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집과 이상한 수업

생기 세계의 아이들 01

by 마싸

주로 아이들과 놀다가 머릿 속에서 떠오르는 상상을 조금씩 이어붙였습니다. 그러다 보면 주위 사람들에게 들은 소소한 이야깃거리나 뉴스에서 보는 현실의 이야깃거리들도 희한하게 같이 달라붙어서, 이야기들이 점점 더 머릿속에서 살아났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찰흙 덩어리였는데, 자꾸 이런 저런 모양새가 만들어지고, 그 모양새들끼리 이야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모험도 하다보니, 머릿속에서 끄집어 내어 한 번 써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첫째가 8년 후 쯤에는 읽을 수 있는 재미난 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소위 '저 세상' 존재 (귀신이나 영혼이나 기타 등등)들은 왜 우리 옆에 있으려고 하는 걸까?' 와 같은 단순한 질문에서 가지치기를 한 머릿속 상상은 자꾸 커져서, 나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꼬리표를 붙이자면 '아동 판타지 소설'이 되겠지만, 엄마인 어른의 입장에서 던져보고 싶은 현실의 문제들도 같이 붙여 내었습니다.


그 집은 학교 가는 길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학교로 향하는 큰길 뒤쪽의 골목길이었다. 큰길에서 한 블록 뒤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조용한 길이라고 보비는 생각했다. 아마 집들이 다닥다닥하게 붙어 있는 바로 옆 골목길과는 달리, 집들 사이의 간격이 꽤 떨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집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는 꽤 높았지만, 군데군데 빈틈이 있는 얇고 긴 쇠 울타리여서 집이 꽤 잘 보였다. 집 앞과 옆은 꽤 울창한 나무와 덤불이 제법 넓게 둘러싸고 있었고, 집 뒤로 보이는 높게 솟은 나무들도 몇 그루 보였다. 그 때문인지, 그 집은 꼭 숲 속의 집처럼 보였고, 그래서 주위 집들과는 달리 혼자 뚝 떨어진 느낌마저 들었다.

보비가 그 집 쪽으로 가게 된 것은 같은 반의 귀찮은 녀석들 때문이었다. 별다를 것 없는 어느 오후, 학교가 끝난 후 깜빡 잊고 온 책을 가지고 교문으로 다시 걸어 나올 때였다. 보비는 같은 반의 ‘3 머저리’가 바로 조금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며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3 머저리’는 보비가 혼자 부르는 별명으로, 키와 몸집이 소-중-대인 남자아이 3명이다. 하는 짓이 열두 살이라고 믿을 수 없이 똑같이 멍청한 남자애들로, 수업 시간에 떠들기, 가만히 있는 아이들에게 괜히 쓸데없이 장난치기 (간혹 울리기), 특히 얌전하고 말 없는 아이들 한두 명 괴롭히기 등등을 즐기는 애들이다. 보비와는 특별히 어울리지도, 사이가 나쁘지도 않은 아이들이었지만, 보비는 이 아이들이 싫었다. 행여나 아무도 없는 길에서 마주치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보비는 평소 가던 큰길 대신, 바로 앞의 골목길에서 방향을 틀었다.


오후 3시가 조금 되기 전의 화창한 봄날. 골목길은 편안하게 조용했다. 딱히 북적일 만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원래 이렇게 조용한 곳일 거라는 느낌이 드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 골목의 끄트머리에 그 집이 있었다. 처음에 보비는 이런 데 웬 공원이 있나 싶었는데, 다시 한번 보니 나무들 사이로 분명히 집이 보였다. 얼핏 집 자체는 평범해 보였다. 앞에서 보면 창문이 예닐곱 개 있고, 창문들 한가운데 현관문이 있는 3층짜리 집이었다. 그런데 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걸까라고 보비는 잠시 생각했다. ‘숲 속의 집 같아서 그런 건가, 아니야, 그러기엔 뭔가 더 이상한데...’라고 생각하며 보비는 집을 들여다보았다.

“아, 그래서 그런가...”

보비는 커다랗고 동그란 눈을 가늘게 뜨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보비는 보통 키에 보통 몸집이었지만, 눈만은 무척 크고 반짝거려서 시선을 끌었다. 눈뿐만이 아니고, 얼굴 또한 이국적인 면이 도드라져서, 사람들은 금방 보비에게 이방인의 혈통이 섞였음을 알아봤다. 보비는 그런 시선에 익숙해져 있고, 또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또래보다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 보비는, 얼마 전에 읽은 책에 나온 단어를 엄마에게 물어봤었는데 뭐였더라 하면서 잠시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래, 이... 질적 이야. 이질적. 이 집은 이질적이야.”

