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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세상의 모든 소리에 환호하다

침묵 끝에 느끼는 세상의 시끌벅적 소리들


빵빵. 빵빵. 평소라면 눈을 흘겼을 시끄러운 경적소리마저도 드럼 소리처럼 경쾌하다는 생각에 스스로 코웃음이 났다. 위층 삼형제가 아침부터 내는 다다다다 뛰는 층간소음, 옆집의 커다란 개가 끙끙거리며 내는 옆간소음, 쌍둥이 손주들과 산책길에 나선 할아버지 한 분이 행여나 손주들이 다치기라도 할까봐 소리치는 말들, 도로정비라는 정당한 이유하에 온 땅을 흔들며 내는 굴착기 소리, 서로의 청력을 의심하며 누가누가 더 크게 말하나 경쟁 중인 어르신들의 대화까지, 평소라면 시끄럽다고 치부했을 세상의 소리들에 한없이 관대해진 내 마음이 신기하다. 서울의 소란함이 마치 유랑밴드의 이름 없는 노래처럼 흥겹기만 하다.


평소에 길을 다닐 때면 양쪽 귀에 에어팟을 끼고 좋아하는 음악으로 내 귀를 정화시키는 나인데, 코로나 확진자로 25일간을 병원에서 나홀로 격리되었다가 세상으로 나오니 내 귀에 들려지는 모든 소리가 밥 짓는 소리처럼 정겹다. 사람들이 부대끼며 내는 잡음까지도 지금 내가 세상 한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해 주는 사랑의 세레나데처럼 들릴 정도이니 말 다했지, 뭐. 그중에서 가장 달콤한 소리는 역시 우리 아들이 끝없이 나를 향해 부르는 녀석의 세레나데 "엄마!"이다.  "엄마, 나 물 마시고 싶어." "엄마, 우리 옥토넛 놀이하자." "엄마, 나 응아 마려워." 한없이 내 귀에 내리 꽂히는 "엄마!"라는 소리가 평소라면 지긋지긋하다 느꼈을 수 있지만, 요즘 날들의 "엄마!"는 청각장애인이 소리를 마주하게 되는 그 어떤 순간의 감격과 버금갈 정도로 감사한 소리이다.




가족 및 친구들에게 전화가 올 때 빼고, 내 스스로 음악을 듣겠다며 플레이 버튼을 누를 때 빼고, 그 외에 격리되어 있으면서 들었던 소리들은 식사 배식이 완료되었다는 안내방송이거나 의료 폐기물통을 배출할 시간이라는 안내방송이거나 내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그 후 마스크를 착용하고 나와서 식사를 가져가라는 간호사 선생님들의 말들이 전부였다. 차들이 내는 경적소리, 일상에서 들리는 수다 소리 등 모든 것에 차단된 채 지내야 했던 지난 날들 동안 내가 이토록 소리에 배고파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퇴원 후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갑자기 내 귀에 들리는 온갖 세상 소리가 너무나 신기했다. 다시 태어난 느낌이라는 말이 과언이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너무나 어색해서 남편의 질문에도 한참 동안 창 밖을 바라보며 귀에 꽂히는 소리들을 만끽했다. 묵언수행, 침묵수행과 같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 자들이 했을법한 그런 일들이 정말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무나 해 낼 수 있는 일들이 아님을 확신하며 내가 성인군자가 될 수 없음을 여실히 깨달았다.


세상의 모든 잡음이 지겨워 속세를 떠나 어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며 가볍게 내뱉었던 말들이 얼마나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처럼 가벼운 말이었는지, 내 나이 서른여덟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지만!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기에 말의 무게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겠으나, 소리가 가진 힘에 대해서 청각 장애인이 아니고서야 깨달을 일이 얼마나 있을까. 번잡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나만의 목소리가 아닌 타인과의 어울림 속에서 탄생한 소리는, 불협화음이든 코러스 화음이든 각각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걸 나는 알게 되었다.




퇴원 후 다음 날, 활동반경의 제약으로 상당히 둔화된 나의 소화기관 재생을 돕기 위해 동네 산책을 나섰다. 새로 이사한 동네에 있는 천을 따라 걸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요량으로 외투 주머니에 에어팟도 챙겼다. 요 며칠 <생견니>라는 대만 드라마 OST에 푹 빠져있는 나는 제일 첫 곡으로 손성희의 'someday or one day'를 클릭하며 행복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몇 발자국 가지 못해 나는 내 귀에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음을 인지했다. 뭐지? 하며 에어팟을 열어보니 충전이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아서 핸드폰과 연동조차 되지 않았다.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에잇-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곧 생각은 바뀌었다. 소리에 민감한 내가 소리를 접하지 못했던 그간의 날들을 만회하려면 많은 소리를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는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산책을 향한 발걸음은 다시 가벼워졌다.  


