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 세계의 아이들 02
주로 아이들과 놀다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상을 조금씩 이어 붙였습니다. 그러다 보면 희한하게, 주위 사람들에게 들은 소소한 이야깃거리나, 뉴스에서 보는 현실의 이야깃거리들도 같이 달라붙었습니다. 이야기들이 점점 더 머릿속에서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소위 '저 세상' 존재들은 왜 우리 옆에 있으려고 하는 걸까?'와 같은 단순한 질문에서 가지치기를 한 머릿속 상상은 자꾸 커져서, 나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두리뭉실 덩어리였는데, 자꾸 이런저런 모양새가 만들어지고, 그 모양새들끼리 이야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모험도 하다 보니,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어 한 번 써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첫째가 8년 후쯤에는 읽을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꼬리표를 붙이자면 '아동 판타지 소설'이 되겠지만, 엄마인 어른의 입장에서 던져보고 싶은 현실의 문제들, 어른의 문제들도 같이 들어 있습니다.
보비는 자기도 모르게 궁금한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쉬지 않고 내뱉고 나서야 숨을 골랐다. 그제야 왠지 예의 없게 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소 안절부절못한 느낌이 들었다. 괜히 혼자 어색한 느낌이 들어 보비는 다시 크게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고, 꿀차도 한 모금 삼켰다.
“와, 이거 정말 꿀인가요? 진짜 맛있어요. 뭐랄까, 꽃들이 확 하고 입 안에서 터지는 것 같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꼭 입 안에서 냄새가 터지는 것 같아요.”
보비는 잠시 어색하고 안절부절못했던 것도 잊고, 자기도 모르게 감탄의 말을 내뱉었다.
보비가 질문을 쉬지 않고 하는 동안, 곰곰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보비를 쳐다보던 아마님은 보비의 동그래진 눈과 감탄 어린 말에 곧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향기롭지? 올리 씨가 레몬과 함께 가져온 꿀이란다. 올리 씨는 나무와 꽃들을 정말 좋아하고 잘 가꾸거든. 꽃들이 무성하고 아름답게 자라지. 벌들이 향기로운 꿀을 만들기에 아주 좋은 곳이란다.”
미소를 띠면서 말하던 아마님은 곧 진지한 표정으로 보비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래, 보비야... 궁금한 것이 많겠지. 나도 너한테 궁금한 것이 많단다. 하지만 네가 먼저 이야기를 해 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이야기해줄 차례겠구나. 어디 보자... 질문들이 꽤 많았는데... 여기가 우리 동네 맞냐는 질문을 했었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단다.”
눈살을 찌푸리는 보비의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며 아마님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래, 그래,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 여기는 분명 네가 사는 동네야. 그러니 네가 학교 옆에 있는 그 집을 통해 들어왔지. 하지만 내비게이션이나 인공위성으로는 표시되지 않을 거야. 여기도 지도가 있긴 하다만, 네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도와는 좀 다르단다. 왜냐하면 여기는 너 같은 살아있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거든. 그러니 사람들의 세계에선 드러나진 않지. 하지만 통로들도 있고, 두 세계에 겹치는 공간들이 있어서 이렇게 오고 갈 수 있는 거란다. 사실 우리 입장에선 꽤 자주 쉽게 오고 갈 수 있지.”
보비는 계속 집중하며 듣다가 ‘살아있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다’란 부분에서 번쩍 정신이 들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귀신이나 영혼이란 이야기인가란 생각이 자동적으로 들어,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음물을 맞은 것처럼 굳었다. 하지만 아마님의 생기 있는 눈빛과 미소를 보면 귀신이라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았다. 귀신이라곤 해도 무섭거나 위험한 귀신은 아니라고 보비는 생각했다. 마치 보비의 생각을 꿰뚫어 본 것처럼 아마님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면 귀신이나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니냐는 생각이 당연히 들겠지? 엄밀히 말해서 좀 그런 면도 있단다. 우리는 강력한 감정이나 의지나 생각들에서 생겨난 존재란다. 보비 너처럼 살아있는 몸이 없지. 너처럼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진 몸이 없다는 얘기야. 무척 놀란 얼굴이로구나. 그럼 지금 네가 보고 있는 내 모습은 뭐냐고 묻고 싶겠지. 이건 내가 이 세계에 처음 들어왔을 때, 자리 잡은 모습이야. 내가 몸을 가진 인간이었을 때의 모습과 많이 닮았지만, 또 완전히 똑같지는 않단다.”
