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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Oct 25. 2024

든든한 청년의 백허그는 엄마를 설레게 합니다

아들이 고1 때 함께 속초에 놀러 갔다. ‘가을 동화’ 촬영지를 둘러보면서 드라마 스토리를 얘기해 주었다.


“가난한 집에서 산 부잣집 딸은 억울할 만한 하네.”


아들은 이야기가 꽤 흥미로운지 가난한 집에서 살았던 인물에게 공감을 보였다.


“근데, 너네 엄마는 왜 여태 너 찾으러 안 오니?”


내가 농담 섞어 건넨 말에 아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너는 그런 생각 안 해봤니? 난 어렸을 때 그런 생각 많이 했는데. 부자인 진짜 엄마가 나 찾으러 언제 오나 하는 생각.”


세상에 부자 엄마보다 말 통하는 엄마가 훨씬 적을 걸.”


아들은 내 뒤에서 제 팔을 내 목덜미에 걸치며 이렇게 말한다.

아들의 말에 가슴이 푸근해졌다.


      

실제로도 아들은 점점 작고 초라한 집으로 이사하는 동안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시골집에서 낮은 천장을 보고 그냥 서서도 팔을 뻗으면 닿는다고 하며, 초라한 집 상태를 가지고도 유머 거리를 만들었고, 수시로 내게 유도 기술을 걸며 장난을 쳐 온다.

이삿짐을 직접 날라야 하는 상황에서도 싫어한다거나 우울해한다거나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이 고맙고 대견하면서도 제 나이보다 너무 일찍 세상의 고민을 떠안는 건 바라지 않았다. 제 나이에 어울리는 고민만 하며 살아갈 수 있길 바랐다.     





한참 예민할 사춘기 때에 아이들 사이에선 고가의 브랜드 점퍼가 유행하고 있었다. 아이가 사달라고 하면 사줄 생각이었지만 낭비라고 생각되어 그전에 한 번‘패션의 기본은 몸매’라고 말을 했었다. 아이는 그 말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그 말을 자주 하면서 자신은 핏이 좋아서 아무거나 입어도 멋지다고 하며 옷을  사달라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검소하고 무심한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어 기숙사에 있을 때, 내 생일이 되었다.

생일 자정이 되자마자, 아들은 ‘생축’단 두 글자와 함께 10만 원을 보내 주었다.

한밤중에 감동이 몰려온다.


-앗, 엄마 생일 기억하고 있었어?

-당근이지.

-감동~~

-주말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나 이제 폰 내야 됨.      


아들은 초등학생 때도 ‘엄마, 사랑해요.’나 ‘엄마, 낳아 주셔서 감사해요.’와 같은 오그라드는 말은 한 적이 없다. 무심한 듯하면서, 이런 식으로 감동을 준다.      


“난 너 같은 츤데레가 좋더라. 여자 친구 생겨도 이렇게 할 거야?”     


주말에 집에 온 아들에게 물으니, 여자 친구한테 그렇게 하면 차일 거라면서 여자 친구에겐 이벤트를 해 줄 거라고 한다. 뭔가 의문의 1패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런대로 좋았다.      

아들은 여학생들에게 몇 차례 고백(?)을 받은 적이 있지만, 아직 연애를 한 적은 없다.

연애는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하는 여자를 만났을 때 할 거라고 한다. 아직은 그런 친구는 없었단다.

호기심에 혹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가짜 연애’라도 하다가 쉽게 깨지고 할 나이인데 아들은 그러지 않았다.

(가짜 연애란 말은 유투버 이연이 한 말이다. 참 쉽고도 정확한 표현이라서 기억에 남는다)

난 종종 내 외로움을 가누지 못하고 ‘가짜 연애’를 한 적도 있는데, 그러지 않는 아이를 보며, 최소한 내가 아들을 외롭게 만드는 엄마는 아니었던 것 같아서 은근히 뿌듯했다.   



아들은 그 동안 내가 버틸 수 있는 이유이자 존재였다.


  

그런 아들이 이제 병장이 되어 제대를 앞두고 있는데, 제대 전에 입시를 치러야 한다.

학업에 관심이 없던 고3 때와 달리, 몇 달 전부터 아들의 한숨 소리가 점점 깊어진다. 제 인생에 대해 이제 제법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늘 안쓰럽다. 그래도 이건 보통 청년의 고민이겠지? 지금은 그저 묵묵히 응원할 뿐이다.

아마도 내년엔 집을 떠나서 자신의 인생을 펼치며 살 것이다. 그러다 지치면 집에 와서 잠시 쉴 수도 있어야 할 텐데.     





난 대학을 졸업하면서 집을 떠났는데, 얼마 안 되어 엄마가 이사를 하는 바람에 내가 살았던 고향집이 사라졌다. 그때부턴 객지 생활에 지쳐 집에 가도 우리 집 같은 편안함이나 안락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아직도 시골에 고향집이 남아 있는 친구들이 무척 부럽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미안한 것이, 하도 이사를 자주 다니는 바람에 아들에겐 고향이다 싶은 장소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없는 걸 계속 미안해 한들 뭐가 달라질까. 고향이라고 할만한 물리적인 공간은 없지만, 따뜻한 엄마 품이 있는 곳이 아들에겐 마음의 고향이 될 것이다.



아들이 언제든지 쉬고 싶을 때 찾을 수 있는 고향이 되기 위해 엄마는 더 단단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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