이질적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기억해 낸 것에 뿌듯해하며 보비는 혼자 소리 내 말해 보았다. 이질적이란 것은, 서로 다른 것, 서로 성질이나 성격이 다른 것들이라고 엄마가 설명해 주셨다. 보비에겐 그 집이 그래 보였다. 집의 지붕은 색이 바랜 붉은색의 기와로 덮여 있었는데, 군데군데 깨진 빈 구멍도 몇 개 보였다. 비가 조금이라도 오면 당장 집 안으로 물이 새고도 남을 정도의 구멍들이었다. 벽 역시 원래는 노란색이었을 것이나, 전체적으로 색이 많이 바랬을뿐더러, 중간중간 벗겨져 낡은 티가 많이 났다. 문과 창틀은 나무였는데, 역시 낡아 보이고, 군데군데 뚫린 조그만 구멍들도 보였다. 이렇게만 보면 폐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유리창은 모두 반짝반짝 새것 같았다. 깨진 곳도 없고, 누가 신경 써서 잘 닦은 것처럼 아주 깨끗했다. 그리고 유리창에 달린 커튼이며, 유리창으로 들여다 보이는 고양이 장식 인형 몇 개 역시 반질반질 윤이 나 보였다.

이상하다고 보비는 생각했다.

‘버려진 집 같은데, 깨끗이 청소한 반질반질한 느낌이 나다니 말이야. 그리고 나무들도 정말 커. 다른 집들도 나무가 있지만, 이 집 나무들은 정말 크구나. 잎도 무척 많고. 꼭 정글 같아.’ 보비는 잠시 가만히 서서 집을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집 앞에서 웬 공이 하나 툭 하고 튀어나와 보비 앞으로 또로로 록 굴러왔다. 얼떨결에 공을 잡아 든 보비는 집 쪽을 쳐다보았다. 창문이나 지붕에서 툭 떨어진 것은 분명 아니고, 앞쪽에서 튀어나온 건데,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하고 보비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디선가 굴러온 것이 아니다. 꼭 누군가가 방향을 겨냥해서 던진 것처럼 툭 하고 튀어나온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하고 보비는 생각했다. 공이 튀어나온 것 같은 쪽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봐도 헷갈렸다. 기다란 쇠 울타리는 군데군데 틈이 나 있어서, 그 틈을 통해 공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렇지만 울타리 뒤는 그냥 덤불이 무성해서 누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손에 공을 든 채로 보비는 잠시 서 있었다. 공은 꽤 새것처럼 보여서, 들고 가거나 버리거나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주인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한 보비는 최대한 힘껏 팔을 뻗어 울타리 너머로 공을 던졌다. 울타리가 생각보다 높아 공은 아슬아슬하게 울타리를 스쳤지만, 어쨌거나 울타리를 넘어 집 앞 덤불들 사이로 사라졌다.

‘희한하네. 공이 떨어지는 소리가 안 들리네. 뭐... 수풀 사이에 걸린 건가’

바스락 소리도 안 나는 것에 잠시 갸우뚱하다가, 보비는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톡 또로로록...

뒤를 돌아본 보비는 놀랐다. 보비가 서 있던 자리에 공이 다시 멈춰서 있었던 것이다.

‘대체 뭐야?’라고 좀 놀란 보배는 잠시 공을 쳐다보다가, 다시 들고 던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잠시 기다렸다. 역시나 공은 덤불 속으로 사라졌지만, 공이 떨어지는 소리나 공이 덤불을 스치는 바스락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보비는 좀 더 기다렸다.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었다. 보비는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톡 또로로록...

돌아보기도 전에 보비는 공이 다시 그 자리에 나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보비는 공을 손에 쥐고 큰 소리로, 하지만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 있어요?”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었다. 보비는 다시 물었다.

“누구 있어요? 저... 공을 여기에 버리시는 건가요?”

역시 아무런 기척이 나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너무 환하고 화창한 대낮인 데다가, 그 집의 유리창이 반짝반짝하고 깨끗하게 닦여 있어서 그런지, 커튼이며 장식 인형이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져서 그런지, 아무튼 아늑하고 포근하고 다소 나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보비는 잠시 망설이다가 울타리의 벌어진 틈으로 나와 있는 덤불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내밀어 덤불을 젖혀 보니 집과 마당이 일부 보였다. 사람도 동물도 이상한 다른 것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보비는 공을 최대한 깊숙이 덤불 속에 밀어 넣고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뒤로 물러나서 외쳤다.

“공은 여기에 둘게요.”

잠시 있다가, 보비는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톡 또로로록...

똑같았다. 공은 다시 길 쪽으로 굴러 나와 있었다.

보비는 다시 공을 집어 들었다.

‘참 나... 어쩌자는 거야. 난 남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가지 않는다고. 새 공인데... 그냥 여기 길에 두면 누가 들고 갈 수도 있고, 또 자동차가 지나가면 위험할 텐데...’

보비는 얼굴을 잠시 찌푸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제가 잠깐 들어갈게요. 가서 공을 놓고 오게요.”

