사이, 나의 퇴원을 축하하며 여동생과 제부까지도 칼퇴를 하고 집으로 달려왔고 온 가족의 축하를 받으며 나는 다시 인간 OOO가 되어 가족들과 함께 했다. 그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했던 나의 SNS에 코로나 확진 문자와 함께 그간의 일을 적어 포스팅을 했다. 좋은 일이 아니다 보니 지인 몇몇만 알았던 사건이라서 많은 이들이 놀랐고, 많은 친구들이 위로와 용기의 글을 남겼다. 그들의 글에 하나하나 댓글을 달면서 생각했다. '나 진짜 현실로 돌아왔네. 나 진짜 살아있네.' 생각했다. 이토록 살아있음에 감사했던 적이 있던가.


밤새 잠을 자면서도 무슨 꿈을 그렇게 꾸는지 몇 번이나 "엄마"를 부르는 아들 덕에 이것이 꿈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불만 덮어주면 발로 뻥뻥 차는 아들 녀석이 혹여 감기라도 걸릴까 밤새 그 이불을 다시 덮어주느라 자꾸만 본능적으로 잠을 깨도 행복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엄마? 엄마 있어?"라며 외치는 아들의 목소리에 "엄마 여기 옆에 있잖아!"라고 화답하자 "휴, 다행이다~"라고 말하며 엄마 손을 끌어당기는 아들 덕분에 퇴원 후 첫날 나는 행복을 외치며 일어났다. 나의 코로나 옥중일기는 이렇게 해피엔딩이 되었다. 스물다섯 번째 날 동안 일어났던 좌절과 희망의 줄다리기는 희망의 승리로 끝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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