“저... 그럼... 막 변신을 하거나 또 벽을 통과하거나 하늘을 날거나 할 수 있나요?”
“하하하하하. 벽을 통과하거나 하늘을 나는 것은 쉽게 할 수 있지. 장소를 이동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깐. 하지만 거기에도 나름 규칙이 있어. 그 얘기는 다음에 해주마. 변신은 안 된단다. 처음에 이 세계에 들어올 때 자리 잡은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 혹은 크기로 마음대로 바꿀 수 없고, 바뀌지도 않는단다. 아직까지 여기서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구나. 하지만 자연스러운 변화는 누구에게나 있지. 살아있는 사람처럼 나이가 들고 노화가 찾아오진 않지만, 표정이나 느낌이나 그런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변한단다.”
“강력한 감정이나 의지나 생각에서 생겨났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아마님은 어떻게 이... 세계에 들어온 거죠?”
“아...”
하는 아마님의 얼굴은 순간 날카로워졌다가, 찡그려지는 바람에 보비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런 보비를 본 아마님은 얼른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미안하구나. 꽤 오래 전의 일인데, 아직까지도 강렬한 기억이라서 꼭 누가 나를 세게 때린 것만 같단다. 다 한다면 너무 긴 이야기일 테니, 오늘은 간단하게만 이야기해주마.
내가 살아있는 사람이었을 때, 나에겐 너만 한 딸이 하나 있었단다. 내 딸이어서 그런 게 아니고 정말 괜찮은 아이였어. 아주 예쁘거나 아주 똑똑하지는 않았지만, 뭐랄까, 아주 반짝이는 아이였단다. 눈이 큰 편이었는데, 꼭 눈 속에 전등이 켜져 있는 것처럼 반짝거려서 항상 신기하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이야기를 하면, 무엇이든지 맞는 것처럼 들렸어. 별로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항상 필요한 말들을 생각해서 하는 편이었어. 어른스러운 아이였단다. 딸과 나는 둘이서만 살았어.
내 남편은... 나를 많이 때렸단다. 딸과 둘이서 도망을 쳤는데, 그때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를 찾아냈지. 그리고 미안하다고 울었지. 다시 같이 있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때렸지. 결국엔 경찰에도 신고하고, 또 나 같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단체에도 연락을 했어. 결국엔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졌단다. 그게 뭔지 알고 있니? 그래, 들어본 적이 있겠지. 하지만 남편이 몰래 다시 찾아왔지. 어떻게 매번 그렇게 찾아내는지...
순식간의 일이었어, 딸이 학교에 간 사이 가게에 다녀와 문을 여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덮쳐 집 안으로 쓰러졌지. 남편이었어. 소름이 끼쳤지. 무서웠단다. 바로 신고를 하겠다고 말했지. 실수였어. 좋게 거짓말을 하고 달랬어야 했는데. 신고는 나중에 몰래 해서, 경찰이 대기하고 있을 때 잡히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남편은 신고한다는 나를 밀치고, 때리기 시작했지. 전화기는 변기에 던져버렸단다. 너무 많이 맞아서 정신이 아득해졌지. 쓰러져 있었는데, 내 몸 아래 끈적하고 냄새나는 것이 느껴졌어. 피 냄새와 소변 냄새였지. 이상도 하지, 남편은 칼을 휘두른 것도 아닌데, 어디서 이렇게 피가 나오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단다. 소리도 나오지 않았어. 학교에 갔던 딸이 올 텐데, 초인종을 누르면 어떻게 하지, 남편이 문을 열어 주겠지, 나는 지금 이렇게 꼼짝 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지 하면서 너무 걱정이 되었단다. 영화에서는 항상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던데, 택배 배달부나 이웃이 우연히 들려서 신고를 해주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 하지만 누가 문을 열어 들여다보지 않는 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거야. 나는 피를 흘리고 신음 소리도 못 낼 정도로 누워있었으니 말이야. 비명소리라도 들려야 누가 한 번 보기라도 하지. 조용히 닫힌 문 뒤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가 알겠니?