보비는 예의상 잠시 기다렸지만, 어떤 대답이나 인기척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보비는 우선 문을 쳐다보았다. 울타리 사이에는 철문이 하나 있었지만, 딱히 특별히 튼튼해 보이거나 안전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나마도 중간에 틈이 벌어져 있었다. 열쇠 구멍과 손잡이도 있었지만, 초인종은 없었다. 보비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까 공이 툭 튀어나온 덤불 쪽으로 다가갔다. 연한 초록색의 잎들은 무성했지만, 가시도 없고 부드러운 잎들이어서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비는 몸을 조금 구부리고, 손을 앞으로 내밀어 수풀을 헤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는 수풀이 더 무성하다고 생각했지만, 보비는 곧 수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보비는 한 손에 공을 들고, 바로 눈 앞에 나타난 집을 쳐다보았다. 보비가 나온 쪽은 집의 왼쪽 끝 모서리 쪽이어서, 집의 앞면과 옆 면이 보였다. 집 뒤에는 앞 면보다 더 무성한 수풀이 펼쳐져 있어서, 정말이지 꼭 숲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참 조용하다. 이 골목이 원래 이렇게 조용했었나. 그러고 보니 이쪽으로는 한 번도 온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그런데 이 집은 정말 조용해. 마당도 그렇고...’

정말이지 주위는 무척 조용했다. 하지만 집이 왠지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처럼, 집을 둘러싼 수풀도, 마당도 조용했지만 으스스한 느낌은 결코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나 아이들이 떠들고 쿵쾅대며 뛰어다니는 소리, 청소기나 세탁기 소리 같은, 집에서 날 법한 소리들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지만, 가만히 귀 기울이면 간간히 부는 바람에 사라락 대는 풀잎 소리며,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가 들렸다. 햇빛이 풀밭에 내려쬐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기분 좋게 나른한 조용함이었다. 희미하게 향긋한 꽃 냄새도 났다. 고개를 두리번거려서 찾게 될 정도의 진한 향기가 아니라, ‘여기 어디 꽃나무가 있나 봐’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 정도의 풋풋한 향내가 났다.

기분 좋고 조용한 집이라고 생각하면서, 보비는 새삼 누가 살고 있는 집인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어쨌거나 남의 집에 들어온 것이기에, 보비는 어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에 공을 놓아둘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던 보비는 집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웬 자전거야. 와, 정말 번쩍거린다. 누가 열심히 닦았나?’

보비는 잠시 눈 앞에 놓여 있는 자전거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겼다. 약간 어두운 빨간색의 자전거인데, 아주 어린이용 세발자전거도 아니고, 성인용의 높은 자전거도 아닌, 중간 크기 정도의 자전거였다. 가게에서 금방 산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의 반짝임이 느껴졌다. 바퀴에는 흙이 묻어 있고, 갈색 가죽의 손잡이와 안장은 분명 쓰고 닳은 티가 나서, 새 자전거는 아닌 게 확실했다. 하지만 몸체는 어찌나 반짝이는지, 원래의 어두운 빨간색이 물을 머금은 듯이 보일 정도였다. 열심히 닦아서 반짝거리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빛이 나오는 것처럼 반짝인다고 보비는 생각했다. 그런 빛나는 느낌 때문인지 자전거는 그리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척 눈에 뜨였다. 보비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입을 약간 벌리고 자전거를 쳐다보다가 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전거의 두 손잡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이쪽저쪽으로 돌려보았다. 신기하게도 자전거가 조금 움직이니깐, 자전거 속에서 더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정말 멋진 자전거야. 이런 자전거는 본 적이 없어’

라고 생각하며, 보비는 자기도 모르게 자전거에 올라탔다.

‘살짝만 앉아 봐야지. 그리고 나선 얼른 집에 가야 해. 늦게 가면 엄마가 걱정하실 텐데’

라고 보비가 생각하는 사이, 뒤에서 톡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자전거 손잡이를 잡은 채로 뒤를 돌아본 보비는 공이 굴러가는 것을 보았다. 보비가 자전거를 잡느라 땅에 놓아두었던 공이 집 뒤쪽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어, 이런. 야! 거기 서!”

라고 외치면서 보비는 자연스럽게 페달을 밟았다.

‘뭐야, 나 지금 공한테 거기 서라고 이야기를 한 거네?’

라고 혼자 피식 웃으며, 보비는 공이 굴러가는 쪽으로 자전거를 향했다.

‘와, 이 자전거 진짜 멋져. 엄청 부드럽게 굴러가는데. 그냥 푹신푹신한 평평한 길을 가는 기분이야... 정말이지 너무 부드러운데? 땅을 밟는 게 아닌 것처럼 부드럽게 굴러 가.’

라고 생각하며, 보비는 앞바퀴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바보 같지만, 정말 바퀴가 땅을 딛고 굴러가는 게 맞는지를 확인고 싶어서 시선을 내렸다. 그때 자전거가 무척 빠른 속도로 휘익 수풀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보비는 다시 눈을 들었다.

‘뭐야, 이거! 언제 수풀이 나타난 거야?!’

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보비는 다시 수풀 밖으로 나왔다. 다행이야라는 생각도 잠시, 보비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보비가 자전거에 탄 채 서 있는 곳은 아주 야트막한 언덕배기 위였기 때문이다. 아래쪽에는 사방이 탁 트인 들판에 온통 잔디며 꽃들이 피어 있는 광경이 내려다보였다. 보비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뒤를 둘러보았다. 뒤에는 방금 보비가 지나온 수풀이 무성하게 있었고, 그 뒤로는 아까의 집이 보였다.

