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 세계의 아이들 03
주로 아이들과 놀다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상을 조금씩 이어 붙였습니다. 그러다 보면 희한하게, 주위 사람들에게 들은 소소한 이야깃거리나, 뉴스에서 보는 현실의 이야깃거리들도 같이 달라붙었습니다. 이야기들이 점점 더 머릿속에서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소위 '저 세상' 존재들은 왜 우리 옆에 있으려고 하는 걸까?'와 같은 단순한 질문에서 가지치기를 한 머릿속 상상은 자꾸 커져서, 나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두리뭉실 덩어리였는데, 자꾸 이런저런 모양새가 만들어지고, 그 모양새들끼리 이야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모험도 하다 보니,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어 한 번 써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첫째가 8년 후쯤에는 읽을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꼬리표를 붙이자면 '아동 판타지 소설'이 되겠지만, 엄마인 어른의 입장에서 던져보고 싶은 현실의 문제들, 어른의 문제들도 같이 들어 있습니다.
얼른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집 바로 옆의 골목길 끄트머리였다.
“와, 뭐지? 지금 뭐... 와...”
보비는 머리가 멍했다. 보비는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두루두루 둘러보았다. 머리를 흔들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보비가 나온 문은 보이지 않았다. 보비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집 쪽으로 향했다. 집은 금방이었다. 1분 만에 집에 도착해서 보비는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조금 있다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우리 보비! 다녀왔니?”
“네, 엄마.”
하면서 보비는 부엌 쪽으로 갔다.
“오빠 거는 여기 있어”
여동생 보미가 입에 핫도그를 하나 가득 문 채로, 옆 자리를 가리켰다. 응 하고 대답을 하며, 보비는 털썩 여동생 옆에 앉았다. 왠지 배가 무척 고파서 순식간에 핫도그를 해치웠다. 핫도그를 먹으면서 주방 시계를 보니, 평소 집에 돌아오는 시간보다 그리 늦지 않았다. 한 10분 정도 늦었을 뿐이었다.
“뭐야, 벌써 다 먹었니? 얘야, 천천히 먹어야지. 배가 고팠나 보네. 사과 줄까?”
동생과 같이 사과까지 다 먹고 난 후에야, 보비는 방으로 올라왔다. 문을 닫고 잠깐 문에 기대어 방을 둘러보았다. 엄마가 매일 잔소리하는, 아침에 일어날 때 그대로 헝클어진 침대, 보비가 좋아하는 가족 여행 사진이 여기저기 붙어있는 벽, 그런대로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책장, 레고 상자, 반쯤 열린 옷장까지 보비의 방은 보비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무언가 변해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낯익은 골목길, 방과 후의 간식, 엄마와 여동생이 둘러앉아 있는 부엌, 적당히 어질러져 있는 방까지 모두 너무 익숙하고 일상적이어서,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정말 내가 꿈을 꾼 건가? 학교에서 나와 운동장에서 깜빡 졸았는데, 다시 깨어나서 온 건가? 아니면 졸면서 걸어오거나... 그도 아니면, 지금도 꿈을 꾸는 건가?’
보비는 그 모든 가능성을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꿈을 꾸었거나,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보비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멍하니 천장을 보며, 공이 계속 튀어나오던 것, 뜰에 들어가서 발견한 반짝거리는 자전거, 이상한 그림 수업, 아마님의 집과 이야기를 계속 생각했다. 아직 궁금한 것과 듣고 싶은 것이 많았다.
“보비야, 얘, 보비야!”
아래층에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네, 가요.”
보비는 서둘러 내려갔다.
“한참 불렀는데... 얘, 보미랑 같이 엄마 좀 도와주렴.”
보비와 보미는 순순히 엄마를 따라 뒤뜰로 나섰다. 보비와 보미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정원을 좋아하셨다. 뒤뜰은 크지 않았지만, 반 정도는 텃밭 채소, 나머지 반은 꽃을 가꾸고 있었다. 정성 덕분인지, 뜰은 제법 싱싱하고 푸르른 느낌이 들었다. 보비와 보미가 어렸을 때는 흙장난과 물장난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크면서부터는 조금씩 부모님을 거들어서, 정원이 무척 익숙했다. 땅을 고르고, 잡초를 뽑고, 비료를 섞고, 씨앗을 뿌리고, 지지대를 세우기도 하고, 해로운 벌레를 잡기도 하고, 먹을 잎채소들을 따기도 하는 등. 뒤뜰에는 항상 할 일들이 많았다. 보비와 보미는 주로 엄마 아빠가 시키는 일들을 조금씩 했는데, 물론 매일 진지하게 열심히 할 때보단 대충 장난을 치다가 조금씩 일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오늘도 보미는 나비와 무당벌레를 잡는다며 뛰어다니다가, 자기는 변신 요정이라면서 장난을 치고 있었지만, 보비는 조용했다. 평소 같았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보미를 놀리면서 둘이 투닥거리다가, 보미가 울고, 그러다가 엄마에게 혼나고 할 텐데. 보비는 계속 아미님의 이야기를 생각하느라 딴 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보비가 조용해지니, 보미도 왠지 흥이 나지 않았는지, 혼자 장난을 치다가 금세 시들해졌다.
