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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May 06. 2024

사실은 괜찮지 않았습니다

10년이 넘도록 항우울제와 함께 살고 있다.

10년 그 이상의 해는 세지 않기로 했다.  


         



몸이 이곳저곳 아프며 늘 피곤했다.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닌 가 싶어 이런저런 검사를 해 봤다. 내과 선생님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시간 나면 병원 오지 말고 놀러 다니라고 했다.

춘천은 유독 안개가 많은 동네이다.

아이가 잠든 밤,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 15층 아래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자욱한 날들이 꽤 많았다. 안갯속으로 몸을 던지면 안개가 솜이불처럼 나를 받아 줄 것 같고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모든 고통은 사라질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든다. 나 그때 내 몸이 부서지는 것보다 아이가 일어났을 때, 엄마가 없다고 불안해하며 우는 장면이 상상되어 더 무서웠다.

내 이런 고충을 가족이나 친구에게 말해 봤자 무서운 말 하지도 말라고도 하고, 엄살 부리지 말라고도 했다.               





한 1년쯤 지나서야 이런 증상이 우울증이라는 걸 알게 됐다. 정신과를 찾아갔다. 정신과 선생님은 상당히 중증이라며 그동안 잘 버텨왔다고 했다.

그 후로 난 10년이 넘도록 단 하루도 항우울제와 수면제가 없이 잠을 잘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가 항우울제를 복용하는지 알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이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병이라고 해서 난 일부러 숨기지도 않았다. 내가 항우울제를 먹는다고 말해도 사람들은


"음, 그딴 걸 왜 먹어?"


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마치 멀쩡한 사람이 엄살을 부린다는 듯이.

그 정도 멀쩡해 보이기 위해 내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는지는 사람들은 차마 알지 못했다.               


과외 교습소를 운영하며 증상은 더 심해졌다. 학생들과 함께 있을 때는 열정적으로 수업을 하고 나서, 학생들이 돌아가고 나면, 바로 침대에 뻗기를 하루에도 두세 번씩 반복했다. 수업을 할 때의 나와 혼자 있을 때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15층에 사는 것이 두려워 2층으로 이사를 했다. 적어도 뛰어내리지는 않을 테니까.

이사를 결심한 후, 이사하기 전 일주일을 기억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내가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뛰어내리면 어떡하지.'

했던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로 버텼던 날들.


의사 선생님은 좀 쉴 것을 권했지만, 한 달 벌이 삶이었다. 학생들이 내는 회비로 월세, 양육비, 생활비를 쓰고 나면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또 일의 특성상 그렇게 쉬고 싶다고 해서 쉴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내가 한 달이라도 쉬겠다고 했으면 학생들 절반은 빠져나갔을 거다. 아이를 키우면서 쉰다는 건 제대로 쉬는 것도 될 수 없었기에 꾸역꾸역 버텨야 했다.

입시철만 되면, 학부모들은

 '선생님, 살려 주세요.'

라는 식으로 매달렸다.

마치 드라마에서 보는 수술실 앞 장면 같았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능력자도 아닌데, 매해 그렇게 시달려야 하는 삶이 버거웠다.


한 번은 공무원이었던 학부모가 자신이 우울증이 심해 휴직을 하게 되었노라고 하소연을 해 온다.

쉴 수 있어서 참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그 학부모를 적당히 위로하는 선에서 대화를 마무리한 적이 있다.

전화를 끊고 나는 더 우울해졌다.           





나도 이렇게 살고 있었는데, 아이 아빠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처참한 장례부터 집 비우기, 사망신고, 상속 포기, 채권자에게 보내는 답변서를 보내는 일까지 1년 여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나의 우울증도 더 심해졌다.

비틀비틀 겨우 걷고 있는데, 커다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 같았다.

아이가 대학에 갈 때까지만 이렇게 버티려고 했는데,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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