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내 아이의 기원을 찾아서...
얼마 전 한동안 아이가 ‘빅뱅’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 어딘가에서 빅뱅, 우주의 팽창, 우주적인 시공간 등에 대한 단편적이고 엉성한 지식을 얻고 나서 지식의 빈 공간들이 아이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것 같았다. 아이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도 같이 ‘우주의 기원’이 궁금해졌다. 나는 인터넷 서점에서 유아용부터 청소년용까지 다양한 수준의 ‘빅뱅’ 관련 서적을 주문했다. 그리고 먼저 그중 그림책 두 권을 아이와 함께 읽었다.
이런!! 제법 재밌다. 그리고 왠지 그동안 찾아 헤맸던 ‘나’의 기원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138억 년 전에 생긴 ‘빅뱅’으로 인해 분리된 원자들이 퍼져 나가서 모이고 부딪치면서 태양이 됐고 지구가 됐고 생명체가 됐고 인간이 됐다고 한다. 따라서 지금의 인간을 이해하려면 138억 년 전 우주의 탄생인 빅뱅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나를 포함해서 우주의 모든 것을 이루고 있는 것은 빅뱅 이후 우주를 떠돌던 원자들이다. 그 원자들은 138억 년의 시간을 포함한 채 내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를 거쳐 할머니의 할머니를 거쳐 할머니를 거쳐 엄마를 거쳐 나에게 이르렀고 이제 내 아이를 이루고 있다. 원자들은 수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거치면서 다양한 질병의 인자들과 신체적인 특징과 같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그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기억과 감정과 기질들까지 실어 날랐을 것이다. 나는 이것들의 복합체로 태어났다. 둘째 고모를 닮아 고도 근시이고 셋째 이모를 닮아 다한증이 있으며, 태어날 때부터 아빠를 닮아 삶이 시큰둥했고 엄마를 닮아 이유 없이 억울했다.
따라서 내가 나와 내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삶을 되짚어 보는 건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138억 년은 고사하고 내 기억이 닿는 할머니 할아버지 대까지만 해도 몇몇은 일찍 돌아가셔서 그 생이 친척들 사이 구전으로만 전해지거나 관계의 단절로 베일에 가려진 부분도 있으니 몇 피이스 안 되는 퍼즐조차도 듬성듬성 구멍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의 기원을 찾아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보려는 시도는 나름 의미 있을 것이고 그래서 그 끝이 어찌 되든 한 번 시작해 보려고 한다.
먼저 우리 할아버지는 집안에서 사람 좋고 영민하기로 소문났으나 술 좋아하고 생활력이 부족했단다. 그 구멍을 할머니가 연탄 장사와 바느질로 메꾸면서 살았는데 팍팍한 삶과 타고난 기질이 버무려져 동네 소문난 억척스러운 욕쟁이 할머니가 됐단다. 할머니는 손재주가 좋으셨다. 내가 어렸을 때는 낙원 상가 한켠에서 한복을 지어 파셨다. 가끔 집에 오실 때 미제 초콜릿을 사다 주신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아빠가 결혼하고는 집안일을 대부분 며느리에게 넘기고 그 후 욕쟁이 시어머니 노릇을 주로 하셨다. 아빠가 시집살이에서 엄마를 탈출시키려고 지방으로 전근을 간 후 엄마, 아빠가 지어 놓은 집에 막내딸 식솔, 막내아들 식솔들을 들여 사셨다. 할아버지는 아빠에게 좋은 머리와 궁핍한 가세와 그걸 술로 회피하는 기질을 물려주셨고 할머니는 안타깝게도 자식들에게 간염 인자를 물려주셨다. 할머니를 포함해서 아빠 형제 다섯 명 중 네 명이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막내딸이 먼저 가는 걸 보셔야 했다.
아빠는 가끔 엄마에게 “우리 집이 얼마나 가난했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 할 거야.”라고 했다. 그 시절 도시에서의 가난은 농촌에서의 가난보다 더 팍팍했다.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 장남이었던 아빠는 당연히 대학 입학은 꿈도 못 꿀 형편이었으나 뛰어나게 공부를 잘한 덕분에 그 당시 장학금을 받으면서 다닐 수 있는 대학 여러 곳에 합격했다. 그런데 아빠의 재능과 꿈은 아빠를 자꾸만 불만족스러운 현실에서 까치발을 들어 조금 더 위로 손을 뻗게 부추겼고 아빠는 결국 장학금을 포기하고 서울대 법대 시험을 봐서 합격했다. 아빠는 입주 가정교사를 하며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가 끝내 졸업을 못 했고 결국 아빠의 공식 학력은 고졸이 되었다. 이때 아빠가 서울대라는 꿈이 아닌 좀 더 현실적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아빠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 지금까지 머릿속에 맴돈다.