‘아, 근데 아까 집 앞쪽에서 볼 때는 엄청 큰 나무들이 있는 것 같았는데. 내가 잘못 본 건가? 이 집 뒤에 이런 들판이 있다니. 난 이 집이 있는 골목길 뒤에는 다른 골목길이 있는 줄 알았는데...’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보비는 이젠 정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늦으면, 엄마가 무척 걱정하실 것이란 생각에, 보비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아, 참, 공! 뭐야, 저기 있잖아. 얼른 공을 주워서 집 쪽으로 나가야 되겠어.’

라고 생각하며, 보비는 언덕배기 아래로 자전거를 움직였다.

공은 자전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마자, 다시 앞으로 굴러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조그마한 언덕을 하나 쑤욱 넘어서 사라져 버렸다.

보비는 투덜대며 공을 뒤쫓아 언덕을 넘었다. 언덕을 넘자마자, 바로 왼쪽에 웬 건물이 하나 나타나서 보비는 깜짝 놀랐다. 아까 집 뒤쪽에서 볼 때는 안 보였는데, 언덕 뒤에 가려졌었나 라고 생각하며 보비는 자전거를 멈췄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건물은 밝은 하얀색의 깨끗한 1층으로, 따뜻해 보이는 벽돌색의 지붕에, 꽃 화분이 놓여 있는 통 창문이 아주 탁 트인 느낌이 들었다. 통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는데, 그 틈으로 안의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보비는 좀 더 다가갔다.

안은 커다란 방 하나로, 유치원 놀이공간이나 요가 교실처럼 마룻바닥이 깔리고 가구가 별로 없는 탁 트인 공간이었다. 앞에서 누군가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10명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들과 동물들이 앉아서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고 있었다.

‘뭔가 좀 이상해.’

라고 보비는 좀 더 자세히 본 후 생각했다.

일단 사람들의 옷이 특이했다. 그냥 거리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옷을 입은 사람들도 있고, 꼭 무슨 분장을 한 것처럼 입은 사람도 있었다.

‘저런 옷은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TV에서는 본 것 같은 옷인데... 저런 꼬불꼬불하고 커다란 가발이라니. 그리고 저 레이스를 좀 봐. 저 아저씨는 또 어떻고? 저건 도대체 무슨 옷이지? 아주 커다란 보자기를 그냥 온몸에 칭칭 두른 것 같잖아. 머리에 쓴 건 또 뭐지? 헤어밴드인가? 그런데 뭐가 저렇게 주렁주렁 달렸담.’

처음에는 사람들의 다양하고 신기해 보이는 옷과 장신구에 눈을 빼앗겼지만, 곧 보비는 같이 앉아 있는 동물 몇 마리들도 좀 특이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개도 있고, 고양이도 있고, 보비가 이름을 모르는 털북숭이 동물도 한 마리 있었는데, 이 동물 모두 다 꼼짝 앉고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있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정말로 알아듣는 것 같아. 주인이 훈련을 정말 잘 시켰나 보네. 저렇게 꼼짝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다니. 옆 집 개는 항상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짖고 하는 것 같던데. 저 개 좀 봐. 꼭 사람같이 앉아서 듣는 것 같아. 저 동물은 뭐지? 수달이나 오소리 같이 생긴 것 같은데... 그런데 수달이나 오소리가 원래 저렇게 큰가? 사람처럼 앉아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건가? 아니 근데 도대체 뭘 저렇게들 열심히 듣는 거지?’

보비는 넋을 잃고 방 안을 보다가, 마침내 제일 앞에 서서 말하고 있는 사람에게 주의를 돌렸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밝은 분홍색 옷을 입은 쾌활해 보이는 할머니셨다. 온통 하얀 머리 때문에 당연히 할머니라고 생각했지만, 잠시 지켜보던 보비는 곧 헷갈렸다. 머리는 하얗지만 얼굴은 주름이 없고, 그냥 엄마 정도의 나이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지켜보다 보면 할머니 같은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더 젊어 보이는 얼굴처럼 보이기도 해서 보비는 헷갈렸다. 그 ‘할머니’는 쾌활한 목소리로 경쾌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또 할머니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아’라고 보비는 생각했다.

“... 자, 그럼 여기까지 그림을 보면서 설명을 다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다 같이 해 볼 차례입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의 옆에는 어른 키보다 더 높은 제법 큰 그림이 있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제일 중요한 것은 순간의 집중입니다. 우리 ‘생생 아트 수업 - 온몸으로 느끼는 그림’ 시간에서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은 집중, 그리고 열기입니다. 몸과 마음을 집중한 후에 탁~하고 열어야 해요. 그래야지 그림을 제대로 느낄 수 있어요. 집중한 순간이 계속 올라가고,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살짝 느슨해지는 듯한 순간이 옵니다. 그때 열어줘야 해요. 그 순간은 모두가 조금씩 다릅니다. 그때를 잘 잡아야 해요.