“엄마, 여기 이쪽에 잡초 다 뽑았어요. 여기 뭐 새로 심을 거예요?”
“응, 아빠가 이전에 사 온 씨앗이 있어서... 근데, 얘, 너 오늘 무척 조용하구나. 무슨 재미난 생각을 하고 있니?”
엄마는 반달눈을 만들어 눈웃음을 보이면서 보비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엄마는 ‘무슨 일 있었니?’라고 걱정스럽게 물어보지 않고, 왠지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하고, ‘무슨 재미난 생각을 하고 있니?’라고 물어볼 때가 많았다. 그럴 때가 보비는 좋았다. 꼭 엄마가 같이 장난이나 재미난 일을 하자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보비는 말없이 씩 웃었다.
“뭐야, 말 안 해주겠다는 거구나, 짜식.”
엄마는 메롱 하면서 보비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더니, 얼른 보비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돌아섰다. 에이 하면서 머리를 터는 시늉을 했지만, 보비는 엄마가 이렇게 해 줄 때도 좋았다. 엄마는 귀찮게 꼬치꼬치 물어보지 않는다. 하지만 보비는 엄마가 계속 신경을 쓸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보비가 계속 무엇인가를 고민하거나, 생각할 때, 엄마나 아빠는 곧 눈치를 채고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그리고 엄마가 아빠보다 더 눈치가 빠르다. 하지만 두 분 다, 기다려 줄 줄 알기에 보비는 마음이 편했다.
“오늘은 저녁 좀 일찍 먹을 거야. 엄마 오늘 센터에 가는 날인 거 알지?”
네하고 대답하면서 보비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일주일에 2번, 저녁때 지역 문화센터에 가셔서 영어를 가르치신다. 수업은 8시부터 10시까지로, 그런 날은 평소보다 좀 일찍인 6시에 저녁을 먹는다. 아빠는 여느 때처럼 6시가 되기 전에 집에 오셨다. 평소와 같이 가족이 같이 저녁을 먹고, 엄마만 서둘러 먼저 저녁을 끝내고 집을 나섰다. 아빠를 도와 뒷정리를 같이 하면서 보비는 불쑥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아빠는 귀신을 믿어요?”
“흠... 귀신이라면 막 피를 흘리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그런 귀신?”
“에이, 그건 귀신의 집에 나오는 귀신이죠. 그런 거 말고요. 그러니깐... 뭔가 우리와는 좀 다른데, 또 아주 다른 건 아닌 것들이요. 몸은 없는데, 몸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런데 정말 몸은 아니고 그렇게만 보이는 거예요. 몸은 없는데,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할 수 있어요. 꼭 사람 같은데, 정말 사람은 아니고... 또...”
보비가 약간 왔다 갔다 하면서 두서없이 열심히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아빠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면서 듣다가, 다시 진지하게 보비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빠는 귀신이나 유령의 존재는 믿지 않아. 아빠는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잘 믿지 않는단다. 하지만 영혼의 존재는 믿어.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해. 비록 영혼이 정확히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기 쉽지 않지만. 하긴 그건 우리의 육체도 마찬가지지. 사람의 뇌라는 우리 몸의 한 부분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아. 영혼은 더 하지, 평생 자기의 영혼에게 일어나는 일조차 잘 모르는 걸.”
“음... 어려워요. 그럼 아빠 생각엔 영혼이 말하고 돌아다니고 할 수 있을까요? 몸이 없이, 그냥 영혼만요.”
“글쎄...”
아빠는 잠시 가만히 생각하다가, 보비에게 씩 웃으며 말했다.
“얘, 보비야. 좀 옛날 일이야. 네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이 났단다.
