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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너무 빨리 사라져요."
그의 방학은 반이 지났다. 오복이는 오전 9시에 시작하는 학교 도서관에 일등으로 간다. 오후에는 요리, 농구, 배드민턴, 축구 등 방과 후 활동을 하며 매일 출근 중이다. 집에서는 당연히 쉬지 않는다. 혼자 방에 들어가 역할극 하는 30분 정도는 필수로 확보해 놓고, 그 외 체스, 바둑, 장기, 보드게임 등을 가져와 틈틈이 엄마의 뇌 주름에 긴장감을 선물한다.
매일이 행복한 아이지만 특히 월요일 요리 시간은 굉장히 소중하다. 나중에 얼마나 다정한 남편이 되려는 건지, 먹는 재미보다는 가족에게 대접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인지, 열과 성을 다해 그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아빠의 귀가 시간을 체크하며 아빠 몫을 따로 챙겨 놓는다. 최애씨는 새벽같이 와도 정성스러운 수십 장의 인증샷을 남긴다. 입을 크게 벌린다거나, 아저씨의 필수 포즈 엄지 척을 포함한 다양한 우스운 포즈가 보는 재미를 더하며, 맛에 대해 진지한 피드백을 주기에 아이는 손꼽아 다음날을 기다린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빈 상자를 확인하고, 상상만으로도 행복한지 제자리에서 뛰는 아이는 그렇게 아빠만의 다정함을 기대하고 기억한다.
"아빠, 오늘은 언제 오세요? 오늘은 장기도 두고 싶은데..."
지난 주말, 장기 시간을 기다렸지만 잠이 든 아빠를 깨우지도 못하고, 왔다 갔다 주위를 서성이며 아비의 눈이 떠지기를 기다리다 마음을 접은 오복이가 나지막이 말한다. 다행히 최애씨는 아들과 장기를 둬야 한다며 약속을 취소했다. -자랑스럽게 약속을 취소한 카톡 대화를 보여주며, 주머니에서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캔을 꺼낸다. - 골프로 귀가 준비 운동을 마친 최애씨의 머리는 땀에 흠뻑 젖어있다. 쉼 없이, 아들의 취침 시간을 맞추려 바로 앉아 게임을 시작한다.
"오빠, 장기랑 체스랑 비슷해. 바둑도 배워. 오복이랑 같이 해." 아빠랑 많은 것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오복이를 위해 메시지를 던진다.
"이 나이에 뭘 더 배워. 아빠랑은 장기 많이 두자." 언제는 젊은 척, 언제는 늙은 척, 그의 마음은 자유자재다. 웬일로 칭찬과 질문을 섞어가며 나긋나긋이 말하는 모습이 족집게 과외하는 듯하다. 마주 앉아 경청하고 있는 아들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어미의 눈에는 눈물이 차오른다. 오랜만에 바람직한 아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까. 넘쳐흐르는 기쁨을 애써 조절하며 집중하는 오복이를 보고 있자니 최애씨가 기특하기만 하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하고 있다고 최애씨에게 말해주는데, 그가 속삭인다.
"얘가 안 끝내." 흠... 백 년 만에 노력하려니 지구력이 딸리는 아빠다.
오복이는 아빠가 더 좋아졌다. - 사실 아빠란 존재를 무서워하지 않음이 확실하다. 말을 계속 안 들으니.- 작년에 두어 번 쓴 일기의 행방은 무시하고, 방에서 새 교환일기장 들고 나온다.
불 하나 켜진 어두운 거실에서 소주잔을 채워놓고 진지하게 답장을 썼던 작년의 최애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 해가 지나 그도 자란 것일까. 업데이트된 축구 게임에 매일 실망 중인 최애씨는 게임 대신 눈앞에 놓인 아들의 일기를 집어 들었다. 과하게 바른 자세로 앉아 답장을 써 내려가는 그의 모습에 비로소 리얼 아빠의 모습이 살짝 보여 자연스레 웃음이 번진다.
사실, 최애씨는 평소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는다. 주말에도 "나 할 거 없지?"하고 다른 계획이 없으면 본인 취미를 즐긴다. 그는 아이들과 나와의 약속은 우선으로 지키며, 양보다 질을 중시하고 오롯이 주어진 시간에는 최선을 다한다. 그리 긴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음에도 아빠에 대한 아이들의 사랑은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눈덩이가 되어 몸집을 불려 간다.
뭐든 하고 싶은 그녀, 오팔이는 오빠에게 배운 바둑을 알려주겠다고 바둑판을 챙겨 나왔다.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는 부자를 견제하는 것인지 큰 목소리로 말한다.
"자, 못하는 사람이 흑이니까, 엄마가 흑 맞죠?" 가르쳐 줄 생각에 신이 난 오팔이는 바둑돌을 섞어 빠른 속도로 하나씩 내려놓는다.
"흑, 백, 백, 흑. 이렇게 외쳐야 해요. 큰소리로요!" 틀리면 혼날 듯 힘이 잔뜩 들어간 오팔이의 눈을 보고, 어른이는 긴장하기 시작한다. 바둑돌이 다 떨어질 때까지 마지막 남은 집중력의 바닥을 긁어가며, 빠른 속도로 눈앞에 떨어지는 흑돌과 백돌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리고 7살 스승께 칭찬을 받고야 만다.
"잘했어요."
기계적으로 수건을 개고 있는 엄마 옆, 심심한 오팔이가 내 다리를 감싸고 어설피 눕는다. 엄마 얼굴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라며 위치를 잡는 오팔이다. 사랑을 퍼주는 아이에게 감사하며 베개와 담요를 덮어주고 통통한 볼을 만져본다.
"엄마, 지금 오팔이한테 마음 써주고 있는 거죠? 고맙습니다." 내 사랑이 전해진 걸까. 그 마음을 고스란히 흡수하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는 아이.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생명체가 있을까.
"응, 엄마 마음은 다 오팔이 꺼야. 오팔이 다 가져. 사랑해."
오팔이의 주도로 잠들기 전 '오늘의 감사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자, 내가 먼저 이야기할게. 유치원 체육 시간이었어. 다리를 넓게 벌려서 다리를 건너는 활동을 했는데 잘 안 돼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어. (나 그래도 요새 잘 참는 건 알죠?) 그때! 가족들이 내 마음 안에서 할 수 있다고 계속 크게 외치면서 응원해 줬어. 덕분에 버티고 끝까지 해냈지! 엄마, 오빠, 아빠! 힘내라고 해줘서 고마워요." 어두웠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눈은 반짝였다. 그녀에게 가족은 요정이었다. 요정들의 응원에 힘을 얻고 그 말을 믿으며 경험하는 아이가 대견하고 부러웠다. -나 자신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 마흔 살로써는 더욱이 말이다. 잡다한 생각이 많은 나는, 누군가에 의해서 흔들렸던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나를 흔들고 있었다.- 아이들의 감사한 외침은 언제부터인가 어른이의 배움의 시간으로 변해가고 있다.
오늘도 각자의 세계에서 고군분투하고 따뜻한 안전지대로 무사귀환할 내 사람들과 서로 가시 같은 말 대신 따뜻한 말과 행동의 씨앗을 전해 보는 건 어떨까. 마음의 텃밭에 오래도록 예쁜 꽃들이 만발하기를 바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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