나는 몸도 움직일 수 없고, 소리도 낼 수 없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단다. 눈을 감고 있었는지, 뜨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 내가 내 눈을 통해서 보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몸 밖으로 나와서 보고 있었던 것인지도 잘 모르겠단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똑똑히 알 수 있었지. 남편은 쓰러진 내 앞에 앉아 훌쩍거리고 있었어. 그러다가 조용해졌지. 초인종 소리가 들렸단다. 딸이 학교에서 돌아온 거야. 나는 얼른 도망치라고 벌떡 일어나서 소리치고 싶었어. 하지만 아무 소리도, 아무 움직임도 낼 수가 없었지. 엄마하고 외치는 딸의 목소리가 들렸어. 남편은 조용하게 일어나더니, 문을 열었어. 딸애가 도망치거나 소리 지를 틈도 없이 그 애를 휙 하고 잡아당겨서 문을 닫았지. 딸애는 지 아빠를 보고 비명을 지를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나를 봤어. 그리고 내 쪽으로 달려왔지. 내 손을 잡기도 전에, 그 애 아빠가 아이를 뒤로 당겼어. 그리고 주먹으로 얼굴을 내리쳤지. 아이는 소리를 치지 않았어. 그 반짝거리는 눈으로 지 아빠를 쳐다보고, 나를 봤지. 남편은 잠깐 멈칫했어. 그리고 다시 주먹으로 그 애의 얼굴을 내리치고 또 내리쳤어. 아이가 바닥에 쓰러졌지. 남편은 발길질을 했어. 발길질을 하고 주먹질도 했단다.”
아마님은 말을 멈추었다.
보비는 움직일 수도 뭐라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침을 삼키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마님은 다시 말을 이었다. 말이 조금 더 천천히 또박또박 흘러나왔다.
“그다음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단다. 남편이 딸을 때리는 것을 계속 보면서, 어떻게 하지, 어떻게 딸을 구할지 생각했어.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소리라도 질러 보려고 정말 애를 썼지. 하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어. 어찌 된 영문인지 내 정신은 아주 말짱한데, 몸은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지. 딸을 구해야 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만 계속했어. 그러다가 정신을 잃었나 봐. 아니, 이미 기절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신을 잃었다는 것은 맞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는 것을 계속 기억하려고 했는데, 애쓰면 애쓸수록 그 전의 장면들만 생생하게 기억이 난단다. 남편이 때리고, 내가 맞고, 쓰러지고, 딸이 들어오고, 딸이 맞고... 그다음이 기억이 나질 않아.
얼마 큼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는 다시 눈을 떴단다. 눈을 뜨고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지. 낯선 곳이었단다. 꽃과 나무가 많은 정원이었어. 나는 일어나서 걸었지. 주위를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말이야. 그러다 퍼뜩 놀랐어. 딸과 남편은 어디에 있지,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분명 아주 많이 맞았는데 하면서 말이야. 팔을 들어 살펴보고, 다리도 들여다보았어. 상처라곤 하나도 없이 깨끗했단다. 몸을 움직이는데도 아픈 곳도 하나도 없고, 아주 가벼운 느낌이 들었지. 내가 죽었나 보다고 생각했어. 남편에게 많이 맞았기 때문에, 그때 맞은 것이 평소보다 더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거든. 내가 이러다가 죽겠구나, 죽을 만큼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죽었구나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죽었다면 여긴 도대체 어디고 나는 어떻게 된 것이지?
죽는 것은 소멸한다는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 이렇게 걷고 움직이고 꽃을 보고, 냄새도 느낄 수 있는데, 생각도 하고 있는데, 그럼 난 소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니 혼란스러웠어. 소멸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니? 그래, 사라져 없어진다는 뜻이지. 남편에게 맞고 죽었지만, 내가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럼 지금 나는 뭐지, 여기는 어디고 어떻게 내가 여기에 있는 거지, 아픈 곳도 하나도 없이 자연스럽게 걷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단다. 무섭지는 않았어. 흔히들 이야기하는 죽은 후의 세계라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지. 생각을 하면서 계속 걸었어.