네가 3살, 4살 정도 되었을 때란다. 이 집에 이사 오기 전이지. 부엌이 복도 한쪽 끝에 있던 집이었지. 환기가 잘 안되어서 요리할 때 냄새가 온 집에 퍼진다면서, 네 엄마는 곧잘 부엌문을 닫고 부엌 환기팬만 켠 채로 요리하곤 했어. 그날도 그랬지. 내가 집에 왔는데, 부엌문이 닫혀있었어. 나는 집에 왔다고 인사를 하고 곧장 너네들이 놀고 있는 거실 쪽으로 향했지. 부엌에서 뭐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어. 나는 잘 안 들린다고 대답을 했을 거야, 아마. 그리고 너네가 나를 보고 곧장 아빠 하면서 뛰어왔지. 매달리고 뽀뽀하고, 나도 같이 웃고 안고 장난치느라고 정신이 없었지. 당시 너네를 봐주던 보모가 있었어, 사진에 같이 꽤 많이 찍혔으니 너네도 기억할 거야. 그래, 맞아, 당연히 기억하는구나. 보모에게 아이들이 잘 보냈냐고 물어보고 나니, 엄마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어. 내가 집에 오면 항상 부엌에서 나왔는데, 아니면 얼굴이라도 내밀며 왔냐고 물어보는데, 무슨 요리를 하나 싶었지. 그래서 보미를 안고 부엌으로 가서 문을 열었어.
‘여보, 뭐 해?’하면서 부엌 안으로 들어섰지. 부엌에는 아무도 없었어. 이상했지, 분명 내가 인사했을 때, 뭐라고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거든. 난 어안이 벙벙했어. 어리둥절해하면서 엄마를 찾고 있는데, 누군가 내 발목을 찰싹 치면서 지나가는 게 느껴졌어. 나는 얼른 아래를 쳐다보았지. 아무도 없었어. 우리 집엔 개나 고양이도 없고, 보미는 내가 안고 있는데, 대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얼른 다시 거실로 갔지. 너는 보모와 함께 놀고 있었어.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엄마 왔다’하는 소리가 들렸어. 너네 엄마였지.
‘당신... 이제 오는 거야?’
라고 내가 물었지.
‘응, 사과랑 빵이랑 좀 사려고 얼른 요 앞에 다녀왔어. 당신도 이제 막 들어온 거야? 일은 어땠어?’
라고 너네 엄마가 일상적으로 물어봤지. 대충 대답을 했지만, 기분이 이상했어. 나는 분명 부엌에서 누군가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고, 또 분명 어떤 기척을 느꼈거든. 누군가 있다는 그런 느낌 있잖아. 게다가 내 발목을 친 느낌, 그건 분명히 동물도 아니고, 또 어떤 바람이나 마찰도 아니었어. 누가 의도를 가지고 나에게 아는 척을 하려고 스친 느낌이었거든.”
“아빠는 그럼 그게 귀신이나 유령, 아, 아니면... 영혼이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글쎄다, 영혼이었다기 보단... 어떤 에너지 같은 거였다고 생각해. 너네 둘이 어렸을 땐 말이다, 지금보다 더 에너지가 넘쳤단다. 종일 뛰어다니고, 뭐든지 다 열어보고, 만져 보고, 소리 지르고, 울고, 웃고... 분명 인간인데도, 다른 종류의 생명체 같았어. 사실 그럴지도 몰라. 네 할머니는 항상, 아기들은 인간과 천사와 동물을 합쳐 놓은 존재라고, 그래서 천사도 보고, 동물과도 대화를 하고,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도 다 볼 수 있다고 하셨었지. 하여간 아기들 주위엔 특별한 에너지가 넘쳐흐른단다. 너네 둘이 같이 있으면서 내는 그런 에너지는, 볼 수는 없지만, 똑똑히 느낄 수 있었어. 물론 내가 아빠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야. 어린아이들은 그 순간만을 살고 경험하고, 또 모든 순간을 자연스럽게 온통 흡수해 버리지. 어른과는 아주 다르단다. 그런 아기 둘이 하루 종일 떠들고 뛰어다니는 집이니, 우리 집엔 어떤 활기찬 느낌이 항상 있었단다. 그런 에너지들이 흐르다가 가끔씩 부딪치고 튕겨 나오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 그때 말이야.”
“아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 나도 사실 잘 설명을 못하겠어. 분명 아빠가 느낀 건 있는데, 사람은 아니야. 귀신이나 유령도 아니라고 생각해. 바람 같은 자연현상도 아니고. 어떤 보이지 않는 영혼일까, 하지만 영혼이라면 누구의 영혼일까, 왜 그때 그 순간 나에게 아는 척을 했을까? 그 이전이나, 이후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거든. 그런 걸 보면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단, 그 순간에 우연하게 일어난 현상이라는 게 더 맞지 않을까? 그렇다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원인이 뭘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우리 집에 넘쳐흐르는 어떤 에너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저랑 보미가 아기 때 그렇게 에너지가 넘쳤다고요?”