이때부터 가난이 기본값이었던 아빠의 인생에서 중간중간 기막힌 타이밍에 불운까지 겹치기 시작했다. 아빠는 우여곡절 끝에 이십 대 중반에 사시 1차에 합격했는데 2차 시험을 준비하던 차에 하필 5.16 쿠데타가 발발했고 아빠는 시험을 포기하고 급히 입대해야 했다. 제대를 두 달 남기고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빠는 잠시 숨고를 시간도 없이 식구들 생계와 동생들 등록금을 대기 위해 아무 데나 정말 아무 데라도 비집고 들어가야만 했다. 시험을 보면 붙으니 그나마 어디든 들어갈 수는 있었다. 가장 먼저 우체국 기술직으로 입사했다는데 이공계통 지식이 전무했던 아빠가 기술직이라니 급하기는 급했나 보다. 당연히 오래 일하지 못했고 그렇게 아빠는 이런저런 직장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검찰 일반직으로 입사했고 조기 퇴직할 때까지 20년 동안 검찰 수사관, 법무부 사무관으로 일했다.
아빠가 검찰에서 일할 때 이제라도 다시 사시에 도전해 보라는 주변의 권유에 이끌려 다시 공부를 시작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엄마가 보험회사를 다니고 있었기에 엄마도 아빠의 도전을 지지해 줬다. 아빠는 휴가를 내고 사시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아빠의 마지막 도전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빠는 아빠의 공부를 응원하러 찾아온 직장 동료와 가볍게 한 잔 하고 귀가하던 중 계단에서 넘어져서 머리를 다치고 말았다. 아빠는 몇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고 결국 아빠 인생에서 꿈을 위한 마지막 도전은 그렇게 끝나 버렸다. 아빠의 능력으로는 더 높은 곳에 다다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번번이 아빠를 잡아끄는 중력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아빠는 공무원 월급으로는 딸 아들 공부시킬 수 없을 것 같다며 20년 근무를 마치고 공무원을 그만두셨다. 그 후 집달관을 거쳐 법무사 개업을 하셨고 어느 정도 가산을 일구셨다. 모든 면에서 여유가 생기고 엄마와 여행도 다니고 취미 생활도 하셨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아빠에게 그런 시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딱 60세에 간암 말기 진단 후 두 달 만에 돌아가셨다. 늙는다는 게 질병이나 저주처럼 여겨지는 세상이지만 아빠에게는 늙어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아빠는 아빠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해서였는지 아니면 단지 술 좋아하는 할아버지의 기질을 닮아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주 술을 드셨다. 술을 좋아하는 만큼 주량도 세면 좋으련만 매번 술을 이기지 못하고 취하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셨다. 나는 아빠의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이 정말 싫었다. 그러나 아빠는 그 시대 대부분의 아빠들과 달리 전혀 가부장적이지 않았다. 술 때문에 엄마에게 항상 미안해했고 자식들과 엄마의 의견을 항상 존중해 주셨다. 자식들이 무슨 일을 하든 판단하고 비난하지 않으셨고 항상 자식 편에 서 주셨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참 후까지 나는 때때로 아빠가 보고 싶어서 엉엉 울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평생 농사꾼이셨다. 흔히 말하는 법 없이도 착하게 사실 분들이었다. 할아버지는 아주 다정한 분이셔서 새벽에 일어나 불을 지피고 물을 데워 놓은 후에 할머니를 깨우셨다고 한다. 두 분은 평생 그렇게 다정하게 사셨다. 그래서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려서 할머니와 자식들을 못 알아보던 7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할아버지를 돌보셨다. 외할아버지는 순한 겉모습과 달리 흥이 많아서 마을 잔치 때마다 태평소를 불며 농악대를 이끄셨다. 엄마 말로는 할아버지의 농악기를 연주하는 능력은 지금으로 치면 인간문화재급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의 형제들은 모두 흥이 많다. 엄마도 지역 문화센터에서 장구를 오래 배웠다.
