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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싸 May 27. 2021

물 쓰는 특권

'모리스디페렌테'(다른삶)10

모리스 디페렌테 Moris Diferente. 동티모르의 2개 공용어 중 하나인 테툰어로 '다른 삶'이란 뜻이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발리섬 아래쪽, 호주의 위쪽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다. 근 5백 년에 가까운 식민지에서 21세기 초 독립한 나라로, 한국에는 상록수 부대 파견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은 내가 2013년부터 일하고 생활한 곳이자, 가족을 꾸린 곳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삶들에 대해 무척 많이 생각하게 되는 곳이다. 낯선 땅, 다른 삶, 이상이 현실에 부딪치는 순간순간의 일들을 여기 기록한다. 

2015년 11월. 건기가 절정일 때다. 

로스팔로스의 한국인 이웃이자 친구인 K네 집의 우물이 마른 지가 어언 2주 정도 되었나, 점심시간에 집에 오니 우리 집도 물이 안 나온다! 집주인 할아버지께서 우물이 말랐다고 하신다. 다음날 기술자를 불러 우물을 더 깊게 팔 계획이라며, 그때까진 미안하지만 좀 기다려 달라고 하신다. 곧바로 할아버지네 공장의 일꾼 아저씨들이, 옆 우물서 길어 온 갤런 5통 분량의 물을 올려다 주셨다. 

정말 내일 우물이 파질까, 우물 파면 바로 물이 나올까 하는 걱정은 든다만... 어쨌거나 K네 집주인에 비하면 우리 집주인 할아버지는 양반 중의 양반이다. 

K네 집주인은 처음엔, 이 근방에 우물 파는 사람이 한 명 밖에 없는데 연락이 안 된다, 시골 가서 안 온다는 둥 매일 말도 안 되는 핑계만 대다가, 이젠 우기가 되어 비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있다. 알아서 물을 길어 쓰라나! 처음부터 물을 길어다 써야 하는 조건이면 모를까 (그렇다면 애초 그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겠지!), 집 임대 조건에는 엄연히 물 사용이 포함되어 있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물 파는 데 돈이 드니 핑계만 대는 것이다. K가 내는 임대료면 우물을 더 파고도 남을 텐데! 비 올 때까지 기다려라 하는 태도라니! K네 옆집 사람들도, 우리 동네 사람들도 모두 '돈을 내고 집을 빌려 쓰는 것이면, 물은 당연히 집주인이 해결해 주어야 하는 것'이라며, K 대신 씩씩 거린다.

 

그에 비하면 우리 집주인 할아버지는 정말 양반이고, 뭐, 또 사실... 

우리 집으로 연결된 우물이, 우리 집 아래 1층의  '할아버지 사업체 = 갤런 생수통과 벽돌공장' 에도 가야 하니, 할아버지도 알아서 서두르실 것이긴 하다만… 그래도 편안하게 물 쓰다가 물이 딱 끊기니 신경 쓰이는 것은 사실. 

안 그래도 우물에서 물 길어다가 집까지 옮겨 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물 끊기니 그런 광경이 더 예사롭지 않다. 물 나오는 우물이 줄어드니, 그나마 물이 아직 나오는 우물 앞의 줄이 더 길어졌다. 다들 몇십 분은 기본, 줄 서서 폐식용유통 10개씩 물을 담아 수레나 머리에 이고들 옮긴다. 더운 날씨도 더운 날씨이지만, 물 때문이라도 얼른 첫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건기, 우리 집 앞 풍경. 땅은 바짝 마르고, 우물도 마른다. 열대 나무들은 적응이 되었는지, 푸릇푸릇~



능력자이자 지역 유지인 우리 집주인 할아버지는 단 이틀 만에 2미터를 더 파셨다. 이제 20미터 정도가 된 우물이, 기존보다 더 맑은 물을 드러낸 것이 금요일 오후. 그때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다시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고, 샤워기로 샤워를 하니 세상에 그렇게 좋을 수 없다. 

공용 우물에 가서 기다렸다, 바리바리 물을 길어 다시 무겁게 집까지 옮겨야 되는 경우가 꽤 많은 여기에서 (게다가 우물에서 물 긷는 것도 힘들다. 손 도르래인데 꽤 무겁다), 전용 우물에, 물 끌어올리는 발전기에, 대용량 저장 탱크가 따로 있어 집안에서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바로 나오는 우리 집은, 한국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스팔로스 타워팰리스” 수준이다. 


게다가 우리 집은 무려 온수기가 있다! 

몸에 탈이 났을 때, 뜨거운 물 샤워를 하면 정말 좋다. 내 평생, 온수 샤워를 이렇게 감사하게 특권으로 생각하면서 살았던 적이 있나 싶다. 로스팔로스에서 내가 아는 집 중, 온수기 샤워를 할 수 있는 집은 드물다. 온수기는커녕, 많은 주민들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쓴다. 

이곳에서 내 물 쓰임의 패턴을 혁명적으로 줄이는 것은 안된다만, 나 역시 최대한 아껴 쓰는 것이 자연스럽게 된다. 매일 보는 내 이웃이나 친구들의 일상이 있으니 겸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그동안 있었던 곳에선 당연한 '온수 샤워'라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곳이 더 많다는 것을 매일매일 보게 되니, 이를 무시할 수 없다. 한국에서나, 여기에서나 그래도 나는 뜨거운 물을 쓸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사실 이번처럼 물이 떨어져도 주인집 할아버지가 일꾼들 시켜서 집안까지 깨끗한 물을 길러다 주니, 물 사용에 크게 불편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편해지려고 하면 한도 없고, 익숙해지는 것도 금방이다. 좀 부끄럽고 스스로 간사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만, 샤워기 아래서 편히 쓰던 뜨거운 물 대신, 대야에 받아서 쓰는 것이 그새 불편하다.


로스팔로스 중심가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아름답고 외진 마을 오무까누. 마을 양쪽 끝에 우물이 2개 있어, 아침저녁으로 물을 길러 가는 건 주민들의 일상.


우물에 물 길러 오고 가는 길은 아주 아름답고, 아주 숨이 차다 (오르막길!)


... 우물을 더 깊게 파고 난, 딱 다음날, 점심때. 

반일 반갑게 나오던 물이 딱 끊겼다. 주인 할아버지가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우물은 문제가 없는데 물을 끌어올리는 발전기가 고장이 났단다. 산 넘어 산이네. 발전기는 금방 고칠 수 있단다. 단, 수도 딜리에서 아직 교체 부품이 오질 않았다고. 그동안 쓰라고 다시 갤런 통에 물을 올려다 주셨다. 

다행이다 - 처음으로 물이 끊겼을 때처럼은 조바심이 나지 않는다. 고새 많은 부끄러움과 감사, 그리고 손톱만큼의 인내심이 생겼으니, 차분하게 기다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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