자, 그럼 해 봅시다. 같이 하면 더 쉬워요. 자, 준비되었죠?

아까 배운 대로, 그림을 보세요. 그림을 보되, 눈에 힘을 빼고, 그림 너머를 같이 보세요. 그림이 시야에 들어오지만, 그림 너머를 눈에 같이 담는 겁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떴다를 천천히 반복합니다.”

보비는 자기도 모르게 같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워낙에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하셨기도 하고, 앉아 있는 모두가 같이 집중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기 때문에, 보비도 따라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림은 워낙에 커서 보비가 있는 창문 바로 밖에서도 잘 보였다. 그것은 바닷가 제방에 앉아 있는 한 여자를 그린 그림이었다. 투명하고 가벼워 보이는 연한 분홍색의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원피스, 하얀색의 허리띠와 모자, 모자 밑으로 드러난 기다란 머리가 한 방향으로 날리는 것으로 보아 바다 바람이 제법 세게 부는 순간을 포착해서 그린 것 같았다. 여자는 커다란 사각형의 가방 위에 앉아서 모자가 날아가지 않게 한 손으로 모자를 꼭 잡고 있었다. 여자의 뒤로는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보이고, 멀리 등대와 갈매기 몇 마리도 보였다. 여자의 옷이며 푸르른 바다와 하늘, 등대까지 모두 무척 환하게 밝혀진 듯 보여서, 아마도 무척 화창한 날의 바닷가를 그린 것이라고 보비는 생각했다. 단순하지만 무척 밝고 왠지 설레는 듯한 느낌의 그림이어서 보비는 그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 자, 그럼 이제 숨을 들이마셔보세요. 무슨 냄새가 나죠?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것을 좀 더 천천히 해 봅니다. 숨을 계속 크게 들이마셔보세요... 흠, 저는 짠 바람 냄새가 좀 나기 시작하네요. 네, 계속합니다. 아이코, 바람이 불기 시작하네요...”

도대체 할머니께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야 하고 생각하던 보비는 얼핏 풍기는 짠 냄새에 흠칫 놀랐다.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그림 쪽을 보니, 왠지 살짝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뭐가 움직이는 걸 본 건가? 파도가 지금 막 움직이는 것 같았어. 그리고, 이 냄새는 바닷가에 가면 나는 냄새야. 미역 냄새 같은 냄새. 이게 뭐지?’

보비는 긴가민가하면서 계속 그림을 보았다. 이제 의식적으로 눈을 껌뻑껌뻑하지 않아도, 보비의 눈은 저도 모르게 계속 커지는 듯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보비가 눈을 껌뻑할 때마다 그림은 점점 더 튀어나오는 것 같이 느껴졌다. 파도는 여자가 앉아 있는 제방 쪽으로 와서 부딪치고 하얗게 거품을 내며 사그라들었는데, 그 움직임이 계속 눈 앞에서 변해갔다. 그리고 그림 속 여자에게 불고 있는 바람 역시 느껴졌다.

‘좀 후덥지근하고 더운 날인가 봐. 바람이 살짝 끈적끈적해. 하지만 바다 냄새가 나서 답답하진 않아’라고 보비는 생각했다. 바람은 계속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파도처럼 휘익 불어왔다가, 다시 또 짠 냄새를 풍기며 다가왔다. 그림은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고, 앞으로 튀어나오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현실처럼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꼭 그림 전체가 꿈틀거리는 것 같아. 캔버스를 뚫고 나오는 것처럼.’

보비는 넋을 잃고 그림을 쳐다보았다.

‘정말 화창하고 기분 좋은 날이야. 저 여자분은 어디를 계속 보는 걸까? 누구를 기다리나 봐. 무척 설레어하고 있어’

보비는 몽롱하게 생각을 하다 화들짝 놀랐다.

‘아니, 내가 저 여자분이 설레고 있는지, 누구를 기다리는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왠지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어. 저 여자분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아주 행복하고 설레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람이 느끼는 것을 나도 느낄 수 있어’라고 보비는 생각했다.

‘이상한 그림이야. 그리고 이상한 사람들이야. 다 뭘 하는 사람들이지?’

새삼 정신이 번쩍 든 보비는 그림에서 눈을 떼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다들 제각각이었다. 연거푸 숨을 몰아쉬면서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도 있고 (‘저 사람도 바다 냄새를 맡고 있나 봐’라고 보비는 생각했다), 나른하게 뒤로 기대고 앉아 손으로 이마 위를 가리고 눈부신듯한 표정으로 눈을 찡그리고 있는 사람도 있고 (‘바다 햇볕이 무척 눈 부신가 봐’),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미소를 짓는 사람도 있고 (‘따뜻한 햇살을 느끼나 보네’), 쓰고 있는 모자챙을 꼭 쥔 사람도 있고 (‘바람에 자기 모자가 날아갈 까 봐 저러는 건가 봐’), 2명 정도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얼굴에 인상을 쓰면서 주위를 계속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 느끼는 거야’) 개와 고양이, 그리고 털북숭이까지 동물 3마리는 모두 아주 기분 좋아 보였다. 고양이와 털북숭이는 사지를 뻗고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들고 있었고 (‘햇빛을 쬐는가 보군’). 개는 행복하게 짖으면서 돌아다니다가 가끔씩 허공으로 뛰어오르기를 반복했다. (‘파도를 잡으려나 보지’)

“자, 어때요? 다들 느끼셨나요?”