엄마는 8남매의 장녀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은 자식 많은 부모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우리 엄마처럼 형제 많은 집 장녀의 팔자는 평생 시집과 친정을 오가며 그 많은 가지들 챙기다가 지나간다. 엄마 인생도 그랬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어렸을 때 건강이 안 좋으셨다. 그래서 어린 엄마가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더 어린 동생들을 챙겨야 했다. 그러면서도 매일 왕복 50리를 걸어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 고생을 같이한 든든한 고향 친구들은 지금까지 엄마의 가장 큰 재산이다. 그 후 상경해서 일할 때도 동생들을 서울로 불러 같이 살면서 동생들의 학업을 도왔다. 지금까지도 동생들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얘기를 들어주고 수습을 돕는 건 엄마의 몫이다.
엄마와 아빠는 운명처럼 만나서 가난한 연애를 몇 년 하다가 결혼에 이르렀다. 그런데 결혼 후 엄마의 파란만장한 시집살이가 시작됐다. 엄마의 시집살이 경험담을 들어 보면 도대체 그 시절 여자들에게 결혼의 실익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엄마는 시집온 첫날부터 낯선 동네에서 밥 지을 쌀을 꾸러 다녀야 했고 시어머니 시집살이보다 더 무섭다는 얌체 같은 시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했고 그 와중에 욕쟁이 시어머니가 쏟아내는 욕지거리를 받아내야 했다. 아빠가 준 월급봉투를 열어 보지도 않고 막내 삼촌 등록금으로 건네주고 여러 식구들 들고 나는 시간이 다 달라 하루에도 열 번씩 밥상을 차려야 했다.
엄마는 매사에 신중하고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고 책임감이 강하며 일머리가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주변 누구도 엄마를 허투루 대하지 않는다. 놀라운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친정 시집을 모두 챙기고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야말로 큰 언니, 맏며느리의 전형이다. 이런 엄마의 성정으로 걸어온 길고 긴 시간이 쌓여 지금의 대체 불가한 엄마의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때로 나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고 안타깝기도 했다. 엄마가 엄마의 책임과 의무라고 여기는 것들이 너무 층층이 높고 무겁게 여겨졌다. 엄마를 도와 1년에 열 번 되는 제사를 준비하면서 나는 더더욱 이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살고 싶었다.
엄마 아빠는 한 번도 형제들에게 장남 장녀로서의 무게와 섭섭함을 토로한 적이 없다. 그래서 결국 형제들은 아무도 아무것도 모른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지나도록 엄마는 고모들과 철마다 같이 여행을 다닐 정도로 잘 지내고 있다. 그래도 그 시절 그 섭섭함이 사라진 건 아니다. 엄마는 가끔 아니 자주 할머니가 엄마에게 했던 욕지거리를 내 앞에서 재연하곤 했다. 몸가짐이 얌전한 엄마가 그때만큼은 진짜 할머니로 빙의돼서 가슴 깊숙한 곳에 있는 가래를 끄집어 올려 씹어 뱉듯 거칠게 욕을 쏟아냈다. “이 썅년아~~ 씹팔년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도 그 억울함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언젠가 나는 엄마에게 “엄마, 그렇게 여러 번 말해도 안 풀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엄마는 순간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엄마가 그때 그 기억을 내 앞에서 그렇게나 반복 재생하고 있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실 나에게 할머니, 고모, 삼촌은 그리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할머니는 손주들을 끔찍이 아끼셨다. 낙원동에서 한복 짓는 일을 하시면서 자투리 천을 모아 해마다 알록달록 예쁜 한복을 해 입혀 주셨고 손주들을 업고 안고 물고 빠는 전형적인 옛날 할머니 모습이었다. 고모들은 내 기억의 시작점부터 이미 남의 집 사람들이었고 조카들의 입학과 졸업을 챙기는 가끔 만나도 편안한 살붙이들이었다. 다만 막내 삼촌 내외는 막내답게 철없고 이기적이었으나 막내 삼촌이 아이들이 초등학생 때 세상을 떠나 항상 사촌 동생들을 볼 때마다 불쌍하고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자라면서 이렇게 내 입장에서 만들어진 친족들의 이미지와 감정들을 오롯이 유지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엄마가 겪었던 일을 나에게 반복해서 들려줬고 그래서 내 기억 너머의 일들이 내가 만든 기억보다 더 생생했다. 게다가 돌아가실 때까지 술 때문에 엄마와 가족들을 힘들게 했던 아빠에 대한 원망을 듣는 것도 내 몫이었다. 나는 그들을 온전하게 좋아할 수도 온전하게 미워할 수도 없어서 갈팡질팡하면서 혼자서 감정의 혼돈 속에서 살아야 했다. 어느 때는 엄마의 감정에 몰입돼서 같이 치를 떨었고 어느 때는 나와 닮은 친족들의 모습이 마냥 편안하고 좋았다.