“얘야, 지금도 너네는 에너지가 넘친단다, 하하하하하하. 하지만 아기들의 에너지와는 비교할 수 없지. 아기를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상관없이, 모두 그런 것을 느낀단다. 왠지 신기하고, 귀엽고, 마음이 모질어질 수 없지. 어떤 생명력이랄까 하는 것이 있어. 이제 막 세상에 온 지 얼마 안 된 생명체 특유의 연약함과 무척 싱싱한 생명력, 그런 걸 다 본능적으로 느끼고, 또 끌리는 거지. 우리도 결국엔 똑같은 생명체니깐... 하여간 말이 좀 빗나갔다만, 무언가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의 기척을 내거나, 사람과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는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는 게 아빠의 결론이란다. 영혼일 수도 있고, 어떤 에너지의 흐름이나 폭발일 수도 있고, 또 아빠는 믿지 않지만 귀신이나 유령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이름을 붙일 수 없거나, 잘 모르는 ‘또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있지.”
알 듯 말듯한 아빠와의 대화를 대충 끝내고 방으로 돌아온 보비는 머릿속이 더 어지러웠다. 아마님은 영혼일까, 아니면 어떤 강력한 에너지일까? 에너지는 전기 같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걸까? 아마님이 영혼이라면 아마님의 몸은 어떻게 된 것일까? 죽은 걸까, 아니면 어딘가에 있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을 하다가, 보비는 깜빡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보비는 아침을 먹으면서 엄마 아빠에게 말을 꺼냈다.
“오늘 학교 끝나고 도서관에 바로 가려고요.”
“그래, 그럼 평소처럼 아빠가 퇴근하는 길에 도서관에 들릴게.”
“네”
보비네 가족은 모두 책을 좋아했다. 도서관에도 자주 가서 책을 빌리기도 하고, 읽다가 오기도 했다. 보비네 동네 도서관은 집에서 걸어가면 15분 정도 거리에 있었는데, 보비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도서관에 들렸다. 그런 날은 미리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고, 도서관 문이 닫히는 5시까지 있는 것이 보통이다. 퇴근하는 아빠가 도서관 바로 앞 버스 정류장에 내려, 보비를 만나 같이 집까지 걸어오곤 했다.
‘학교가 3시에 끝나니깐... 마치자마자 전속력으로 뛰어가서 그 집으로 가면 3시 10분엔 갈 수 있어. 도서관엔 4시 50분까지만 도착하면 돼. 그럼 1시간 40분. 아마, 거기 시간으론 2시간? 3시간? 정도는 충분히 있을 수 있을 거야. 아마님을 찾아가야지.’
라고 보비는 학교에 걸어가면서 계획을 정리했다.
보비는 그 날 하루 종일 다소 멍하게 보냈다. 어제 있었던 일과 나중에 아마님을 만나러 갈 생각을 하느라,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좋아하는 과학 시간에도 멍하니 있다가, 선생님이 부르는 소리를 놓치고 말았다.
“보비, 이 녀석. 너, 정신을 어디다 빼놓은 거냐?”
라는 선생님의 큰 호통 소리에 보비는 깜짝 놀랐다.
“네?”
“어허, 보비. 아까 시작할 때부터 멍하니 있더니, 마음이 어디 딴 데 가 있구나. 정신 차리고, 똑바로 앉아라.”
“아... 네...”
킬킬거리는 친구들 웃음소리에 얼굴이 붉어진 보비는 고쳐 앉으며 수업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른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 정신을 어디다 빼놓았냐, 마음이 딴 데 가 있냐고 하셨어. 나도 사실 계속 딴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지. 이럴 때 내 마음이나 정신은 진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딘가로 흘러가 있는 걸까? 왜 정신을 빼놓았다, 마음이 다른 데 있다는 말들을 하는 걸까? 아마님도 그런 게 아닐까? 아마님의 몸은 어디 다른 곳에 있거나, 아니면 몸은 없는데, 아마님의 정신만 그 이상한 곳에 있는 게 아닐까?’
보비가 한참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마침내 수업이 끝났다.
보비는 얼른 가방을 챙겨 교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리고 바로 어제의 이상한 집으로 향했다. 그 골목길은 어제와 똑같았다. 봄날 오후의 나른한 느낌처럼, 집들이 모두 낮잠을 자는 것처럼 조용했다. 하지만 어떤 불길하거나 버려진 느낌은 아니었다.
‘꼭 커다랗고 폭신폭신한 고양이가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아. 이 골목길이 꼭 낮잠 자는 큰 고양이 같아.’
라고 보비는 생각했다.
어제의 이상한 집 앞에 도착한 보비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가 뱉었다. 집은 어제와 똑같아 보였다. 어제 보비가 들어간 울타리의 빈 틈도 똑같았다.
