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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스 Jul 05. 2024

한국에서 엘리베이터 매너란

나부터 인류애 충전


 

건립된 지 50년이 넘어 곳곳이 삐걱거리는 사무실 건물에는

창업한 지 최대 5년이 되지 않은 젊은 창업자들과

그 젊은 대표 밑에서 들들 볶이며 20대를 불태우는 MZ들이 가득했다.   


가끔 천장에 물이 새도, 가끔 화장실 물이 역류해도, 아주 가끔 금이 간 벽에서 정체 모를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도 젊은이들은 언젠가는 이곳에서 멋지게 탈출할 것이라는 꿈을 품고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그들이 참고 참아도 참아지지 않는 것은 느려터진 엘리베이터였다.

 

건물 1층에는 엘리베이터가 2대가 있었다.

이 육중한 기계는 평소에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사람들이 몰려드는 출퇴근 시간에는 바쁘고 쫓기는 빨리빨리 사람들의 무자비한 버튼 누름에 몸살을 앓았는지 (건물주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매우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출퇴근 도장을 늦지 않게 찍으려고 강아지를 부르듯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쉴 새 없이 눌러댔다. 그러면 엘리베이터는 마치 성질 급한 주인에게 반항하는 장난꾸러기 코커스파니엘 마냥 고층에서 멈춰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내려오곤 해 사람들의 진을 뺐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버튼을 누르던 사람들이 갑자기 버튼을 누르지 않는 때가 있다는 거였다.


그건 바로 엘리베이터를 탄 이후였다.




문이 열리고 기다렸던 사람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히며 우르르 몰려 타는 바로 그때.

이번 순서를 놓치면 다음번 엘리베이터를 또 한 참 기다려야 하는 걸 아는 사람들은 초과 인원을 넘어서까지 몸을 구겨 그 좁은 공간 안에 몸을 넣고 마는데, 그러다 보면 꼭 누군가는 마지막에 엘리베이터의 문에 꼭 끼고 말았다. 난 그 순간을 "삐 정원 초과되었습니다"라는 경고음보다 더 민망한 순간으로 느끼곤 했다.   



쾅.



은색 빛깔의 엘리베이터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집게발처럼 한 사람의 어깨를 양쪽으로 꾹 찌부한 후

 삐 소리를 내며 열리는 그 순간.

그러면 그 문에 끼인 불운의 주인공은 순식간에 얼굴이 벌게진 채 민망해했다.



내가 당사자가 아닐 땐

'아니, 왜 꾸역꾸역 타는 거야.'

'왜 문이 닫히려고 하는데 기어이 타고 마는 거야.'

했지만 당사자가 되니 생각이 달라지더라.


'아니 왜 문을 아무도 안 잡아주지?!!'







남 원망말고 나라도 문을 잡겠다 결심한 어느 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문지기를 자처하며  몸을 훽하고 틀었다. 그랬더니 아뿔싸 양 옆에서 밀려 들어오는 사람들의 진로방해가 되면서 이리저리 몸을 부딪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보니 양쪽에서 눈 째림을 당함과 동시에 문지기는커녕 엘리베이터 귀퉁이에 콕 박힌 생쥐 꼴이 되고야 말았다.



그때 깨달았다.



엘리베이터를 먼저 탄 사람은 문을 잡기보다는 안쪽으로 들어가야 했다. 다음 사람도, 그다음 사람도 역시 사람들에 떠밀릴 것을 생각해 안쪽으로 안쪽으로 찾아 들어가야 모두의 진로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무사히 꽉 들어차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누군가라도 몸을 돌려 문을 잡기란 매우 곤란하고 어려운 구조였던 셈이다!






사업 파트너로 만난 미국인 마크가 사무실을 방문한 날에도 어김없이 엘리베이터가 말썽이었다.


멀대같이 크고 헬스보이 같이 건장한 마크도 이 문제의 느려터진 엘리베이터 문에 꼭 끼여버리고 말았던 것.

엘리베이터와 마크의 근육(?)이 강하게 마찰하면서 하필 그날따라 굉장한 소음을 내며 문이 열렸다.  

 

"Oh, almost ended up being a sandwich."


마크는 문이 닫히자 벌게진 얼굴을 하고서 나를 내려다보며 오징어가 될 뻔했다고 기막혀했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은 왜 문을 잡아주지 않는 거냐고 원망을 쏟아냈다.


나는 그에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서울에 사람이 엄청 많잖아. 알지? 전 세계에서 서울이 인구 밀도가 3번째로 높은 거. 이곳에서 중요한 건 빨리야. '너도 나도 다 같이 타야 한다'보다는 '빨리 타서 빨리 올라가야 한다'가 먼저 포커싱 되어있기 때문인 듯."


그러니 누가 의도적으로 문을 안 잡은 것도,  

문이 닫히든 말든 누가 몸에 끼든 말든 상관을 안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한국인에게는 '먼저 타고 먼저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마음이 더 먼저 생긴 것뿐이라고


그러자 마크가 한숨을 쉬며 한마디 내뱉었다.


"오우 불쌍한 코리안!"










몸과 마음을 갈아 만든 스타트업 <로즐린>이
벤처인증 이후 올리브영의 K-BOX 브랜드로 선정되면서 사업 차 한국에 방문하는 외국인을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덕분에 향 원료와 제품 제조, 마케팅 등에 대한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을 하는 중인데 일 말고도 외국인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또 다른 기회이자 도전이 되었다. 특히  이곳, 한국의 맨얼굴을 외국인의 입장에서 자주 마주하는 일은 많은 고민거리를 가져온다.

나에게는 일상이어서 익숙했던 것들이 그들의 관점과 시선에서는 신기하고 흥미롭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문화인류학 박사처럼 혹은 한국 문화 전문가 마냥 그들에게 한국과 한국인, 한국 문화에 대해 설명하며 나 또한 새로운 깨달음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중이다. 

지금 한국은, 
'인류애 상실'이라는 단어가 만연하고 서로를 혐오하고 증오하며 불쾌한 존재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지만 누가 뭐래도, 내가 겪고 느낀 바로는
한국만큼 안전하고 인정 많고 효율적이고 편리한 곳은 단연코 없다.

물론 복잡하고 스트레스 많고 경쟁적이고 때로는 너무 빨라서 그 속도를 따라기가 벅찰 때도 있다.나도 한 때는 '한국은 싫어', '한국이 최악이야', '이래서 한국은 안돼.' 라며 자조하는 투덜이 스머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을 스스로 지옥이라고 명명하면 결국 지옥이 되는 법.

이 브런치를 통해 내가 가진 것, 내가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감사해하며
좀 더 긍정적으로 나와 주변을 바라보는 기록이자 기회가 되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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