사람들과 동물들을 지켜보느라 정신이 팔려있던 보비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앉아있던 사람과 동물들도 서서히 할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멋진 그림이죠? 화가는 아주 화창하고 기분 좋은 날의 기분 좋은 장소에서 행복한 사람을 그렸습니다. 이런 그림은 그 순간의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지요. 그 에너지는 보는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물론 여러분이 연습을 해야 되겠지만요. 그리고 이건 우리가 매번 충전해야 하는 ‘그 에너지’와는 다른 것입니다. 어느 정도 끌어올려 줄 수는 있지만, 대체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 에너지’를 잘 돌릴 수 있게는 도와준답니다”

보비는 할머니가 ‘그 에너지’라고 하는 순간, 모두가 아주 긴장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말을 하는 할머니도, 앉아 있는 모두도 순간 아주 엄숙하고 긴장된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에너지라니 뭘 말하는 걸까?’

보비가 알고 있는 에너지는 학교에서 배운 발전소며, 친환경 에너지, 에너지 절약 등등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나, 이 에너지는 다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풍력발전이나 원자력발전, 물이나 전기를 절약합시다 이런 이야기는 아닐 거야. 매번 충전해야 한다니 무슨 얘기일까? 설마 핸드폰처럼 몸에다 충전기를 연결하는 걸까? 이 사람들은 설마 다 로봇이나 안드로이드인 걸까?’

라는 생각에, 보비는 잠시 흥분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쪽은 아닌 것 같았다.

‘로봇이나 안드로이드라고 하기엔 뭐랄까... 너무 자연스러운 것 같아. 아무리 봐도 그냥 보통 사람들이고, 동물인데? 옷이나 스타일이 다들 좀 특이하긴 하지만 말이야.’

보비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다가, 박수 소리에 퍼뜩 놀랐다.

“자, 그래요, 그래요. 고맙습니다. 여러분 모두 아주 잘하셨어요. 오늘 그림을 느끼지 못한 분들은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처음 몇 번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확 하고 숨을 들이마시게 되는 순간들이 온답니다. 그리고 자기와 잘 맞는 그림들이 또 조금씩 다르답니다. 그러니 조바심 내거나 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다음 시간에는 서로 다른 2개의 그림을 한 번 같이 해 볼 거예요. 그리고 그동안 그림 느끼기를 해 보고 싶은 분들은 시립미술관에 가시면 됩니다. ‘우울과 슬픔의 방’과 ‘어둠의 방’은 아직 들어가지 말고, 나머지 방들은 편하게 한 번 들어가서 작품들을 보세요. 그럼 여러분, 다음에 봐요.”

사람들이 일어서서 나오려는 기척에 보비는 서둘러 건물의 옆면으로 가 몸을 숨겼다.

‘특별히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지만, 허락을 맡지 않고 남들을 훔쳐본 셈이 되는 건가, 혹시? 그리고 다들 좀 이상한 사람들 같으니깐, 우선은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라고 보비는 생각했다.

‘저 사람들이 다 가고 나면, 다시 언덕으로 올라가서 집 쪽으로 가서, 여기를 나가야 되겠어. 정말 많이 늦었을 거야. 엄마가 아주 걱정하실 텐데...’

라는 생각에 보비는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사라지고 난 후, 보비는 살짝 고개를 내밀어, 조용해진 것을 확인했다. 건물 옆 벽면에서 나와 자전거에 다시 올라타는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얘야, 우리 수업은 재미있게 들었니?”

수업을 진행하시던 그 할머니였다. 보비는 움찔하면서 놀랐다.

“아, 저... 그게... 지나가다가 창문이 열려 있길래 본 거예요. 몰래 일부러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죄송합니다.”

“뭐? 하하하하하하. 얘야, 괜찮아.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보면 그림도 좋아하지. 나도 좋고.”

“아, 네... ”

보비는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쩔 줄 몰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우울과 슬픔의 방’과 ‘어둠의 방’은 뭔가요? 왜 들어가면 안 되는 건가요?”

“오, 그건 시립미술관에 있는 방 이름이야. 전시실별로 분위기나 주제에 따라 나누어 놓은 거지. 그리고 얼마든지 들어가 봐도 된단다. 하지만 이 반은 아직 초급이라서 이제야 막 그림에 자신을 열어 놓는 법을 배웠거든. 그래서 우선 밝고 명랑한 그림들을 같이 보는 거란다. 우울하고 슬프고 분노를 표현한 그림을 처음부터 접하게 되면, 갑자기 그 에너지들에 너무 영향을 받을 수도 있거든. 그 그림들은 좀 더 있다가 볼 거란다.”