‘공은 없구나, 오늘은’
보비는 잠시 망설이다가 덤불 틈으로 들어갔다. 집이 보였다. 그리고 보비의 시선 정면에 바로 어제의 자전거가 보였다. 자전거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무척 신비스럽게 반짝거렸고, 꼭 보비가 오는 것을 알고 기다렸던 것처럼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정말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라고 보비는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어제 자전거를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나. 아마님네 들어갈 때 자전거는 거기 세워두었지. 그리고 아마님네 집에서 나와 바로 이상한 버섯 문으로 나갔으니깐. 그러면 아마님이 자전거 주인인가? 하지만 자전거 주인이었다면, 어제 바로 이야기하셨을 거야, 이건 내 자전거인데 라고 말이야. 하지만 자전거 주인을 알고 있다고만 하셨어, 아니, 정확히는, '안다고 할 수 있다' 고 하셨지. 그게 무슨 말일까? 자전거 주인이 누구든지 간에, 여기 다시 딱 세워 놓았나 봐.’
보비는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저... 잠깐 빌려 탈게요. 고맙습니다!”
하고 보비는 허공에 대고 크게 소리친 후,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리고 왠지 모를 충동에 이끌려 자전거에게도 말을 했다.
“어제 태워줘서 고마웠어. 오늘도 잘 부탁해.”
보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전거는 어제의 언덕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비는 입을 벌린 채로 자전거 손잡이를 꼭 잡았다.
‘뭐야, 이거? 말을 알아듣는 자전거야? 하긴 여기는 이상한 곳이니, 자전거가 말을 알아들을 수도 있지. 나도 괜히 머리가 이상해져서 자전거에게 말을 한 건 아니야. 꼭 뭐랄까... 어제 아빠가 해주신 이야기 중에, 생명력이란 게 나왔었지. 이 자전거 느낌이 좀 그랬어. 자전거인데, 왠지 개나 말이나, 하여간 동물이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나도 갑자기 말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보비가 신기한 자전거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사이, 자전거는 어느새 아마님의 집 앞에 멈춰 섰다. 보비는 얌전하게 자전거에서 내려, 잠시 망설이다가, 손잡이를 살짝 쓰다듬었다.
‘어... 고마워. 너는 아주 좋은 자전거야. 음, 정말 부드럽게 잘 달려서 기분이 좋았어.’
보비가 ‘내가 혼자 바보같이 말한 건가?’라고 생각하는 순간, 자전거는 통통통 하고 3번을 가볍게 뛰더니 다시 방향을 바꿔서 왔던 길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보비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씩 웃으면서 자전거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지금 자전거가 나한테 대답한 거 같은데?’라고 생각한 보비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보비는 기분 좋게 아마님의 집 문을 두드렸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보비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문이 열리고 아마님이 나타났다.
“야아, 보비구나!”
아마님은 활짝 웃으며 보비를 반겼다. 그리 크게 웃은 것도 아니었는데, 얼굴 전체가 화 악하고 밝아지는 느낌에 보비는 기분이 더 좋아졌다.
“아, 저, 안녕하세요, 오늘도 왔어요.”
“그래, 그래. 얘, 잘 왔다. 길 찾기는 어렵지 않았니?”
“아, 그게... 어제 그 자전거를 또 봤거든요. 그래서 올라탔더니, 혼자 막 달려왔어요. 꼭 제가 갈 곳을 아는 것처럼요.”
“아하하하하, 그랬구나.”
“저... 아마님이 자전거 주인이세요? 어제 자전거 주인을 안다고 할 수 있지 라고 하셨잖아요.”
“나는 그 자전거 주인이 아니야. 자전거 주인은 네가 본 집 있지? 공을 따라 들어온 집 말이야. 그 집 자전거란다. 네가 본 공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그 집은... 개인이 사는 집이 아니고, 역이란다. 공공건물이야. 누구 한 사람이 소유한 건물이 아니고, 자전거와 공 역시 개인 물건이 아니거든.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한 거야, 안다고 할 수 있지라고.”
“역이요? 기차역이나 지하철역 같은 역이요?”
보비는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다시 되물었다.
“그래, 역. 우리 세계에도 역이 있거든. 서로 다른 구역을 연결하는 기차 같은 게 있단다.”
“네에...”
보비는 도저히 잘 상상이 가지 않아 그저 고개를 갸우뚱했다.
“보비야, 간식 좀 먹을래? 오늘은 쿠키를 구웠어.”
“네!”
신나게 대답하며, 보비는 아마님을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 어제처럼 보비에게 편히 기다리라고 한 후, 아마님은 부엌으로 사라졌다. 오늘도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마님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민트 초콜릿 칩 쿠키랑 민트 차야.”
‘윽... 민트는 별로인데’라고 생각했지만, 보비는 예의 바르게 잘 먹겠습니다라는 인사를 한 후, 쿠키를 하나 입에 가져갔다.
“와... 정말 맛있어요. 민트는 항상 치약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건 정말 맛있어요. 치약 같은 맛이 안 나요, 향이 뭐랄까 더 부드럽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또 민트향은 아주 많이 나는 것 같은데... 신기해요.”