멀리 집이 보였지. 아주 아담하고 예쁜 집이었어. 온통 색색의 꽃들로 둘러싸여 있고, 마른풀로 엮은 지붕이 있는 돌집이었단다. 꽃들이 무척 풍성하게 많이 피어있어서 그런지, 꽃에서 피어난 동화 속의 집 같았어. 다가가는 데, 문이 열리면서 웬 할머니가 나오셨어. 디즈니 만화영화에 나오는 마음씨 좋은 마법사 할머니 같아 보였지. 너 신데렐라를 본 적이 있니? 딸이 어렸을 때 좋아해서 같이 봤었지. 거기 나오는 신데렐라가 무도회에 갈 수 있게 마법을 걸어주는 마법사 할머니 있잖니? 키가 작고 통통하고 하얗고... 딸은, 그 마법사 할머니가 맛있는 케이크를 만들 수 있을 것처럼 생겼어라는 이야기를 했지. 그런 느낌의 할머니셨단다. 그 할머니가 웃으면서 맛있는 케이크와 차를 먹으러 들어오라고 나한테 말했을 때, 딸이 한 이야기가 바로 생각이 났어. 나는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할머니네 집으로 들어갔지. 집 안에서 정말 맛있는 냄새가 났어. 빵이나 케이크를 방금 구운 냄새였어. 그리고 아주 기분 좋은 온기가 있었지. 공기가 아주 기분 좋게 따뜻하고 향기로웠단다. 정말 깨끗한 집이라고 생각했지. 병원 소독실 같은 차가운 깨끗함이 아니었어. 햇볕에서 잘 말린 빨래를 걷는 느낌이 들었단다. 뽀송뽀송하고 깨끗하고... 우리는 같이 앉아서 말없이 케이크와 차를 먹었어.
그렇게 맛있는 것은 먹어본 적이 없었단다. 꿀과 꽃과 과일이 섞인 향이 입에 들어가면서, 입 안에서 그 느낌이 터졌지. 보글보글하면서 촉촉하고 달콤하게, 정말 뭐라고 말할 수 없이 향긋했어. 너무 맛있어서 먹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하거나 느낄 수 없었단다. 한 접시를 다 먹고 나서 할머니에게 너무 맛있었다고, 감사하다고 했지. 그러고 나서 내가 죽은 것이냐고 물어봤어. 할머니는 웃으면서 아직은 아니라고 했어. 그리고 죽고 싶냐고 물어보셨지. 꼭 오늘 점심에 뭘 먹고 싶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너무 일상적으로 물어보셔서 약간 당황했어. 하지만 할머니는 아주 차분하고 따뜻하고 안정적으로 보였어. 정말 진지하게 묻고, 정말 내 대답을 잘 기다려주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느낌이 들어서 나도 아주 단순한 기분이 들었단다. 할머니에게 죽고 싶으면 어떻게 되고, 반대로 죽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어봤어. 할머니는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셨지.
‘저 쪽에 문 2개가 보이지요? 죽고 싶다면 왼쪽 문을 열고 나가면 됩니다. 문을 지나고 난 뒤에 무엇이 있고, 어떻게 되는 것인지는 알려줄 수 없어요. 그건 문을 지나간 뒤 본인만 알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랍니다.
아직 죽고 싶지 않다면 오른쪽 문을 열고 나가면 돼요. 이전에 있었던 세계에서 다시 똑같이 살아갈 수는 없지만, 이전에 살았던 세계와 연결된 곳이랍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기억과, 모습과, 감정과 정신, 모든 것을 대부분 그대로 가지고 가는 거예요. 하지만 거기에서 머물고 싶으면 지켜야 할 규칙이 있어요. 그 규칙들을 지키는 한 머물 수 있답니다.’
‘어떤 규칙들이지요?’
할머니는 웃으며 가볍게 테이블을 쳤어. 종이 한 장이 나타났지.
