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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이티브스피커 Jun 26. 2022

여전히 아름다운지...

'여전히'에 대해서

여전히

부사  
1.      전과 다름없이.

십 년 만에 만난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밤이 몹시 깊었고 여전히 비는 뿌리고 있었다.
 그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술을 잘 마신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


..............

변한 건 없니
날 웃게 했던 예전 그 말투도
여전히 그대로니
난 달라졌어
예전만큼 웃질 않고 좀 야위었어
널 만날 때 보다
............

변한 건 없니
내가 그토록 사랑한 미소도
여전히 아름답니
난 달라졌어
예전만큼 웃질 않고 좀 야위었어
널 만날 때 보다

여전히 아름다운지 (토이)



중급 수준의 학생들과 수업을 할 때 가끔 수업 중에 학생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5년 후에 선생님을 우연히 만나게 됐어요. 그때 선생님에게 뭐라고 말할 거예요?"

한 남학생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손을 번쩍 든다.

"선생님! 예뻐졌어요."

"그럼 선생님이 지금은 예쁘지 않아요?"

"아니요, 아니요." 학생이 당황한 듯 손사래를 친다.

(이 학생은 의기양양할 만하다. 교실에서의 모든 문답은 교육적인 목적이 포함됐음을 눈치채고 선생님이 좋아할 만한 대답의 내용뿐만 아니라 '안 예쁘다'라는 상태가 변화를 겪어 '예뻐지다'에 이르고 그것이 현재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완결했다는 의미로 과거형인 '예뻐졌다'에까지 이르는 문법 형태를 완벽하게 생각해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그 옆 학생이 선생님이 원하는 대답이 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여유 있게 손을 든다.

"선생님!  예뻐졌어요."

"좋아요. 그런데 조~~금 부족하네요."

그 학생은 이거 이상의 대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그때 뒤에 있던 학생이 뭔가를 깨달은 듯 손을 번쩍 든다.
"선생님! 여전히 아름답네요!!!"

"딩동댕~~~. 꼭 그렇게 말해 주세요. 약속~~!!"


내가 학생들과 이런 다소 장난스러운 대화를 하는 날은 '여전히'라는 단어를 가르친 날이다. 강사들은 학생들에게 단어나 문법을 기억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대화와 상황을 연출한다. 그리고 교실은 어떤 설정과 캐릭터들이 형성되는 흡사 리얼리티 예능이나 시트콤처럼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무언의 약속 안에서 여러 가지 예문이 만들어진다.


학생들은 그 후로 학교에서 나를 만날 때마다 "선생님!"하고 뛰어 와서 약속을 지키고 간다. 영문을 모르는 다른 선생님들 옆에서 잠깐의 민망함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여전히'의 사전적인 의미는 '전과 다름없이'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이렇게만 가르치면 학생들은 '여전히'의 맛을 살리는 문장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 시간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변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그런데 가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을 때,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 같은 상태를 마주할 때 그 예상과 다른 모습에 멈칫하는 순간 '여전히'라는 단어를 내쉬게 된다. 시간이 이만큼 지났으니 변해야 맞는데 예상과 달리 변하지 않은 것을 만났을 때의 가벼운 놀라움. 그것이 들어 있어야 굳이 '여전히'를 입 밖에 내놓는 의미가 있다.


십 년 만에 만난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밤이 몹시 깊었고 여전히 비는 뿌리고 있었다.

그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술을 잘 마신다.

(고려대한국어사전)


왠지 모르겠지만 요즘 줄곧 '여전한'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최근 몇 달 화두가 되어 머릿속을 맴돈다.


사람들은 가끔 어떤 것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세월이 흘러 나는 어쩔 수 없이 변해 가도 '토이'의 노래에서처럼 내가 순수했던 시절 사랑했던 사람은 그 시절 아름다웠던 모습 그대로이기를 기대한다. 나는 세파에 휩쓸려 저만치 떠내려가도 누군가는 그 시절 그 자리에 그대로 버티고 있어 주기를 희망한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변화가 배신이나 변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초심을 잃지 말자."는 다짐을 비장하게 지니고 다닌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변하기를 바라는 것들의 변화는 너무나 더디다. 시간이 지나면서 좀 나아지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들이 많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단점들은 고치려고 애를 써도 고쳐지기가 쉽지 않다. 사회의 인식이나 국가의 제도의 변화도 당장 갈급한 사람들의 목을 축이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거북이걸음이다. 개인이라면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할 것이고 나라라면 국민들을 나 몰라라 한다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변하기를 바라는 것은 여전하고 여전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변하기 일쑤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실제로는 시간과 함께 흘러가고 있고 크게 변했다 싶은 것도 알고 보면 본질은 여전한 것들이 있다. 다만 내 기대가 다를 뿐이다. 그러니까 누군가 나에게 여전하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누군가의 기대를 기준으로 한 것일 뿐 내 것이 아니다.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라는 뜻밖의 칭찬을 듣는다고 해도 말이다.


나는 살면서 굳이 여전하려고 애쓰고 싶지 않다. 그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내 몸과 마음에 찾아오는 변화를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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