“아하하하하, 그러니? 민트 쿠키를 먹은 다음에 민트차를 한 모금 마셔보렴. 또 다르단다.”
보비는 민트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굉장히 달콤한데, 순식간에 단 맛은 사라진 후, 민트향만 혀 끝에 남아서 무척 상쾌했다.
“정말이에요. 꼭 민트 바람을 마신 거 같아요.”
“아하하하하. 보비야, 고맙다, 맛있게 잘 먹어주어서 고맙구나.”
아마님은 찡긋 윙크를 하며 말했다.
“그럼, 나도 맛을 봐야지.”
아마님은 전날처럼 주머니에서 새끼손가락 크기의 병을 꺼냈다. 그리고 병 속의 투명한 액체를 톡톡 민트 쿠키에 떨구고 잠시 기다렸다. 곧 아마님은 쿠키를 코와 입 쪽으로 가져가 후욱 숨을 빨아들였고, 무언가 옅은 초록색의 연기 같은 것이 쿠키에서 나와 아마님의 입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보비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 민트가 아주 향이 좋구나. 우리 집 텃밭에서 기른 것이란다. 내가 처음 꽃밭과 텃밭을 일굴 때는 많이 실패했지. 시들시들하다가 금세 죽어버린 식물들이 좀 있었단다. 하지만 민트만은 처음부터 아주 튼튼하고 싱싱하게 자랐지. 고마운 풀이야. 초콜릿도 진하고 부드럽구나. 하지만 너무 진하지 않고 적당하게 진해. 너무 진하면 민트와 잘 어울리지 않지.”
아마님은 향을 음미하듯이 아주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떴다.
“저... 지금 들이마신 게 냄새인가요?”
아마님은 보비의 호기심 어린 얼굴을 마주하며 미소를 지었다.
“보비야, 어제 궁금해했지. 내가 직접 먹지는 않는데, 향이나 맛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깐. 뭐를 뿌렸는지도 궁금하고.”
보비는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아마님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우선 나는 너처럼 뼈와 살, 피로 이루어진 몸이 없단다. 그래서 음식을 먹거나 소화시킬 수 없어. 그럴 필요도 없고. 마찬가지로 음식을 씹거나 냄새를 맡을 수도 없지. 하지만 나도 과거의 어느 순간에는, 지금의 너처럼 살아있는 몸이 있었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냄새를 맡고, 씹으면서 음식을 즐겼지. 그런 즐거움은 아주 중요하고, 강렬하단다. 그래서 몸이 없는 지금도, 그 기억은 나에게 생생히 남아있어. 여기 있는 나와 같은 존재들도 다 마찬가지란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억을 계속 재생하는 거야. 말이 좀 어렵니?”
“네... 혹시 비디오 파일이나 음악 파일을 재생하는 것과 비슷한 건가요?”
“맞아, 비슷해. 우리가 몸이 있을 때 경험하고 알았던 감각들을 다시 재생하는 거야. 단지 좀 다른 점들이 있다면 새로운 것들은 느낄 수 없단다... 우리가 몸이 있을 때 경험하지 못했던, 기억에 없는 냄새나 감각들은 재생할 수가 없어. 레몬 냄새를 한 번도 맡은 적이 없었다면, 여기서도 레몬 냄새를 재생할 수 없지. 하지만 이런 경우는 사실 별로 없단다. 우리가 냄새를 맡을 때, 하나하나 어떤 냄새다 하는 것을 일일이 의식하지 않아도, 그 모든 냄새는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거든. 그 냄새, 향기, 느낌을 여기에선 더 생생하게 느끼게 된단다.
내가 뿌린 건 생기야. 생기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니? 그건 너와 같은 살아있는 몸과 기운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에너지 같은 거지. 얼굴에 생기가 있어 보인다, 혹은 생기가 하나도 없이 풀이 죽었다 같은 표현들을 쓰잖니? 다 비슷한 것이란다. 우리는 그 생기가 있어야 존재하고 활동할 수 있어. 우리는 몸이 없으니까 그런 생기를 만들 수 없어. 그래서 살아있는 몸, 움직이는 몸, 활동하는 몸으로 직접 생기를 만들 수 있는 존재들에 기대야 해.”
“생기요? 저도 그런 생기를 만든단 말씀이세요?”
“오, 그럼.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이 숨을 쉬고 움직이고 있다면 누구나 생기를 기본적으로는 항상 만들고 있단다. 사실 그건 만든다기보단 내뿜는 거와 비슷한 거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는 거라서 딱히 의식을 못하는 거지. 식물은 산소를 내뿜잖니? 하지만 식물이 그걸 의식하는 건 아니지. 이제부터 노력해서 내가 산소를 만들어야 되겠다, 이런 식으로는 하질 않잖아. 물론 태양과 토양 같은 환경은 갖춰져야 하지만, 산소를 내뿜는 것은 살아있는 식물이라면 당연한 것이지. 살아있는 사람의 생기도 비슷해. 우리는 그런 생기들을 흡수해서 살아간단다. 옛날엔 그런 생기들을 흡수하기 위해 항상 사람들 곁에 가까이 있어야 했어.”