나는 엄마 마음을 안다. 암, 알고 말고지. 할머니나 내 친족들 누구 하나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했다면 그 맘이 조금은 풀렸을 텐데. 그렇지만 나는 또 할머니가 불쌍하다. 친정 식구들이 전쟁통에 월북하고 기댈 데 없이 혼자 남아서 매일 술통 속에 들어가 있는 남편 대신 식솔들을 먹여 살리느라 춥고 고단했을 할머니에게 고운 성정까지 바란다면 도둑놈 심보지. 그리고 또 나는 할아버지와 아빠가 불쌍하다. 꿈과 재능이 있었으나 시대를 잘못 만나 평생 좌절과 상실감 속에 살았을 그 시대 어른들의 삶이 불쌍하다. 그리고 또 나는 고모들과 삼촌도 불쌍하다. 철없이 올케에게 얌체 노릇을 했던 고모들이 결혼 후 겪었던 인생 풍파도 만만치 않았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충분히 만끽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던 삼촌의 짧은 삶도 안쓰럽다.
그렇다면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고모 이모들에게서 무엇을 이어받았나? 나는 장남 장녀의 맏딸이다. 가족 친족 형제들에 대한 책임감이 내 무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다. 내가 굳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일도 괜히 내 일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면서 또 섭섭하고 억울할 때가 있다. 또한 나는 줄곧 마치 자기부상열차처럼 현실에서 약간 떠 있는 느낌으로 삶을 살았다. 아마 세상에 대한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이 컸던 할아버지와 아빠의 유전자가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싶다. 할머니의 손재주나 외할아버지의 음악적 재능은 아쉽지만 나에게까지 미치지 못한 것 같다. 또한 아빠의 몸치, 음치 기질을 빼닮았고 엄마를 닮아 심각한 길치이고 고모, 삼촌을 닮아 근시이다. 나는 또한 엄마를 닮아 관계에 신중한 편이고 아빠를 닮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엄마 아빠를 닮아 마음속 열정이 있다. 이것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우연히 내가 장착하고 태어난 것들이다. 엄마 아빠의 빛나는 부분도 내 안 어딘가에 분명 있을 텐데 나쁜 대물림은 쉽게 드러났지만 엄마 아빠가 내게 물려준 좋은 것들을 나는 발굴하고 갈고닦지 못했다. 어찌 됐든 빅뱅 이후 138억 년이 지나 나에게 전달된 원자들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이후의 내 삶은 이것을 바탕으로 내가 해 온 선택들의 합이며 내 의지로 내가 만들어 간 시간들이다. 따라서 원자들의 138억 년의 여행은 개인 개인의 의지가 포함된 선택들이 포함되면서 그 가능성이 증폭되고 확장돼 왔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술태배기 남편과 억울한 시집살이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시키기 위해 결혼은 생각도 안 한 채 40년을 살았고 타고난 능력에 맞지 않는 꿈은 지레 접었으며 모든 관계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내가 손해 보는 쪽이었고 술태배기를 피하다가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우리 아빠의 장점들로부터도 완전히 거리가 먼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게 됐다. 나는 아빠와는 완전히 다른 장단점을 가진 사람을 배우자로 삼았다.
그렇게 138억 년을 여행해 온 내 원자는 또 다른 138억 년의 시간을 담고 있는 원자와 충돌해서 또 하나의 빅뱅을 만들었다. 내 아이라는 우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수많은 138억 년의 물질과 기억과 맺힘과 풀림이 담긴 아이의 원자들이 또다시 우주의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이미 아이를 구성하는 원자 하나하나 세포 구석구석에 나와 아이 아빠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거기에 내가 감당해야 할 나쁜 것들을 더 보태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 아빠에 대한 원망은 나의 것이다. 아이 기억 너머의 일로 아이의 것이 아닌 감정을 갖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이가 어쩔 수 없이 엄마 아빠 각각의 138억 년을 몸과 마음에 담고 태어났지만 그 기반 위에서 오롯이 아이의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앞으로 아이가 만들어 갈 또 하나의 우주를 앞에 두고 한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