처음 보는 글씨들이 적혀 있었어. 그림처럼, 처음 보는 외국어처럼 보여서, 살짝 웃으며 못 읽는 외국어라고 말하려고 했단다. 그런데 다시 흘깃 보니 읽을 수가 있었어, 글자는 변하지 않았는데, 읽을 수 있었지. ‘규칙’이라고 제목이 적혀 있었어. 내용은 별로 길지 않고 아주 간단했어. 머물 동안 살 집을 직접 지어야 한다는 것과, 집을 짓는 동안 새로운 생활에 도움을 줄 멘토와 만나 정해진 교육을 들어야 한다는 (새로운 세계와 생활에 대한 소개와 대화가 주가 될 거라고 할머니가 덧붙여 설명해주셨단다) 내용이었지.
‘처음엔 양쪽 세계를 왔다 갔다 하게 될 일이 많을 거예요. 그러다 보면,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도 생긴답니다. 어쩔 수 없어요. 사실 그런 경우는 꽤 많고, 또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때도 있으니깐요. 시간과 공간이 많이 겹치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나쁜 의도 없이, 자연스럽게 겹쳐서 놀라게 될 때는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사실 별로 없지요. 우리는 그들을 의식하고 보지만,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거든요. 거의 말이죠.’
사실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들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완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나쁜 마음 없이 어쩌다가 놀라게 하는 경우는 별로 큰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은 알아들었단다. 별로 어렵지 않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지. 나는 다시 물었어.
‘저... 혹시 제 딸도 여기에 왔나요? 저랑 같은... 순간에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요. 제 딸은... 어느 문으로 갔나요?’
할머니는 나를 똑바로 쳐다 보고 잠시 가만히 있었어. 그리고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지.
‘여기에 오지 않고, 바로 죽는 사람들이 훨씬 많답니다. 여기에 왔다는 것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무척 강한 감정이나 의지를 가졌다는 거예요.’
할머니는 묻듯이, 혹은 다 안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딸이... 딸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기억이 끊겼어요. 그리고 눈을 뜨니 여기였어요’
‘그렇군요. 여기에 온 사람이나 동물에게, 다른 사람이나 동물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 수는 없답니다. 그건 제가 지켜야 할 규칙이에요.’
할머니의 목소리는 너무 부드럽고 상냥했지만, 무척이나 묵직했어. 정말 단순하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구나, 내가 어떤 식으로든 강요하거나 설득할 수가 없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 나도 모르게 목이 매이고,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어.
‘하지만...’
하고 할머니는 말을 이었어.
‘최근엔 아이들을 본 적이 없네요.’
나는 얼른 고개를 들었어. 그리고 미소를 지었지. 그래, 여기가 죽기 전의 단계인지, 죽은 건지, 아니면 뭔지는 모르겠어, 딸이 여기에 오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죽었거나, 아니면 살았다는 거야. 나도 죽지 않았는데, 딸도 죽지 않았을 거야. 애 아빠인데, 설마... 죽이지는 않았겠지. 그 애는 더 어리고 건강하니깐 금방 회복했을 거야. 살았다면, 나는 그 애를 확인하고 보고 싶어.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다 끝이겠지. 하지만 저 문으로 나가면 내가 있던 곳과 연결되고 통한다고 했어. 내가 소위 귀신이 된다고 해도, 상관없어. 할머니가 우리는 그들을 볼 수 있다고 했잖아, 그들은 우리를 볼 수 없다고 해도. 딸 애의 안전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또 지금은 몰라도 내가 어떻게든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지 몰라, 그 애를 위해서.
나는 할머니께 말씀드렸어.
‘저는 저기로 갈게요. 교육을 듣고, 집을 짓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있겠어요.’
‘그래요, 그럼.’
하고 할머니는 다시 미소를 지었어.
규칙서에는 어느새, 내 이름이 적혀 있었어.
‘손을 펴서 규칙서에다 가져가세요. 어느 손이건 상관없어요. 그리고 다시 한번 읽고 이를 진심으로 지킬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세요.’
나는 시키는 대로 했지, 종이가 손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어. 아주 살짝 뜨거운 느낌이 들었지. 그리고 종이가 서서히 사라졌단다. 내 손에 붙어있는 느낌이 들었어. 신기했지, 눈으로 보기엔 손바닥에 아무것도 없었거든.