천을 따라 만들어진 산책길을 따라 걸으면서 시원하게 부는 바람에 나뭇잎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내는 소리에 나는 행복했다. 가을이라는 계절을 뒤늦게 만끽하고 있는 내게, 깍깍 거리며 울부짖는 까마귀 소리마저도 반가웠다. 졸졸졸, 사랑 가득 귀여운 소리를 내며 흐르는 냇가의 물 흐름 소리, 중간중간에 만나는 청둥오리들의 날갯짓 소리, 주인과 산책을 나온 애완견이 산책 중에 급히 서서 온 에너지를 쏟아 용변을 보며 나오는 경쾌한 소리, 자신이 원하는 사탕을 엄마가 사주지 않아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며 우는 세 살배기쯤 아기 울음소리 등 세상의 모든 정겨운 소리는 내 귀에 힐링을 가져왔다.


코로나 확진자인 딸 때문에 25일간 마음 편히 잠도 못 잤다는 엄마가 나를 위해 아침부터 토스트를 만들어 주겠다며 부엌에서 복닥이는 소리, 우리 집 커피 담당 아들 녀석이 커피를 내려 주겠다며 식탁의자를 끄는 소리, 에스프레소 원액이 컵 안으로 골인하는 소리까지 모든 것이 나에게는 선물로 다가왔다. 나는 마치 ‘영화 봄날은 간다'의 남자 주인공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 분)에 빙의라도 된 듯, 보이지 않는 커다란 헤드셋과 마이크 봉을 들고 다니며 세상의 소리를 수집하는 것 마냥 나의 작디작은 귓구멍 속으로 모든 소리를 밀어 넣었다.


하루아침에 청력을 잃는다는 기분, 하루아침에 청력을 되찾게 되는 기분, 실제로 당사자들이 느끼는 기분에 비하면 1% 정도밖에 되지 않는 미미한 감정일 테지만 며칠 동안 나는 그런 기분을 경험했다. 소리가 주는 행복감에 푹 젖어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만 들을 수 있는 다양한 소리들에 평안을 느꼈다. 그런 마음도 들었다. 내 입에서 나가는 소리들 중에 아름답지 않은 것들이 있다면 이렇게 힘들게 고생한 보람이 없을 것 같다는 그런 마음. 가끔씩 쏟아지던 거칠었던 내 말들은 코로나 확진이라는 필터를 거치고 한 생명을 살리는 귀한 말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소한 바람도 생겼다.




오늘 아침, 아들 녀석은 8시부터 "엄마! 엄마, 일어나! 아침이야!"라며 내 귓가에 고함을 쳤다. 그래도 나는 허허실실 웃었다. 이보다 사랑스러운 알람시계 소리가 있을까. 아들 녀석의 놀이방에서 신나게 놀며 맞은 아침, 나와 아들은 놀다가 지쳐 잠시 쉬는 시간을 갖자며 피아노 앞으로 갔다. 피아노 뚜껑을 열고 아들 녀석은 띵똥 띵똥 아무 건반이나 누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들에게 조금씩 피아노를 가르쳐 보겠노라 생각하고 있던 터라 녀석의 띵똥 거림이 귀엽게 느껴져 가만히 바라보며 온 귀로 흘러나오는 음표들을 만끽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집 현관벨이 '띵동'하고 울렸다. 시계를 보니 아침 9시 반이다. 택배가 일찍 배달왔네 생각하면서 현관문을 열였다. 낯선 사내는 커다란 개와 함께 부스스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아직 자기들 가족 전체가 잠을 자고 있는데 피아노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다는 일종의 민원이었다. 소리를 경험하는 기준은 굉장히 주관적인 것인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아들의 즐거움을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다.


예전의 나 같으면 당신들이 키우고 있는 집채만 한 개가 내는 끙끙거림의 소음은 밤낮없이 괜찮은지 진정으로 물어보고 싶었겠지만, 나는 그냥 넘어갔다. 그것도 하나의 아름다운 울림소리니깐. 세상의 모든 소리에는 감사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게 된 나라서, 옆집은 우리와 이웃으로 사는 동안 그걸 감사해야 할 거다.


- 산책길에 코스모스를 보고 알았다. 아,가을이로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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