“어떻게 흡수하는 데요?”
“오, 별 특별한 건 없단다. 그냥 사람들 가까이 있으면서 뿜어져 나오는 생기를 들이마시는 거야. 우리에겐 그 생기가 보이거든. 서로 다른 색깔과 농도의 연기 같은데, 가까이 가서 들이마시는 거지.
아이들의 생기는 무척 진하고 풍부하단다. 뛰고, 고함지르고, 울고, 웃는 아이들 곁에 가면 생기가 정말 폭발적이지. 그건 꼭 색색의 불꽃놀이 같아. 온 주위에서 온갖 색깔의 에너지들이 튀어 오르지. 보기에도 아름답지만, 그 에너지를 마시면 무척 기분이 좋아. 꼭 진한 크림을 마신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살아있을 때 마셨던 아주 맛있었던 칵테일이나 무척 향기로운 차나, 추운 날 밖에 있다가 따뜻한 실내로 들어갔을 때의 아주 만족스러운 따뜻함 같은 그런 감각들이야. 그런 종류의 감각을 동시에 몇십 배로 강하게 느낀단다.
또... 싸우는 사람들도 생기가 넘치지. 그건 불꽃놀이처럼 튀어올라 팡팡 터지지는 않고, 짧고 빠르게 직선으로 튀곤 하지. 그런 생기는 마시면 가끔 어지러울 때도 있단다.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경우마다, 다 생기에서 나오는 에너지의 느낌이나 양이나 농도가 다 달라. 하지만 어쨌거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는 항상 공기 중에 생기가 많이 흐르지. 파티나 시위, 공연장, 운동장 등등... 물론 예외도 있어.
갓난아기들은 혼자 있어도 뿜어내는 에너지가 엄청나단다. 누워서 팔다리를 흔들다가, 울다가 하는 것이 전부지만, 아기들을 둘러싼 에너지는 엄청나지. 또 아주 향이 좋고 품질이 좋은 에너지야. 또 성인이어도 특별하게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들이 있기도 해.”
“그런데... 항상 사람들 옆에 있어야 하면... 아마님은 어떻게 여기에? 아, 아까 옛날이라고 하셨잖아요? 지금은 다르다는 건가요?”
“그래, 지금은 다르지. 우리도 어느 순간에는 사람이었단다. 지금처럼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기 전엔, 우리 역시 많지 않았어. 그래서 사람들 옆에 항상 있어도 별 문제가 없었지. 항상 자리가 많았다고 해야 하나? 우리 모두 아이들 가까이 있고 싶어 하거든, 그 에너지는 모두에게 환영받는 종류의 생기니깐. 누군가가 아이들이 많이 있는 집에 가면, 이미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경우가 많아. 하지만 또 다른 집들이나 아니면 학교나 다른 장소를 몇 군데만 더 가보면 항상 자리가 있었어.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들의 생기를 필요로 하고 마시는 우리 같은 존재보단, 생기를 만들어내는 존재, 그러니깐 살아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거지. 그래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단다. 하지만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이 세계에 들어오는 자들의 수도 급격하게 늘었지.
수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어. 이전엔 아이들이 5명 있는 집에 하나만 편히 머물면서 생기를 마실 수 있었다면, 어느 순간 둘, 셋, 다섯, 여섯이 들어오게 된 거지. 그건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고들 한단다. 물론 나는 직접적으로 경험이 없으니깐 모르지만, 배워서 알고 있지. 이 세계에 처음 들어왔을 때 들었던 교육시간에 배운 거야. 우리가 여기서 살기 시작하면서 이곳의 역사에 대해서도 자세히 배우거든.
이전엔 내가 혼자 2인분을 먹을 수 있었다면, 이젠 혼자 1인분도 채 안 되는 것을 먹어야 하는 것과 비슷하게 되었달까. 어찌 보면 당연한 거지. 공급보다 수요가 많아진 셈이 되니깐. 아무튼 그러다 보니 다들 기운을 잃거나 심지어 소멸되는 일도 생겼어. 생기를 적절하게 흡수하지 못하면, 그냥 사라지는 거야. 여기서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른단다. 그건 우리도 아직 연구 중이야. 어찌 되었건 사라진다는 것은 큰 일이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생기를 충분히 섭취하던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다들 느끼기 시작했어. 다들 무겁고 느리고 힘들다는 느낌이 들었지. 둔해진다고 해야 하나, 고통을 느낀다는 경우도 많았어. 이런 것들은 당시 연구에 자세히 나와 있단다. 그런 연구가 있었냐고? 오, 얘야, 여기는 몸을 가지고 살아있는 사람의 세계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연구한단다, 하하하하. 우린 시간이 많거든.