‘하루 정도는 느낌이 있을 거예요. 꼭 얇은 장갑을 끼거나 반지를 낀 것처럼 손에 뭔가 느낌이 있을 거예요. 내일이면 못 느낄 겁니다. 그건 방금 한 서약서예요. 그곳에서의 신분증과 같은 것이랍니다. 항상 지니고 있게 되는 거죠. 지갑에서 꺼낼 필요는 없지만요. 자 그럼...’
하고 할머니는 일어나셨지.
‘행운을 비는 의미에서, 샴페인 한 잔과 케이크를 좀 더 먹겠어요?’
‘기꺼이요. 케이크는 계속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는 웃으면서 아주 맛있게 먹었단다. 그리고 할머니는 문 앞으로 나를 데려갔어.
‘손바닥을 문에 대세요. 그럼 열릴 겁니다.’
문이 열렸어.
‘자, 그럼. 좋은 일과 좋은 벗이 함께 하길!’
할머니는 웃으며 나를 부드럽게 밀었어. 그렇게 해서 나는 여기에 오게 된 거란다.”
아마님의 이야기를 정신없이 듣고 있던 보비는 번뜩 꿈에서 깨어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교육을 듣고, 집을 지었단다. 지금 이 집이 내가 지은 집이야. 여기 이렇게 머물고 있지.”
아마님은 보비에게 미소를 지었다.
“아... 네... 저, 그런데 그 교육이란 건 뭐였어요? 집은 혼자서 지으신 거예요? 그리고 아마님은 얼마나 여기에 계셨던 거예요? 저기 저... 딸은 어떻게... 찾으셨어요?”
“교육은 이 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이지. 재미있었어, 내가 몰랐던 것들도 많이 알게 되고 말이야. 집은 혼자서 지었단다. 혼자서 지어야만 해, 그게 규칙이야. 여기에 온 지는 10년이 좀 넘었단다.”
그리고 아마님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딸은... 모르겠어.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살아 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어... 그런데, 음, 귀신, 아니, 영혼이, 아니 그러니깐 아마님처럼 어디든 갈 수 있는 그런, 그러니깐 둥둥 떠다니고, 막 어디건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면, 아니, 사람이 아니고, 그러니까 그런... 그런 음, 상태가 되면 뭐든지 다 알 수 있게 되는 거 아닌가요?”
보비는 허둥지둥 두서없게 말했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보니 말이 매끄럽게 나오질 않았다. 보비의 머리에 떠오르는 질문은 ‘귀신은 무엇이든지 다 아는 것 아니에요?’라는 것이었지만, 귀신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왠지 무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님은 웃으면서 이야기했단다.
“네가 편하면 귀신이라는 말을 써도 된단다. 사실 귀신, 영혼, 저 세상 존재 등등 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야. 그리고 우리는 많은 것을 새로 알게 되기도 하지만, 모르는 것이 여전히 훨씬 더 많단다. 누군가의 생사 여부나 행방을, 마술 구슬을 들여다보고 바로 알 수는 없어. 마술 구슬도 없지만 말이야.
딸은...”
아마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딸은... 보비야, 이 이야기를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단다. 네가 집에 늦게 가면 부모님께서 걱정하시지 않겠니?”
보비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얼마큼 시간이 흐른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꽤 시간이 흐른 것은 분명했다. 학교 끝나고 친구들이랑 이런저런 장난치면서 천천히 돌아가더라도 분명 지금보다는 훨씬 덜 걸렸을 것이다.
“맞아요. 어, 어떡하지. 빨리 뛰어가 봐야 되겠어요. 엄마가 분명 난리 나실 거예요. 그런데...”