“아... 그런데, 그러면... 그런 그림들은 아예 안 보는 게 더 나은 거 아닌가요?”

“그건 왜 그렇지?”

“음... 슬프고 우울하고 화가 나고 그런 건 안 좋은 거잖아요.”
“그거야 지나치면 안 좋은 거지, 그런 슬프고 우울하고 화가 나는 감정 자체가 안 좋지는 않단다. 슬픔은 우리를 자라게 해 주고, 우울은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해 주고, 화는 곪지 않게 해 주지. 다 에너지를 돌리는 데 필요하고 소중한 거야.”

“아, 네...”

대답은 했지만, 무슨 말인지는 도대체 잘 모르겠다고 보비는 생각했다. 에너지를 돌리고 충전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물어봐야 되겠다고 생각한 순간, 할머니가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런데, 얘야, 너는 여기 애가 아니지? 너는 충전하는 애가 아니고, 만들어 내는 애로구나.”

어리둥절한 보비의 표정에 할머니는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되었니? 여기엔 너 같은 애가 잘 없단다. 요즘 들어 한 두 명이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지만... 그 애들은 좀 이상해 보였어. 충전하는 애들은 아닌데, 다들 멍하니 길을 잃고 기운이 없어 보였거든. 이상해, 전에는 그런 애들을 본 적이 없었는데...”

할머니는 혼잣말을 하면서 얼굴을 찌푸렸다가, 여전히 어리둥절한 보비의 얼굴을 보면서 다시 인상을 풀었다.

“그러니깐, 너는 이쪽으로 어떻게 온 거니?”
“어, 그러니깐...”

보비는 집으로 가는 길에 낯선 집 앞에서 공을 발견한 일, 공이 자꾸 튀어나오길래 울타리 안쪽으로 공을 넣어 두려고 들어온 일, 자전거를 발견해서 타고 공을 쫓아온 일을 이야기했다.

“앗, 그러고 보니 그 공이 어디 갔지? 여기까지 쫓아왔는데... 그림을 보느라고 잊어버렸어요”

“그래, 공이라고... 또 자전거, 그래, 이제 알아보겠구나. 자전거... 아까는 몰랐어.”

“어... 이 자전거 주인을 아시나요?”

“음, 그렇다고 해야 되겠지...”

보비는 더 자세한 대답을 기다렸지만, 할머니는 보비에게 대답하는 대신, 왠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자전거와 보비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얘야, 아, 그런데 네 이름이 뭐니?”

“보비에요.”
“그래, 보비야, 자전거 주인이 궁금하다고. 아마 다른 것들도 궁금하겠구나. 나랑 같이 우리 집에서 간식을 좀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련? 우리 집이 바로 여기거든.”

라고 말하며, 할머니는 좀 전에 그림 수업이 있던 방을 가리켰다. 어리둥절한 보비의 얼굴을 보며, 할머니는 다시 덧붙이셨다.

“이 방은 내가 수업을 하는 곳이고, 뒤쪽이 우리 집이야. 나는 여기서 살면서, 그림도 그리고, 수업도 하지.”

엄마가 기다리실 거라는 것, 아마 지금쯤이면 화가 나고 걱정하실 것이라는 것 때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보비는 할머니를 따라가기로 했다.

‘뭐, 어디 다른 데 가는 것도 아니고, 바로 여기라잖아. 그리고 한 20분만 앉아 있다가, 전속력으로 뛰어가면 그렇게 많이 늦지 않을 거야.’

라고 애써 괜찮은 척하면서, 보비는 할머니를 따라나섰다.

“그런데 보비야. 내 이름은 아마야. 아마라고 불러도 되고, 아마님이라고 해도 된단다. 아마 아줌마나 아마 선생님이나 네가 편한 대로 부르렴. 다 괜찮단다.”

문 뒤쪽으로 가면서 할머니는 보비에게 말했다.

“네, 아마... 님”


보비가 몸을 숨겼던 쪽이 아닌, 다른 쪽으로 해서 건물 옆을 돌아가니 과연 조그만 문이 달려있는 집의 뒷면이 보였다. 초록색 문에 노란색 문고리가 달려있고, 문 앞에 깔린 깔개는 진한 갈색이었다. 창문틀은 파란색에 곳곳에 꽃 화분이 놓여 있었다. 무척 다채로운 색깔들이었지만, 왠지 어지럽거나 정신없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마 건물은 물론, 창문이며 문고리며 깔개며 모든 부분이 반짝반짝할 정도로 윤이 나고, 꽃들은 모두 싱싱해서, 전체적으로 밝고 깨끗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아마님이 현관문을 열고

“자, 여기가 우리 집 거실이란다”

