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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걸침 Jan 23. 2024

아침에 눈을 뜨면 기분 좋은 이유

하얀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가고 있었다. 윤슬이 그녀의 몸에 별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울리는 소리. 익숙한 소리다. 그런데 지금 이 장면과 어울리는 소리는 아닌데? 눈이 떠졌다. 알람소리였다. 그녀도 바다도 사라졌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너냐? 입속에서 웅얼댔다. 아침에 눈약을 넣을 시간이다. 안압이 높아지면 녹내장으로 갈 수 있기에 매일 두 번씩 넣으라는 의사의 지시다. 


세계여행을 할 때 그랬다. 아침이면 텐트 속에서 낯선 새소리와 말소리와 낯선 공기에 눈을 뜬다. 속으로 웅얼댄다. “여기가 어디지?” 그래서 나는 공간이 시간의 형이라 믿는다. 우선 내가 있는 위치가 궁금한 것이다. 어제 내가 있었던 곳과 지금 여기를 이어보려는 노력이다. 그다음 질문이 “오늘이 며칠이지?”이다. 집안에서 아침에 눈을 떠 익숙한 천장을 보면 여기가 어디인지를 확인하게 되고 그다음에 시간을 질문하는 것이다.     

오늘이 언제인지를 묻는다는 것은 어제의 나를 기억하려는 과정이다. 어제 내가 눈으로 보고 만졌던 세상을 기억하려는 것이다. 잠깐 지구가 태양의 시선을 벗어나는 밤의 시간, 내가 세상을 보지 않던 그 시간 동안 세상은 내게 없었던 시간이다. 현대물리학에서도 그렇다. 관찰자가 보고 있을 때만 사물은 존재상태로 있는 것이다. 관찰자가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만 있을 확률상태로만 있다는 것이다. 밤새 눈을 감고 관찰하지 않았으니 세상의 존재들은 존재했다기보다 그저 확률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가끔은 내 꿈에 바다인 듯 아닌 듯 나타나고 반짝이는 그녀인 듯 아닌 듯 비치기도 했을 것이다.      

눈약 뚜껑을 연다. 안압이 오르면 시신경을 눌러 그 신경이 다시 회복이 되지 않는다. 세상을 관찰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나는 존재가 아니라 확률만 보게 된다. 관찰자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세상은 내가 보지 않아도 돌아가게 되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세상이 아니다. 

기억도 그렇지는 않을까. 기억의 신경이 눌려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기억을 보지 못한다면 그저 확률로만 보게 되는 것인가. 내가 그때 너를 만났었을 수도 있고 만나지 않았었을 수도 있는.., 이른바 기억감퇴를 넘어 치매로 이르는 길인가.      

오늘 나의 이 두 눈은 중대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아침을 맞았다. 세상의 모든 확률적 존재를 확실한 존재로 만드는 사명. 사랑하는 네가 내 옆에 있을 확률이 아니라 너는 나에게 분명한 존재로 있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일이 단순한 확률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도달하게 되는 타깃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관찰자로서의 내 눈이 가진 의무요 책임일 것이다. 나태주의 시가 그렇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어제는 익숙한 사람과 익숙한 놀이를 하며 그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오늘은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대화를 하며 그들을 확률에서 존재로 바꿀 것이다. 그래서 내 눈은 언제나 초롱초롱 떠  있어야 한다. 세상을 내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나는 쉬지 않는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안약을 한 방울 떨어뜨린다. 그래, 오늘도 빳빳한 24장의 시간으로 희미한 세상을 분명한 존재로 바꿔보자. 눈을 뜬다. 세상이 환해진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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