보비는 아마님을 쳐다보았다. 나머지 이야기도 듣고 싶었고, 아직 궁금한 것이 산더미인데 이렇게 떠나 버린다니, 집에 가기가 망설여졌다. 아마님은 보비의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보비야, 나는 여기 있단다. 내일 학교 끝나고도 올 수 있으면 놀러 오렴. 나머지 이야기를 해주마. 네가 궁금한 것도 대답해주고. 그리고 오늘은 늦을 걸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여기와 네가 머무는 곳의 시간은 약간 차이가 난단다. 이 곳의 하루가 그곳의 하루보다 좀 더 짧단다. 여기에서의 한 시간은 네가 있는 곳에서는 훨씬 짧아. 이 곳과 그곳에서는 하루가 다른 속도로 흐르거든.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서의 이틀이 그곳에서의 하루가 되지는 않아. 하루하루는 똑같은데, 그 안에서 흐르는 시간의 속도가 다르다는 거지. 표정을 보니 어리둥절한가 보구나. 당연하지, 나도 이 흐름을 느끼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으니깐. 하여간, 네가 지금 여기서 한 시간 정도 있었으니... 어디 보자, 보비야, 이리로 오렴. 내가 지름길을 보여주마.”
아마님은 벌떡 일어나더니, 거실에 난 문을 하나 열었다.
“여긴 부엌이란다”
라고 하며, 아마님은 걸어가며 말했다. 빠른 속도로 걷는 아마님을 쫓아 가느라, 보비는 부엌을 흘깃 보기만 했지만, 무척 깔끔하고 쾌적한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님은 들어온 문 반대쪽에 난 작은 문을 또 하나 열었다. 보비는 좋은 냄새를 들이마셨다. 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 정원이었다. 보비가 여러 종류의 꽃들을 보느라 고개를 휘두르는 동안, 아마님은 허리를 숙이고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어디 있더라, 여기 근처였는데. 분명 내가 줄무늬 버섯에 넣어 놓았거든. 어디 보자...”
보비는 슬그머니 아마님 옆으로 다가갔다.
“저도 도와드릴게요. 뭘 찾으면 되나요?”
“빨강과 노란색의 줄무늬 버섯이야. 다른 것들은 다 한 가지 색인데, 줄무늬가 하나 있지”
보비도 곧 허리를 숙이고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과연 어른 손만 한 꽤 큰 버섯들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보비는 금세 줄무늬 버섯 하나를 찾았다.
“어, 여기요! 이거예요?”
“아, 맞아. 얘야, 금방 찾았구나.”
라고 웃으며 아마님은 버섯 머리 부분을 톡 하고 열어젖혔다. 만화영화에 나오는 버섯처럼 속이 비어 있었고, 안에는 무언가 있었다. 아마님은 손을 넣어 그것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문이었다. 크기 때문에 얼핏 장난감 블록처럼 보였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 손잡이와 문 중간에 있는 덧창의 연결새까지 아주 정교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참, 잘 만든 문이네요. 아주 섬세해요”
보비는 감탄하며 말했다. 아마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리가 쓰는 통로 중의 하나란다. 얘, 보비야, 이제 너네 집으로 돌아가렴. 음... 집 아주 가까운 곳에 수풀이나 나무가 있니? 아니면 골목길이라든가.”
“네... 다 있어요. 왜요?”
“왜냐하면 주위에 보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거든. 어디 보자, 그럼 골목길로 해 볼까. 제일 가까운 골목길. 거기 사람이 있으면 다른 곳으로 하면 돼. 자, 이 문을 손위에 놓고 머릿속에 집 근처 목길 풍경을 그려보렴. 별로 집중하거나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머릿속으로 비디오를 재생시킨다고 생각하면 돼. 눈으로 보이는 주위 풍경을 주욱 머릿속으로 틀면 된단다.”
보비는 잠시 멈춰 시키는 대로 했다.
“자, 다 했니? 그럼...”
이라고 하며 아마님은 보비의 손에서 다시 작은 문을 가져갔다. 그리고 손아귀에 넣고 흔들다가 손을 펼쳤다. 문은 조금 더 커져 있었다. 그 문을 잡고 몇 번 더 흔들었더니, 문은 아마님보다 조금 더 커졌다. 잘 켜지지 않는 접이 우산을 몇 번 잡고 흔들었더니 우산이 활짝 펴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보비는 입을 벌리고 문을 쳐다보고, 아마님을 쳐다보았다. 아마님은 웃으며 문을 살짝 열고, 내다보더니, 곧 보비에게 말했다.
“보비야, 아무도 없구나. 자, 얼른 가거라. 내일이나 네가 시간이 날 때 또 놀러 오렴. 안녕”
보비는 얼떨결에 문 밖으로 발을 내디뎠고, 곧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