라며 안내한 거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실에는 가구가 별로 없었다. 나무 바닥에는 커다란 깔개가 깔려 있었는데, 아주 잔잔한 여러 색의 꽃이 수놓아진 도톰한 깔개였다. 그 가운데는 커다란 낮은 탁자가 있고, 탁자 주위에는 아주 큰 사이즈의 쿠션들과 작은 쿠션들이 있어서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쿠션들은 모두 크림색이고, 역시 뽀얀 크림색의 꽃들이 가득 꽂힌 커다란 화병이 탁자 위에 있었다. 벽에는 크고 작은 여러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아마 저 꽃에서 나는 냄새인가 봐. 좋은 냄새야. 가구가 없어서 그런지 왠지 탁 트인 느낌이 들어. 하지만 그림과 꽃들이 있어서 그런지 무척 아늑한 느낌이야’

라고 보비가 생각하는 사이, 아마님은

“금방 간식 가져오마. 편히 있으렴.”하고 거실에 난 문 뒤로 사라지셨다.

보비는 화병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꽃 냄새를 맡아보고, 벽에 걸린 그림들을 살펴보았다. 인물을 그린 것도 있고, 동물을 그린 것도 있고, 풍경을 그린 것도 있고, 무엇인지 잘 모르는 그림들도 있었다.

한 3분 정도가 지났을까, 정말 금방 아마님이 나무쟁반을 들고 나타나셨다.

“자, 여기. 레몬 케이크와 꿀차란다. 편한 데 앉으렴.”

“감사합니다.”

보비는 큰 사이즈의 쿠션에 편하게 앉아 쟁반을 받았다. 레몬 케이크와 꿀차는 김이 살짝 올라오는 것이 따뜻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향이 어찌나 좋은지, 상큼하고 달콤한 냄새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게 할 정도였다.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보비는 얼른 케이크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와, 정말 맛있어. 레몬 케이크가 이렇게 맛있는 것인 줄 몰랐네. 달콤한데도 레몬맛이 그대로 느껴져. 달콤하고 폭신한 레몬맛이야. 버터향도 나고... 정말 맛있다.’

“정말 맛있어요.”

라고 두 번째로 크게 케이크를 베어 물며 보비는 말했다.

“하하하하, 그거 다행이다. 어떻게 제대로 맛이 나올지 좀 걱정이었는데 말이야.”

“정말 맛있어요. 제가 먹어본 케이크 중에 최고예요.”

라고 보비는 우물우물 케이크를 삼키며 이야기했다.

아마님은 활짝 웃었다.

“고맙다, 보비야. 맛있게 먹어주니 좋구나. 그럼 나도 한 조각 맛볼까?”

아마님은 한 조각을 들어 올리더니,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의 병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병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들어있었는데, 아마님은 세 방울을 톡톡 케이크에 떨구었다. 분명 약간 끈적한 물 같은 액체라고 생각했는데, 떨어지는 순간 바로 증발하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주 잠시 기다린 후, 아마님은 레몬 케이크를 입으로 가져가 후욱 숨을 빨아들였다. 레몬 케이크를 직접 먹는 것이 아니었다. 레몬 케이크를 코와 입 근처에 댄 후, 입을 동그랗게 모아 슈욱 소리를 내며 공기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무언가 노르스름한 연기 같은 것이 케이크에서 나와 아마님의 입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보비는 어리둥절해서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잊고, 아마님을 쳐다보았다.

“그래, 레몬향이 아주 좋구나. 올리 씨가 싱싱한 레몬이라고 하면서 줬는데, 정말이야. 아주 햇살을 가득 머금은 레몬이로구나. 버터도 역시 좋아. 라니 씨네 소들은 아주 부지런하지, 라니 씨도 그렇고. 진한 우유에서 제대로 만든 버터야. 아주 맛있게 진한 크림 향이 나는구나.”

아마님은 눈을 반쯤 감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눈을 뜨고 보비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보비야. 놀란 표정이로구나. 사실 그럴 법도 하겠지.”

“저, 지금 뭘 하신 거예요? 케이크를 직접 드신 것은 아닌데, 향이며 맛을 이야기하셨잖아요. 뭘 훅하고 빨아들이셨는데... 뭐를 뿌리신 거 맞죠? 혹시 무슨 약을 드시는 건가요?”

막상 질문이 나오기 시작하자, 보비는 자기도 모르게 말이 빨라졌다.

“저... 아까 자전거 주인을 안다고 하셨는데, 그게 누구죠? 공은 또 어떻게 된 건가요? 누가 던진 건가요, 아니면 무슨 마술 공이나 내비게이션이 달려있는 공인 가요? 그리고 에너지며 충전이며... 그건 무슨 이야기예요? 또 아까 그 그림은 어떻게 된 거죠? 정말 그림이 살아난 건가요? 무슨 마술쇼 같은 건가요, 아니면 3D 영화관 같은 건가요? 거기 앉아있는 사람들은요? 옷이며 희한한 것을 달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왠지 낯설어 보였어요. 다들 좀... 특이해 보였어요. 동물들은 어떻게 된 거죠? 다들 꼭 알아듣는 것처럼, 꼭 사람처럼 앉아있던데요... 저, 여기가 우리 동네 맞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