문제는 그뿐만 아니었어. 더 큰 문제가 생겼지. 서로 싸우기 시작한 거야. 당연한 일이지. 몸이 없을 뿐이지, 우리 역시 감정이 있고, 욕망이 있단다. 같은 공간에 여럿이 있다 보면 예민해지고 스트레스를 받지. 게다가 처음엔 막연했던 것이 점점 더 확실해졌을 거야, 내가 혼자 있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점점 더 수가 늘어나니깐 내가 흡수하는 생기가 적어지는구나라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야.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점점 더 적대적이 되어갔지. 상대를 내쫓고 싶어 하고. 그래서 많이 싸우기들 시작했어. 몸이 없는데 어떻게 싸우냐고? 싸울 수 있단다. 몸은 없지만, 상대에 대한 악의를 가지고 서로 부딪치는 거야. 서로 다른 에너지가 마구잡이로 충돌하는 거지. 몸은 아니지만, 우리도 얼마든지 상처를 입히고, 입을 수 있단다. 약해지고, 고통을 느껴. 회복을 하려면 생기가 필요한데, 경쟁이 너무 심하니 제대로 생기를 흡수할 수가 없었지. 그러면 다시 기를 쓰고 싸움을 해야 하고... 이런 악순환이 계속 벌어졌어.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단 생각이 다들 들었지.
그래서 우리는 대규모의 회의를 해서 '1차 상호 대협약'을 하게 되었어. 시간이 흐르고 다 지나간 지금에서야 한 줄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지만, 당시엔 제법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고들 한단다. 우리 전체의 수도 꽤 많으니 말이야. 우선은 어디에 몇이 있는지를 파악하고, 너무 집중되지 않게 분산을 시키는 데 동의했지. 골고루 생기를 섭취할 수 있게 말이야. 하지만 이도 쉽지 않았어. 다들 자기에게 익숙한 곳에 머물고 싶어 했거든. 하지만 한편으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구경하고 싶어 하는 자들도 많은데, 누구는 여기에 있어라, 저기에 있어라라고 하니 반발이 많을 수밖에. 많은 이들이 만족할 수 있으면서, 골고루 생기를 나누어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다들 궁리했지. 어쨌거나 우리 자신의 생존이 걸린 문제니깐 말이야. 이런저런 방법들을 이야기하고 시도해 보았지만, 쉽지 않았단다.
그런데 그때 가히 혁명적인 일이 일어났어. 내가 아까 여기도 연구하고 공부하는 자들이 많다고 이야기했지? 여러 가지 자기가 관심 있는 것을 알아보고 공부하는 자들이 무척 많은데, 그중 특히 많은 자들이 연구한 주제가 있었어. 바로 생기를 저장하고 운반하는 문제였지. 사람들 가까이 있는 것은 우리 모두 좋아하는 편이란다. 생기가 더 따뜻하고, 더 강렬하고, 더 신선하달까. 하지만 항상 곁에 있으면서 생기를 흡수해야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이미 와 있는 다른 자들과도 경쟁해야 하고, 싸울 때도 있고, 자리를 옮겨야 할 때도 있고, 불안정한 일이지. 게다가 우리도 다 하고 싶은 일들이 있고, 다른 일들이 있는데, 계속 이리저리 생기를 찾아다니는 건 꽤 힘든 일이지. 그래서 많은 이들이 어떻게 생기를 저장하고 운반할 수 있는가를 연구해 왔지. 그러다가 100년 전 즈음에 처음으로 가능성이 발견되었어. 살아있는 몸을 가진 자들의 세상에서도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할 때였지. 그즈음 우리 세계로 들어온 자들은, 기존에 계속 연구되었던 사실들에 새로운 요소와 방법을 많이 시도했지. 그러다가 마침내 처음으로 생기를 저장하고 운반하는 데 성공했단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발전했지. 지금은 생기를 채집해서 저장하고 운반하는 것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단다. 아까 내가 꺼낸 그 조그만 병 있지? 거기에 생기가 들어있어. 나는 필요할 때, 아니면 감각을 느끼고 싶을 때마다 그 생기를 꺼내서 쓰지. 그리고 떨어지면 새로 충전을 하고.”
아마님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민트차를 음미했다.
“지금처럼 이렇게. 차나 음식의 고유의 향과 맛을 느끼는 거야.”
정신없이 이야기를 듣느라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던 보비도 얼른 쿠키를 먹었다.
“그런데... 또 새롭고 복잡한 문제가 생겼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